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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연은 자신과 난생 처음으로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이렇듯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당연하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어.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앞으로 언제 어느 때라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나한테 말하
면 돼. 알았지?
-예.. 알겠어요.
강운은 그 후로도 날이 새도록 채수연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십 수 년 동안 마음속에만 간직해왔던 말들을 강운에게 모두 털어 놓
아 버린 채수연은 마음속이 편안해 짐을 느끼며 새벽녘이 다 되어
서야 잠이 들었다.
더 이상 채수연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전해져 오지 않자 강운은 벌써
환해져 오고 있는 바깥을 바라보며 창문을 옅어 젖히고 상쾌한 새벽
공기를 길게 들이 마시었다.
“후우.. 날을 새 버렸네? 지금 자면.. 못 일어 날 테고. 그냥 안 자는 게
낫겠다. 심심한데 추남형이나 깨울까? “
강운은 곤히 자고 있는 추남을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
며 서서히 접근해 가서는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 추남의 코와 귀를
살살 간지르며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게 준비를 했다.
“으흠.. “
추남이 몸을 비틀며 신경질 적으로 팔을 휘두르자 강운은 추남이 휘
두르는 팔을 가볍게 피한 뒤 조금 강도를 쎄게 해서 추남을 간질렀다.
“으흠.. 으익! 뭐야? “
결국 참다못한 추남이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
으키고 눈을 뜨자 강운이 재빠르게 방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보
였다.
“형아! 미안해~! “
강운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소리를 질렀을 때쯤에야 어찌된 상황
인지 이해가 된 추남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꽥 질렀다.
“강운! 너 이따가 두고 보자! “
강운이 벌써 멀리 도망쳤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추남은 신경질 적
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서 옷을 껴입고 강운을 찾기 위해 일층
으로 내려왔다.
추남이 일층으로 내려오자 어느 새 일어나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
은 객점 이곳저곳을 수리하는 채삼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강운은
식탁에 앉아서 차를 홀짝 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어? 형아 내려 왔네? 빨리 와서 차 마셔. 내가 형아 것 까지 시켜
놨어. 헤헤. “
추남이 지금껏 강운에게 매번 당하면서도 결국 아무소리도 할 수 없
게 만들어 버렸던 강운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흘러나오자 추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쉬며 강운 앞에 앉았다.
“운이 너! 다음에 또 장난하면 혼날 줄 알어? 알았지? “
“응. “
강운은 차를 마시며 무성의 하게 대답하였지만 추남은 더 이상 나무
라지 않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근데 운아! 사천에는 왜 가자고 하는 거냐? “
“아.. 들릴 곳이 있거든. “
“운이 너가 들릴 곳이 어디있어? 이번에 중원에 처음 나와 보는 거라면
서? “
“글쎄.. 있다니까.. “
원래 추남은 하남 지방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강운이 갑자기 사천
으로 가자고 우기는 바람에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자신들 역시 특별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는 이상 사천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운이 특별히 사천에 들러볼 곳이 있다 하니 추남으로서는
의아스럽기만 했다.
“뭐.. 운이 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사천에는 나도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으니. 그럼 오늘 떠나야겠지? “
“어? 오늘? “
지금껏 그 어떤 일에도 놀라는 일이 없었던 강운이었기에 추남은
강운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늘 떠나자. 어차피 사천에 갈 거라면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러 봤자 좋을 게 없잖아? “
“아니.. 그게 아니라. 내말은.. 이곳에 조금 더 머물렀다 가자고. “
추남은 강운이 또 다시 어울리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
하자 뭔가 큰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에 계속 밀어 붙이기로 했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그러면 이따가 오늘 오후에 떠나자.
그러면 되지? “
“아니.. 조금 더 뒤에.. 그러니까 20년 후에 떠나자. “
“그래.. 그러지.. 뭐? “
추남은 20년이라는 말을 20일로 잘못 알아듣고는 흔쾌히 대답을 했다
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멍청한 얼굴로 강운을 쳐다봤다.
결코 장난하는 표정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강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운아.. 잠, 잠깐만.. 방금 20년이라고 했어? “
“응. “
강운의 표정을 보건데 결코 장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추남이
이번엔 역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는 강운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
이기 시작했다.
추남은 강운의 너무나 충격적인 한 마디에 당황하는 바람에 강운의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20년이라니? 운이 네 말은 이곳에
서 20년 동안 살자는.. 뭐 그런 소리는 아니지? “
“맞어! 그 소리 맞어. 역시 형아는 똑똑 하다니까. “
“그러니까 운아.. 내말은 20년 동안 이곳에서 뭐 하고 살 건데? 그리고
너 사천에 들려볼 곳도 있다고 했잖아? 응? 장난하지 말고 그래.. 20
일 있다가 떠나자. 그러면 돼지? “
“안돼! 20년 있다가 갈 꺼야. 이따가 화린 누나 내려오면 말해 줘야
겠다.”
정말 장난기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강운의 모습에 추남은
혼란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강운이 떠나지 않는 이상 화린은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자신도 떠나지 못 할 것이라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가 갑자기 왜 이럴까?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어쩔 수 없는데..
화린이 한테 부탁을 해야 겠구나. 운이가 화린이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니까.. ‘
강운의 시각으로 봤을 때 20년이란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기에 쉽게 내 뱉은 말이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20년이면
거의 인생의 사분지 일 정도의 엄청난 기간이었기에 추남은 반드시
강운을 설득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었다.
얼마 후 채삼보는 크게 부수어져 고칠 수 없는 곳을 빼 놓고는 객점
을 모두 수리하고서 강운에게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강공자님! 아침 식사를 준비 할까요? “
“흠.. 이따 화린 누나 내려오면 그때 부탁할 게요. “
“예. 그럼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
“그건 그렇고.. 강공자님이라는 말 대신에 그냥 편하게 이름 불러주면
안 돼요? “
강운은 채수연의 할아버지가 자신을 자꾸 강공자님이라고 높혀 부르
며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이 거북하기만 했다.
“아이고.. 안될 말씀입니다. 소인 같은 것이 어떻게 공자님 같은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것이 편하니 신경쓰지
지 마시고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
강운은 노인이 너무나 완강한 태도로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불퉁 내밀고는 추남을 바라봤는데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강운이 고개를 막 돌려보았을 때 추남은 지금껏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강운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아! 왜 그래? 꼭 어디 아픈 사람 같다.. “
“어? 아.. 그러니까..아니다. 이따가 화린이 내려오면 그때 얘기하자.”
“할 말 있음 해봐. 왜 이따가 얘기해? “
강운이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하자 추남은 찻잔을 돌리며 딴청을 부
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추남이 그렇게 기다리던 화린이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추남은 나는 듯이 달려가 화린을 붙잡고 데려와서
강운 앞에 앉혔다.
“화린아.. 휴.. 너 왜 이제 내려오니? 글쎄 운이가 전에 사천으로 가자
고 했잖아? 그런데 여기서 20년 동안 살다가 가자는 거야? 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래도 운이가 화린이 네 말은 잘 듣는 편이니
까 빨리 설득 좀 해봐라.. 내 말은 들어먹지가 않으니. “
오랫동안 참았던 탓일까.. 추남은 화린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화린은 전에 없이 흥분하여
거의 소리치듯 말을 하는 추남을 멍하게 쳐다봤다.
“오라버니.. 진정 좀 하시세요. 그러니까 오라버니 말은 운이가 이곳
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가자고 했다는 거잖아요? “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
화린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정신을 깨우기 위해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든 다음에 추남과 강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추남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 보
고 있었고 강운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된 화린은 한숨을 푹푹 쉬며 입을 열었다.
“후.. 오라버니.. 운이 장난에 넘어가신 거네요. “
“뭐? 장난에 넘어가다니? 엇? 너 그 웃음은 무슨 뜻이야? 설마 지금
까지 진지한 척 했던 표정이 다 거짓이었단 말이야? 너.. 이.. 이! 나
를 속였어!? “
추남은 강운의 장난에 자신이 너무 쉽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힘없이 푹 수그렸다가 눈에 뜨일 정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매서운 눈빛으로 강운을 쳐다봤다.
“운이 너! 오늘 잡히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벌써 객점 문 밖까지 도망가 자신에게 혀를 낼름 내밀고 있는 강운의
모습을 본 추남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강운을 잡기 위해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팔을 잡는 바람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마음 넓으신 오라버니가 참으세요. 후훗! 그래도 운이
귀엽잖아요? “
추남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화린이 생긋 웃으며 말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 아름다운 미소에 넘어가 자리에 앉아버리고 말았다.
추남이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강운의 순진무구한 웃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화린의 미소는 아름다웠던 것이다.
“휴..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조막만한 애를 줘 팰 수도
없고 말이야.. 근데.. 이젠 더 이상 운이가 귀엽지 않아! “
추남은 자신의 화가 풀렸다는 걸 어느새 알아차리고 자신에게 슬금슬
금 다가오고 있는 강운을 쳐다보며 소리를 빽 질렀고 그 순간 강운의
움직임이 딱 하고 멈춰졌다.
자신의 소리가 너무 커서 강운이 감짝 놀란 것이라 생각한 추남은 그
동안 쌓여왔던 울분이 한순간에 달아나는 듯한 쾌감을 맛볼 수 있었
다.
얼마 후 자신의 눈치를 슬슬 보며 다시 다가올 것이라 생각 했던 강운
이 멈추어 진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무언가에 심하게 놀란 듯한
표정으로 멍하게 동쪽을 쳐다보기 시작하자 추남은 무언가 잘못된 것
이 아닌가 생각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운에게 다가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