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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여전도회 헌신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고난 중에 다시 만난 하나님
욥기 38:1-7
여는 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성경은 이런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행복한 삶을 보낼 때보다 괴롭고 힘든 삶을 보낼 때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삶의 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날보다 고통스러운 날에 우리 인생이 꼭 만나야 하는 예수님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날이 우리 삶에 다가올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욥기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오늘 이 오후 시간에 욥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나는 그런 복된 시간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게 될 때 늘 느끼게 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욥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입니다. 욥이 가지고 살았던 신앙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신앙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욥이 당했던 고난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었고 또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몸은 병이 들어서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욥이 당했던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든지 욥을 위로하러 찾아왔던 동업자들이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신학교 시절에 당한 고난
이런 욥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제 삶에도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신학교를 다니면서 증산동에 있는 모 교회에서 청년부와 주일학생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기고 있던 그 교회에서는 고난주간을 앞두고 21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40일 정도 계속되고 있었던 감기와 심한 기침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간 진찰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제 얼굴을 보시더니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하시면서 피 검사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 검사를 하게 되었고 검사결과를 본 의사선생님이 써 주신 진료의뢰서를 들고 세브란스 병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다시 피검사를 했는데 검사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의 지시를 따라 골수 검사를 예약하고 골수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보기 위해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 한 검사에서는 혈소판 수치가 전보다 8,000(?)이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나쁜 소식은 골수검사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뼈 속에는 피를 만드는 골수라는 조직이 있는데 제 뼈 속에서는 이 골수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검사가 잘못되었을 수 있으니 우선 치료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3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갈 때마다 혈소판 수치는 8,000(?)씩 일정하게 계속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혈소판 수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67Kg이던 제 몸무게가 55-56Kg 까지 빠졌습니다. 그러더니 뼈가 아파 오기 시작하였고 걷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섬기고 있었던 교회는 상가 2층에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교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층 교회로도 곧 바로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뼈가 너무 아팠습니다. 저는 그 2층 계단을 올라가려면 최소한 몇 번은 쉬었다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준비해 오던 여름 캠프도 마무리 짖지 못하고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던 그 어느 날 담당의사가 제게 오늘은 주사실에 가서 주사 두 대 맞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시간에 관계없이 응급실로 와서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하면서 전화번호가 적은 쪽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첫째,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경우. 둘째, 코에서 코피가 나오는 경우, 셋째, 입안에 피 주머니가 잡혀서 터지는 경우에는 바로 응급실로 와서 입원수속을 밟으면서 연락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주간부터 눈에서 피가 터지면서 눈은 마치 고양이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코피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코 속을 닦으면 피가 묻어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아침에는 입 안 양쪽에 큰 피 주머니가 하나씩 생겨나 있었습니다. 혀로 만져보니 그 크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광교회에서 있었던 일
이때부터 저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을 되돌아보니 늘 죽음이 저의 삶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앞차를 추월해 오던 트럭에 충돌할 뻔 한 일이 있었고, 중학교 때에는 밤에 혼자 강에서 수영하다가 소용돌이 물에 휩쓸려 위험했던 일이 있었고, 군에서는 교통사고가 나서 사경을 헤매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던 일이 있었으며, 병원에서 주사를 맞다가 쇼크가 일어나서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경우는 세광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제가 세광교회 청년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어느 추수감사절에 이 강단 오른 쪽에 감사나무를 세워놓고 거기에 여러 가지 과일을 매어 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는 청년들과 함께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다 끝나고 마무리하고 있는 그 시간에 어떤 분이 커다란 호박을 가지고 와서 이것도 그 나무에 달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A자 사다리는 세워놓고 호박을 달기 위해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섰습니다.
당시 감사나무에는 이미 많은 과실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과일들이 주로 어디에 달려 있었겠습니까?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려고 오시는 성도님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앞쪽에 과일을 많이 달았습니다. 그래서 벌써 나무의 균형은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큰 호박은 어디에 달아야 했을까요?
호박이 워낙 커서 뒤쪽에 달아도 잘 보일 것인데 이 큰 호박을 주일날 성도님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한다고 하면서 앞쪽에 단 것입니다. 그러자 감사나무가 그 호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기울면서 그 중 한 가지가 제가 밟고 있었던 A자 사다리를 밀쳐버렸습니다. 그때 저는 그 갑작스러운 충격에 깜박 정신을 잃고 떨어졌습니다. 당시 상황을 가까이서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제가 공중에서 회전하면서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세광교회 성도 여러분. 세광교회 본당의 바닥이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콘크리트 바닥이 아닙니까? 그 때 만약 제가 그대로 떨어져서 머리가 이 바닥에 떨어졌더라면 아마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그 사고로 죽도록 정해 놓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제가 어떻게 살아났을까요?
또 그 당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증언에 의하면 제가 공중에서 돌면서 머리가 먼저 떨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한쪽 손을 바닥을 향해 뻗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뻗은 손이 먼저 땅에 떨어지고 그 다음에 제 머리가 그 손위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충격으로 저의 손목뼈는 금이 갔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렇게 믿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던 여러 가지 사고 속에서도 저를 살려주셨던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해 주의 교회를 섬기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 때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해 추수감사절이 온전한 감사절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를 은혜로 살려주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욥기를 읽다
의사의 말대로 제 입안에 피 주머니가 잡혀 있을 때, 저는 욥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욥기를 읽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정독하면서 읽었습니다. 그 때 저는 욥도 저와 같이 죽음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기 3장을 보면 욥은 그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욥의 말 때문에 욥과 욥의 동업자들 사이에 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일을 저주하는 욥의 말을 들은 그 동업자들의 마음속에 이런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제까지 욥이 ‘신앙도 좋고,’ 그 삶도 ‘대단히 의롭고 경건한 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생일을 원망하고 있는 욥의 말을 들으면서 욥이 실재로는 그렇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과 또 ‘하나님의 인과응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욥을 권면합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깨달아지고 생각나거든 그 죄를 회개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면 다시 소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이런 동업자들을 향해 자신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무죄함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고난당하고 있는 욥을 정죄하는 욥의 동업자들의 모습 속에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파하고 고통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겠습니까? 욥의 친구들과 같이 ‘너 혹시 죄 지은 것 아니야.’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고통하고 아파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욥이 고통 가운데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 욥의 불신앙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몸이 너무 아프고 우리 몸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입에서 신음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욥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인생의 고난이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인생을 한탄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광교회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힘든 삶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더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긍휼한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담 안에서 타락한 우리들은 정죄하기를 너무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실 때 당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실 때 얼마나 판단할 일이 많고 얼마나 정죄할 일이 많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고소할 때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인인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실 때도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고 ‘저가 이런 저런 죄를 지은 죄인인데’ 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너희는 나를 손님으로 청해 놓고 손님을 청했으면 반드시 해야 할 손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향유를 내 발에 붓고, 그 머리털로 내 발을 씻고 있다.’ 라고 하시면서 이 여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변호해주셨습니다.
어떤 여인이 성전 연보 궤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두 렙돈의 작은 돈을 헌금을 할 때 사람들은 그 가난한 여인을 무시했지만 그 여인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며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구제헌금을 바치고 있지만 이 여인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비 전부를 넣어 헌금하였다.” 라고 아시면서 그 여인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이런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들추어내어서 정죄하고 책망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 교회의 거룩 성이 유지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들은 사랑하고 용납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일정표를 보니 오늘은 새 생명 축제를 한 주일 앞에 두고 있는 날이더군요.
그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 보시려고 기도하고 섬기고 접촉하며 전도해 오셨을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여러분이 그간 수고하고 애쓴 열매인 많은 영혼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장래 세광교회 집사도 나올 것이고 권사도 나올 것이고 장로도 나올 것이고 저 같은 목회자도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를 성도로 만들고 성도들은 헌신자로 만들고 헌신 자를 충성하는 사역자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욥의 동업자들 같이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주 여러분의 교회에 보내주시는 영혼들이 비록 부족하고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용납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인정해 주고 여러분의 교회에서 함께 비빌 수 있는 언덕을 마련해 줄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긍휼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긍휼의 마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천하를 다니면서 한 영혼을 얻은 후에 자신들보다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긍휼이 있는 마음으로,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다음 주 여러분의 초청을 받고 세광교회에 처음 나오게 될 사람들 속에서 과거 제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제가 세광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었을 때는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군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때 받은 그 충격으로 대인관계가 지장을 받을 정도로 정신은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 고통 때문에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어려울 것 같아서 경험도 없이 돈을 빌려서 시작한 일이 잘 되지 않아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많은 빚까지 지고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목회자까지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부족한 저를 용납해 주고 함께 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비빌 수 있는 언덕을 마련해 준 청년들과 교회 성도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광교회는 저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키워준 믿음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 때 함께 하셨던 분들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베풀어준 배려가 오늘의 저를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여러분의 세광교회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세광교회가 당시 저의 부족함을 들추어내어서 정죄하고 책망하였더라면 저는 이 교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저도 있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광교회 성도님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세광교회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잘 이어나가서 계획하고 계신 새 생명 축제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을 밝히어 나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신원하는 욥
동업자들과의 긴 논쟁을 하면서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었던 욥은 이제 동업자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를 아뢰고 신원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동업자들이 자신을 정죄하는 그 말이 맞는지 아니면 나는 무죄한데 고난 받고 있다는 자신의 말이 맞는지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런 욥의 요청을 들으신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8:1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욥의 탄원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욥기 38장-41장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을 읽어 보면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말씀을 보면 땅과 바다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눈과 비와 번개와 폭풍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하늘의 별들이 어떻게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며 움직이는지, 땅의 짐승과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하나님은 욥에게 오히려 묻고 있으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오신 창조의 역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욥에게 제시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해 네가 아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욥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응답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욥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욥이 질문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아니고 욥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분이십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도,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도, 욥이 하나님께 그 자신의 고난의 원인에 대한 판단을 요구할 때도 우리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같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점쟁이와 같이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질문에 대답하셔서, ‘이번에는 경기가 회복되고 있느니 음식점을 하라,’ ‘이번에는 집값이 오를 것이니 집을 사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할까요?’ 라고 기도하면, 우리가 묻고 질문하는 것에 응답하셔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라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너를 함께 해 줄 것이고 내가 너를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은혜로 채워 주시고 하늘의 기쁨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도록 하시고 의지하도록 하시고 이런 믿음 안에서 우리가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우셔서 우리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우리에게 응답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묻는 질문에 답을 주실 수 없으셔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실 때 우리를 꼭두각시나 로봇 같이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같은 독자적인 한 인격체로 보고 대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집을 사라, 식당을 해라’ 하시면서 우리의 결정권을 박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을 가진 존재 창조하셨고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격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존중하셔서 우리 스스로가 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른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때로는 말씀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하늘의 기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서 하든지 우리가 믿음으로 결정하고 하나님을 위해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되고 싶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이 보인 반응입니다.
욥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묻는 질문에는 한 말씀도 대답해 주시지 않으시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이 아시고 하실 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네가 여기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보라고 물으시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욥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으시는 그 모든 질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삶아가는 자신 유한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역사들은 시간과 공관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욥은 이 세상 속에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깨달을 수 있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하나님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속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욥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욥에게는 고난 그 자체도 큰 아픔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아픔은 자신이 왜 이런 극한 고난을 당하며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질문하심을 듣고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욥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이 볼 때에는 자기의 삶에 왜 이 극한 고통이 왔는지 그 이유도 그 원인도 전혀 알 수 없지만, 자기보다 더 지혜가 크신 하나님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차원에서 보면 자신에게 그렇게 고난을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할렐루야! 아멘!
욥은 이런 깨달음이 오자 그 동업자들과 무지한 논쟁을 해 온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더 이상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게 됩니다.
이 회개가 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은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잘 아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의 시작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악 됨을 보는데서 시작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욥의 동업자들은 인과응보사상에 근거하여 욥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징계를 받고 있다고 하며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욥은 그런 동업자들에게 나는 정말 죄를 짓지 않았으며 무죄한데 까닭을 알 수 없이 죄인처럼 고난을 받고 있다. 라고 하며 자신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깨닫고 보니,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에게 고난이 왜 왔는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자기보다 크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런 고난을 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그 눈으로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보고 또 그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고난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욥과 같지는 않지만 고난 중에 있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 어려움이 내게 왔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고민하고 계신 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욥이 바라보았던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욥과 같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원인도 그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신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해로는 도저히 이해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이 내게 일어나도록 내 버려두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해는 제 마음에도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이해는 내가 이런 고난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이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이유를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저의 마음속에 주권적인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고난을 주셨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발견한 말씀이 욥기 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보면 욥에게 왜 고난이 왔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에 욥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시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이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이 땅을 두루 다니다가 하나님 존전에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단에게 욥에 대해 이렇게 자랑하셨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다 이런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 때 사단은 하나님께 어떻게 욥을 참소합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자녀를 복 주시고 건강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욥에게서 빼앗으시면 욥은 그 즉시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고난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욥을 참소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고난이 온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저는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때 깨달은 말씀을 나누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욥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첫째, 욥이 당한 그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단이 마음대로 우리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해를 가지게 되면 오는 확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한 시험이 어떤 시험이든지 관계없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또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게 하시면서 까지 하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귀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시험을 우리들이 믿음을 떠나 망하게 되게 하는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신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험은 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시험이 너무 커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라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시험은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반드시 그 시험을 견디고 넘어가야 할 때에는 기적을 베푸셔서 라도 피할 길을 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도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황성주 생식으로 영양보충을 하도록 해 주시고, 나중에는 면역 증강을 위해 야채스프요법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멸종된 곤들메기라는 고단백 어류까지 일본에서 들여와서 먹으며 건강을 회복해 가는 피할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요즘에는 시찰회 원로목사님을 통해 면역에 도움이 되는 식품을 권함 받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피할 길들도 없다면 어떻게 해 주시겠습니까?
피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을 그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피할 길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또 욥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둘째, 욥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대표자로 서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 대표자로 서서 고난을 받았습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자녀의 축복을 받고 건강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적인 복과 자녀의 복과 건강의 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과 관계없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대표자로 서서 고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멘
저는 우리 모두의 신앙이 다 이런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하나님이 주신 복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는 대표자로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 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내 생애가 비록 2-3개월 한시적인 생애만 남았더라도, 나는 이미 믿음 안에서 영원한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니, 영원한 나라를 소유한 사람처럼 내게 남아 있은 시간들을 믿음으로 담담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원을 소유하고 있는 자인 것처럼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과 같은 삶을 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야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내게 한시적으로 남은 생애 동안에 아쉬웠던 일 해야 하는 일인데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하기로 했습니다.
또 욥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셋째, 우리의 생사의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의 소유물은 맡기셨어도 그의 몸은 맡기셨어도 욥의 생명은 해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욥의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맡아 주관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아주 큰 확신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의사가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도 의학적인 수치가 2-3개월 밖에 못산다고 나와도 우리의 생사는 거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 선상의 삶으로 들어가 보니 삶과 죽음이 함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죽음은 마치 우리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손바닥 안쪽으로 이렇게 있으면 삶이고 손바닥을 뒤집으면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미 성령 안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 하늘 생명을 누리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 생명을 다하고 죽으면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존재라는 것을 깊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난은 제게 생사를 초월하는 신앙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비록 내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더라도 나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제 입에서 피 주머니가 생겼을 때 담당 의사는 여름휴가 중이었습니다.
저는 피 주머니가 터질까봐 음식도 잘 먹지 못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세끼의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영양을 보충해 주려고 두유에 생식을 타서 먹었습니다. 하루 네 끼의 식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약 한 달 반을 지나고 병원에 갔습니다.
네 끼의 고단백 식사를 해서 그런지 몸무게가 조금 늘어 있었습니다. 입안에 피 주머니도 사라지고 없어져 있었습니다. 피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선생님이 혈소판 수치가 거의 정상 수준인 12만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왜 갑자기 혈소판 수치가 이렇게 높아졌는지, 어떻게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한 순간에 제게서 걷혀버렸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사단이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생사를 초월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앞에 사단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사단이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두렵게 하려고 하지만 그런 사단의 미혹이 생사를 초월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깨달음은 제게 또 다른 이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넷째, 고난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당할 때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크면 클수록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이 그만큼 나를 인정해주고 계시구나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욥이 당한 시험은 우리의 보기에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런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시험은 마치 우리의 신앙이 어느 수준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초등학생 수준의 신앙을 가졌구나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중학교 수준의 신앙을 가졌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는 대학생 수준의 신앙을 가졌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 큰 고난을 당하도록 한 것은 욥의 믿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그 사랑하는 독자 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참빛교회를 개척하고 2년이 지날 때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수치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고 있던 것이 한 달에 갑자기 2만이나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바람을 쐴 수가 없었습니다. 설교 때 외에는 마스크를 쓰고 살았고 잠을 잘 때도 마스크를 쓰고 자야했습니다.
제가 새벽에 교회에 혼자 앉아서 교회의 장래를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아픔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이런 착잡한 마음으로 병원에 가기 위하여 지하철을 바꾸어 타려고 환승하여 승강장으로 올라갔다가 거기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바지, 단순한 티셔츠에, 끈이라고는 전혀 없는 배낭 하나를 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깔끔하고 꾸밈이 없어 보여서 그 사람이 누군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옆으로 가서 눈을 돌려 보았는데 그 사람의 얼굴은 근심 걱정에 찌들려 살아가고 있는 나와는 달리 세상 희로애락을 초월해 있는 듯 아주 청순한 얼굴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좌석에 앉아서 다시 그 모습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다시 오신다면 아마 저런 얼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다면 아마 그 얼굴이 저런 얼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다음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 날 병원에서는 혈소판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고 그 후 다시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 날 만난 그 사람은 이후에도 생생하게 제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저는 혼자 마음속으로 그날 내가 예수님이나 천사를 만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남모르는 고난 중에 계신 성도님들 계십니까?
어느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고민을 안고 계신 분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그 만큼 인정해 주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견고한 믿음 가지고 하나님 나라 대표자답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생사 문제에 너무 매이지 말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 믿음 이 확신 가지시고 그 어떤 고난이 우리 삶을 찾아올지라도 욥처럼 우리 모두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