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예배자로 나오신 저와 여러분의 삶과 우리의 자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마음 가운데 깊이 담으시고 그것들을 우리 함께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좌우 앞에 계신 분들에게 고백합시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광야의 여정 중 양식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해서 비같이 양식을 내리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은 하늘에서 양식이 쏟아짐으로 인하여서 그들의 삶의 실제가 되었던 것이죠.
오늘 그래서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히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여러분 저녁이 되어 이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그때에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으로부터 메추라기떼가 날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그곳을 향해서 떼를 지어 올라오게 된 것이죠.
여러분 메추라기라는 것은 꿩과 같은 철새로서 그림을 한번 보실까요? 그림과 같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나타나 있었던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저런 메추라기가 철새처럼 이동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메추라기의 떼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한번 상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60만 대군이 지나가는 그 자리에 얼마만큼 보내주어야 그들이 참 넉넉하다 그런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그 규모에 대해서 성경 민수기 11장 31절에는 이렇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바람이 여호와께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가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앉으라.
여러분 진영 사방으로 가기 하룻길이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영을 잘 이루고 있었겠죠. 그러니까 그 주위로 앞으로 가도 하룻길 뒤로 돌아서 뒤로 가도 하룻길 좌우로 가도 하룻길 이것을 반경으로 따지면 약 32kg 정도 되는 반경으로 하나님께서 내주라기 떼를 보내주신 것이죠. 굉장히 넓은 그러한 공간으로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바람을 통해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약속하신 대로 이 메추라기가 억수로 많았다고 우리는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죠.
또한 두 규빗쯤 내렸다고 이야기하죠. 한 규빗이 몇 cm입니까? 보통 한 규빗을 손끝에서 팔꿈치까지로 계산을 하죠. 45~50cm가량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규 규빗이라는 것은 약 100cm 정도 되는 그러한 높이 1m 정도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이 메추라기 떼가 아주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지면에서부터 1m가량으로 저공 비행을 하면서 이렇게 우리 주변에 지금 외출할 때가 몰려오고 있었다는 것이죠.
근데 여러분 이 메추라기 떼를 상상해 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볼 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묵상을 하는 가운데 10가지 재앙 중 이 마치 메뚜기 떼가 애굽 진영을 뒤덮었던 그러한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아침이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침에 그 진영 주위로 이슬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슬이 마른 후에는 어떻게 되었냐면 작고 둥글게 생긴 것이 꼭 서리같이 지면 위에 쌓였다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이 모습을 보면서 엊그제 우리 대구 땅에는 내리지 않았지만 저 강원도 지역이라든지 눈 내리는 지역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눈 내리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작게 내리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순식간에 세상이 변해버리죠. 주변을 돌아보면 빈틈 없이 소복히 쌓여 있는 그러한 눈덮인 세상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진영 주위에 이슬이 마치 눈과 같이 이렇게 수북하게 주변에 쌓여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또 어떤 모습이 그려졌냐 하면 마치 일곱 번째 재앙이었던 우박이 내렸던 그 애굽 땅의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그 애굽 땅에 재앙이 내릴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집으로 가옥으로 들어가라. 그 주변은 모두 죽음인 것이죠.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는 집으로 들어가야 불안한 상황. 근데 오늘 이 이스라엘 진영의 그 진영 주의로 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슬로 그들이 먹을 양식을 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비교는 해보았지만 애굽에 보내진 메뚜기떼와 내려진 우박은 사실 재앙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에는 메추라기떼로 아침에는 이슬로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현장 속에 하나님 재앙으로 하나는 은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15절을 통해서 은혜임을 알 수가 있는데 15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슬같이 내려 뭔가 자리잡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서로 말하는 거예요. 이것이 도대체 뭐냐 아마 이들이 처음 본 것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반응에 모세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냐 하면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사실 모세도 처음 보는 것이었을 거예요. 40년 이상 또한 40년가량 모세가 광야 생활을 먼저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그가 보지 못했던 것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서 그도 처음 봤던 것 서로가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이야기할 때 그때 모세는 이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다.
여러분 이 15절의 9절 말씀을 보면서 백성들의 반응은 야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 여기에 궁금함이 있었다면 모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것이 누구를 통해서 왔는가에 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누가 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 그리고 이 양식을 먹어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이름하여 만나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즉 이 만나라고 이름을 짓는 것을 보아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셨다는 것보다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31절 한번 보실까요?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까시같이 쉬고 맛은 꿀 섞인 과자 같았더라.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이 만나라고 부르는 이 양식을 왜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은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데 값없이 베풀어주신 것을 표현할 때 우리는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모든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죗값으로 수고를 해야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 인생이 된 것이죠.
하지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그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해 주신 대로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에 먹을 수 있었던 하늘의 양식 일용할 양식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실 황량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양식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당장 죽음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인 것이죠. 따라서 이들의 광야 여정은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공급해 주셨던 만나가 있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가난을 향해 걸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일은 우리가 빼야겠죠. 토요일 날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셨습니다. 결국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양식을 40년 동안 내려주셨다는 거예요.
우리 35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그런데 이들이 광야에서 먹은 이 만남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오병이어의 사건이 끝난 후 그다음 날 육신의 양식을 먹어본 경험이 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유는 육신의 양식이 그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온 목적을 아시고 말씀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즉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참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다
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요한복음 6장 32절에서 35절 말씀인데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터이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친히 공급해 주신 생명의 떡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떡임을 고백하는 우리에게는 결코 주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좀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나를 먹이신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지만 또 한 가지 우리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내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내가 알게 하려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시고 그 가운데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라는 사건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 육신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떡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즉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분명히 양식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의 양식 이상 영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여러분 광야에서 양식이 없으면 굶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영의 양식이 공급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육신의 양식 떡보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육신의 양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거는요.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문제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 10개월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퇴원하고 나면 엄마 자궁과는 또 다른 세상이 그들에게 준비되어져 있는 것이죠. 더 오랜 시간, 더 귀한 시간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 역시 죄악의 세상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엄마 자궁보다는 더 좋은 세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요. 썩어질 세상, 없어질 세상이라는 것이죠. 10개월과 태어나서 오랜 세월 살아가는 인생을 비교하자면,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의 생활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엄마 아버지, 내가 이 아이를 잘 양육해야만 이 아이가 이 세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시간 오래 살아봐야 120이겠죠. 살아가는 이 세상 역시 죄의 관영에 있는 땅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생명은 어떻습니까? 영혼과 관련이 있다는 영원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믿음으로 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된 세상이 아닌 의로우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한번 비교를 해보십시오. 자궁의 10개월과 이 세상에서 사는 인생의 삶 비교가 됩니까? 혹 이거는 비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의 양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은 육신의 양식을 입기 위해서 이 땅에서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반면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요. 썩어질 양식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영원한 나라가 무엇인지 알기에 썩어질 양식을 구하는 일에 급급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영원한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마태복음 6장 33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
더해주는 것으로 관심 갖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라고 그렇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 그렇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바라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소홀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먹고 사는 인생의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리가 소홀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족감을 누리고 즐거움을 주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시죠. 55장 2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한번 이어서 이야기하는 말씀을 따라 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따라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원히 살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와서 들어라 나와서 들어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여러분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영혼이 잘됨으로 인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형통한 또한 우리의 삶이 강건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수같이 많은 양의 양식을 보내주시고는 명령을 하시죠. 각 사람은 먹을 만큼 거두어라. 즉 식구 한 명당 5 한오메씩 한 오멜씩 그렇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해 주셨습니다.
이 명령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17절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여기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까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들이 한 오멜씩 재기 위해서 측정기를 가져간 게 아니잖아요. 나름대로 요만큼 요만큼 이게 한 오멜 정도 될 거야 하고 가져왔으니 제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대중으로 가져왔던 그들의 이 양식이 18절의 기록은 이렇게 설명으로 대신해 주고 있다는 거 우리 18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오멜로 되어 본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었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이 오레로 재 보았더니 거둔 자들의 모든 것이요.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적게 걷은것 같았는데 되어보니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이 먹을 양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나는 여러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경험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된 것이죠.
여러분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시편 34편 9절 10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죠. 같이 읽어보실까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줄일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밀림의 왕자 사자가 굶주릴 일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젊은 사자 얼마나 날새겠어요? 마나 힘이 세겠어요? 그 사자가 밀리면서 불을 잃은 별로 없어요. 그만큼 능력 있는 것이 사자입니다. 오죽하면 밀림의 왕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런데 혹시라도 그러한 젊은 사자가 굶는 때가 있을지라도 여호와를 경유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해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참 복자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 하나님 나의 목자가 되어 주셨으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 고백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 만나 사건을 인용하여서 그들에게 구제에 대해서 권면을 하는 메시지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풍성한 연보에 대한 말씀의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기쁨으로 또한 힘이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연보한 마게도냐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야 고린도 교회 너희들아 지금 힘들고 빈피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연보해야 된다.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그 8장 안에 소개를 해주고 있는데, 여러분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난하게 되셨습니까? 여러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부유함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유함의 본체를 죄악되고 비천한 그리고 가련한 인간의 몸을 잊고 성육신 하심으로 인하여서 그 부유함을 포기하시고 이 가난한 세상 가운데로 친히 오셨다. 가난을 택하셨다는 것이죠. 그로 인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라는 부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리스도의 가난하심, 그 가난하심으로 인하여서 믿음으로 고백할 때 부요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부요는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을 부여케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까지도 부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복음은요. 연보입니다. 도네이션이라고 이야기하죠. 요즘 사회적 기업에서 나누는 우리의 것들을 기부해서 서로 나누는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네이션 그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연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찔리셔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상함을 입으셔야 했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셔야 했습니까? 자기 희생, 자기 것을 내어주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기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부요를 얻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는 가난함을 선택함으로 우리가 남을 얻는 부여를 얻게 되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의 진리인 것이죠. 이렇게 가난의 짐으로 부요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언급한 후에 오늘 본문 18절에 기록된 그 말씀을 인용해서 고린도 교회에게 권면하는 거예요. 그게 8장 14절 15절인데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건을 인용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에게 허락한 이 넉넉함은 모두가 나누고 평균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같은 그래서 모두가 다 먹어도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보다 나에게 넉넉한 주신 은혜가 있다면 이것을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 이 부족한 세상을 아름답게 세워가는 그러한 복음의 통로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어젯밤에 우리 지난주까지 함께 섬겨주신 패딩을 이렇게 나눠드렸다고 해요. 어르신들 갑자기 추워졌으니 얼마나 추웠겠어요? 어젯밤에 그렇죠. 추운 일기 속에 갈 곳이 없어 아무 곳에서나 주무셔야 하는 그분들에게 그 따뜻한 패딩을 입혀드렸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좋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나누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나눔이 어떤 분에게는 진짜 행복합니 찾아가 주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대림절 세 번째 주 세 번째 초를 밝힙니다. 세 번째 초는요. 사랑과 나눔, 서로 기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빛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가 있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마음껏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이번 24일 주일 저녁에 사실 저희가 붕어빵을 가지고 어르신들에게 가려고 했는데 이제 식고 또 이렇게 좀 좋지 않아질 것 같아서 계획을 수정해서 그분들이 또 원하시더라고요. 밥 한 고기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뭔가 좀 다르게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사랑을 담아서 조금이라도 나눌 수만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되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고,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빛, 특별히 이 나눔의 빛을 가지고 이 땅에 평등케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가운데 널리 선포되어지고 나누어지는 그러한 은혜의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