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포, 그 겨울바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석조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찾아 온 아들 재성이가 오후에 한 바퀴 돌아볼 곳을 정하라 하였다. 서해안 쪽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일기예보가 있을 때마다, 겨울바다와 눈 덮인 변산반도가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며칠 전까지 엄청난 추위(-15℃)와 몇 십 년 만의 대설이라고 야단들이었지만, 며칠 동안 포근한 날씨로 길가에 쌓였던 눈은 다 녹아버렸다. 오늘은 날씨가 더 따뜻하여 드라이브(drive)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들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우리 부부가 동승했다. 김제 땅에 들어서니 밭고랑이나 논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고, 서해안 쪽으로 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 때쯤이면 동네 앞 논에 물을 잡아 얼음판을 만들어,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터인데 그런 장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지붕에 눈을 덮고 겨울잠에 푹 빠진 동네들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중앙분리대에 쌓인 눈이 녹아 도로엔 물이 흥건했다. 동진강을 건너가니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푸른 소나무가 더욱 돋보였다. 사육신인 성삼문의 시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라는 시조가 흥얼거려졌다.
1991년에 새만금간척사업의 첫 삽을 뜬지 18년이 지나서 3년 전(2006.4.21.)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군산과 부안 사이의 새만금방조제는 세계에서 제일 긴 방조제(33km)로 푸른 물결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방조제 위의 도로 시설과 2-4호 방조제 도로보다 낮은, 1호 방조제 도로 높임(5m) 공사가 끝나는 올 4월에 개통된다 하였다. 그동안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왔지만 방조제가 완전 개통되는 그날이 오면, 군산과 부안간의 넓은 방조제 도로 위로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이 줄을 이을 것 같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섬이 뭍이 되어버릴 새만금의 현장에 바닷물이 아직도 일렁이고 있었다. 새만금 방조제 밖은 수심이 깊어 국제항을 만들고, 고군산군도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된다니 물위에 뜬 섬들이 보물단지처럼 보였다.
변산 해수욕장의 방풍림인 푸른 소나무가 눈밭에 서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피서객들로 북적이던 모래밭에 하얀 눈이 덮여있고, 너른 모래사장에서는 옛날의 추억을 찾고 있는지 군데군데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물가를 걸으며 젊은 날을 되살려 보는데 아내와 쌍둥이 아들도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 중의 하나로 봄철에는 주꾸미와 가을에는 전어가 유명한 격포항으로 갔다.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졌다. 주변을 정비하고 있는지 등대 쪽은 출입금지여서 채석강을 찾아갈 수 없었다. 채석강은 변산을 대표할 만한 절경으로, 지각의 변동(융기와 침강)과 해수의 작용(침식 운반 퇴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층으로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다. 방파제 안쪽에는 어선들만 빽빽하게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를 여러 차례 데려와 대접해주던 음식점도 한가하게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격포항 왼쪽(닭이봉 반대쪽)에 해넘이 공원이 있다. 푸른 바닷물이 일렁이고 눈이 수북하게 쌓인 판자다리 위를 걸으며, 채석강 못지않은 지층을 처음 보았다. 지층에는 군데군데 굵은 고드름들이 아래로 쭉쭉 뻗어 내리고 있어 겨울바다의 추위를 말해주고 있었다. 방파제 너머에서 바다낚시꾼을 만났는데 낙조(落照)가 너무 좋다고 자랑하였다. 아내와 아들도 처음 걷는 길이라며 좋아 하였다.
오 년 전 우리 부부도 등산객들 틈에 끼어 이곳에서 정기여객선으로 위도의 망월봉을 등산하고, 섬을 한 바퀴 돌아 나왔었다. 위도에서 나올 때 붉은 해가 만든 수평선의 수채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곰소항 쪽으로 가다 전북학생수련원에 들렀다. 작년 여름에 왔던 1박 2일의 도민문학캠프 때 처음 왔던 곳이다. 운동장 밑 모래사장에서 솔섬 너머 서쪽으로 기운 해가 만든 멋진 석양을 감상했다. 모래와 바닷물이 만들어내는 ‘철썩 쏴~, 철썩 ~쏴’를 음악으로 들으며 걸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낙조를 사진으로 남기려는 듯, 카메라를 메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곰소항에 들러 제사용 수산물도 사고 부안읍 쪽으로 가다가,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보고 가자고 했다. 군소리 없이 차를 되돌려 학생수련원 쪽으로 달려주는 자식과 아내가 고마웠다. 일몰이 임박하여서인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로 해를 겨냥하는 사람도 서넛 있었다. 우리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수평선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붉은 해를 핸드폰으로 촬영하였다. 아내와 아들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보기 드문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내변산을 가로지르는 어두운 길로 변산면 소재지에 도착하였을 때는, 가로등 불빛이 더욱 밝았다.
(2010. 0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