이규항 “밥맛과 숫자 0은 부처의 깨달음과 통하는 최고의 행복”
‘0과 중용의 가치’ 전파하는 이규항 前 아나운서
이규항 전 아나운서가 ‘윤집궐중(允執厥中·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이란 말로 중용의 도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양위를 하면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게 정치를 하라며 당부한 말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1970년대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고교야구부터 1982년 출범한 KBO 프로야구, 이만기 강호동이 모래판을 뒤집던 천하장사 민속씨름 전성기 시절까지…. 야구와 씨름 중계 전문 캐스터로 활약해 온 이규항 전 KBS 아나운서실장(82)은 유려한 말솜씨와 정확한 우리말 구사로 팬들에게 목소리가 익숙한 ‘전설의 아나운서’다.
그런 그가 35년간 재직해왔던 KBS를 퇴직한 후에 뜻밖에도 불교의 선(禪)과 중도(中道)를 ‘수학의 0’과 ‘음식맛’으로 풀어낸 ‘부처님의 밥맛’(동아시아)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일본에서 ‘0의 행복’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불교에 빠져들고, 활발한 저술과 강연활동에 나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인생에서 고비를 맞은 것이 50대 초반이었다. 술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 음주 도중 심장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쓰러졌다.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고 회복하던 중 그는 갑자기 ‘아, 이것이 바로 0의 행복이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법열(法悅·깨달음의 황홀한 기쁨)이 온 것이었다. 그는 “살았구나!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이 아니었다”며 “‘0의 평상심’을 느끼게 해준 병상은 깨달음의 보리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30년간 불교의 중도, 유교의 중용(中庸) 등 동서양의 종교와 과학, 수학을 연구해 ‘중도’와 ‘중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이 책을 펴냈다. 그가 내놓은 ‘염불(念佛)’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다. ‘염(念)’자를 풀어보면 ‘지금(今) 마음(心)’이란 뜻으로, 염불은 바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자리의 위치를 ‘처음 본래의 마음’으로 이동하는 행위라는 것.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공(空) 사상’의 본질이 바로 숫자 ‘0’과 같습니다. 수학시간에 배운 x, y 좌표 평면이 있다면, 우리 마음자리는 시시각각 양수(+)와 음수(―)를 오가고 있지요. 내 경우 음주와 쾌락의 생활에서는 플러스(+)에 있었고, 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는 마이너스(―)에 있었습니다. 병상에서 내 마음자리가 ‘0’이 되었을 때 비로소 최상의 평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 거죠.”
그는 인도 카필라국의 태자였던 석가모니 부처가 깨닫는 과정도 숫자 ‘0’으로 설명한다.“붓다는 29세에 출가한 후 5년 6개월간 몸을 극도로 괴롭히는 고행(苦行)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죠. 이후 고행 수행을 포기하고, 우유죽으로 기운을 차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갑니다. 이른바 ‘재수(再修)’를 해서 40일 만에 깨달음을 얻게 되죠. 태자 시절 세속 최고의 ‘단맛’(+)을 보고, 출가 후 고행하며 최고의 ‘쓴맛’(―)을 본 다음, 제3의 세계인 중용(中庸)에서 최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란 단순히 평균적인 중간값이 아닙니다. 양극단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생활을 체험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깊은 깨달음입니다.”
그는 책에서 일상생활에 밀접한 ‘음식의 맛’으로도 중도를 설명한다. 밥맛, 물맛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최고의 ‘0의 맛’으로 설정하고, 플러스(+) 쪽에 붉은 살 생선, 과일, 해산물을 넣고, 마이너스(―) 쪽에는 김치, 고추, 씀바귀, 고수까지 도표로 꼼꼼하게 정리한 도표는 매우 흥미롭다.
“호박 맛을 알게 되면 인생의 철이 든다고 합니다. 호박보다 더 맛없는 인생의 맛을 경험했다는 뜻이죠. 씀바귀나 고추, 보리밥이 마이너스(―) 성질을 갖고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맛과 취향에는 우열이 없죠. 우리 인생에도 플러스의 1세계, 마이너스의 2세계, 0의 제3세계를 무차별심(無差別心)으로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0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교는 바로 일상의 철학인 셈이죠.”
그는 현직에 있던 시절 KBS한국어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퇴직 후에도 올바른 우리말 발음법 관련 책 저술과 강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표준 한국어 발음사전’(공저) 편찬에 참여한 그는 지금도 ‘걸어다니는 발음사전’으로 불린다.
그는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진행자들이 너무 공격적인 말투가 많아 듣기 괴로울 때가 많다”며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이란 새로운 문자를 가르치고(訓民), 올바른 발음(正音)을 가르친다는 뜻이었는데, 요즘 방송에서는 정확한 우리말 발음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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