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스퍼스가 말하는 기원전 6세기 전후 축의 시대에 왜 성인들이 많이 출현하였는가?
철기 유입이후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인 전쟁이 그 이유이다.약소국 복속을 위한 전쟁이 계속된다.인간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생각을 많이 한다, 공자, 장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의 출현이 그들이다.
전쟁 문제로 인류가 집단 사유를 시작한다, 철학이 출현한다, 인간의 본성, 세계의 운행, 인간과 세계의 관계, 윤리를 고민한다,
이원론 사상의 출현 ; 플라톤, 힌두교 사상
붓다와 장자가 비슷한 고민을 한다. 소크라테스를 기록한 플라톤, 크라틸루스 편에 보면 변화하는 세상이 진실일까 하는 논쟁을 한다, 만물은 변화하고 운동하고 있다. 변화로 인해 절대적인 지침이나 지식이 불가능이다, 변화하는 세계는 제대로 된 존재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정되어야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그래서 플라톤은 진짜 세계는 이데아, 가짜 세계는 현상계라는 형이상학을 정립힌다. 힌두교에서도 진짜 세계는 브라흐마라고 하고 가짜세계는 마야라고 한다, 이렇게 대부분의 철학은 2분법을 쓴다.
가치의 전도, 미증유의 철학 - 장자와 붓다
불교경전에 보면 마지막에 제자들이 "희유한 미중유(처음)의 법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미증유 즉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는 철학. 즉 2분법을 쓰지 않는 가르침을 말한다,
모든 것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 오온,색수상행식은 가유일 뿐이다. 제행은 무상이다. 늘 변화한다. 서양의 형이상학의 신은 변화의 근원이고 부동이다, 선악, 시비,미추 ,이분법을 탈피한다, 이 점에서 붓다와 장자가 회통한다,
(공덕녀와 흑암녀) - 선악, 미추는 동체
흑암녀, 공덕녀는 열반경에 나온다. 장자(돈많고 세력있는 사람)의 집에 공덕녀가 노크를 한다. 공덕녀는 "저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풍요를 주는 존재입니다." 장자는 공덕녀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이번에는 흑암녀가 노크를 한다. "저는 사람들에게 불행과 고통과 아픔을 주는 존재입니다. 저와 언니는 같이 다니는 존재입니다." 장자는 공덕녀와 흑암녀를 밖으로 내보낸다. 생과 사,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해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 이 두가지가 동전의 양면이다 밤과 낮은 인간이 붙인 이름이다. 사실 이 둘은 분리불가능한 하나이다. 인간의 개념화다. 결국 하나인 것을 나누어 생각하는 인간의 행위가 언어이다.
피시방생( 彼是方生 )과 연기( 緣起)
장자는 피시방생( 彼是方生 )을 말한다. 이쪽을 정해면 저쪽이 생긴다. 행복이라는 기준을 정하면 반대쪽인 불행이 생겨난다.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쪽을 정하면 저쪽이 생겨난다. 연기에서 말하는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는 사상과 같은 개념이다. 이분법을 걷어내는 철학을 장자와 붓다가 공유한다. 피시는 시비로 발전한다. 그런데 왜 장자는 피차( 彼此 )라는 말대신 피시( 彼是 )라고 했을까. 시는 이쪽이라는 뜻도 있지만 옳다는 뜻도 있다. 내쪽이 옳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피시, 인시(因是)라고 표현한다.
붓다는 이분법은 속세의 훈습된 습기라고 말한다.속세 습기는 알라야식에서 세가지로 저장된다.
자아종자( 自我 種子) - 나라는 의식
명인종자( 名言種子 ) - 이름 붙이는 것
유지종자( 維持種子) 유지하는 것
통틀어 중생지견이라 한다.
부처지견과 중생지견 vs 하늘의 눈과 성심( (成心)
- 나가 있다는 의식, 분별지는 중생이 지어낸 것
장자는 성심(成心) 즉 인간의 마음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장자는 시비를 끈질기게 따진다. 중생은 나라는 것이 옳음을 주장하며 성심을 짓는다.
중생지견이 부처지견을 가리고
성심이 하늘의 눈을 가리기에 문제이다.
법화경에 보면 세존의 출세는 일대사 인연이다. 출현한 목적은 불지견을 개시오입( 開示悟入)
개시오입(開示悟入)---<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임이 이 세상에 출현한 근본적인 목적 4가지를 제자인 사리불(舍利弗)에게 설명한 것이다. 즉, 중생이 진리를 열고, 보고, 깨닫고, 그 길에 들게 하는 일이다.
① 개(開)는 중생들에게 깨달은 내용을 여는 것을 말한다.
② 시(示)는 깨달은 바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모든 번뇌가 사라진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③ 오(悟)는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한다는 말이다.
④ 입(入)은 중생들로 하여금 진리의 본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부처지견(반야지)과 하늘의 눈(이명)
부처의 지견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고 진리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부처지견은 중생지견 해체 때의 청정한 본래의 마음이다. 중생지견을 해체하면 청정한 본래 마음이 된다. 본래청정심이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이쪽과 저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하늘에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하늘은 누구를 차별하여 비춰주는가.이쪽과 저쪽이라는 제한된 입장에서 벗어나서 조지우천(照之于天)하라고 한다. 하늘로부터 비추어보라는 뜻이다. 하늘의 눈으로 비추면 얻는 것이 이명(以明)이다. 밝음으로써 한다. 어둠은 어리석음이다.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것, 지혜로 본다는 것이다.
부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반야지다, 이명 (以明) 과 반야지 유사하다.
부처의 눈, 하늘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두두물물, 연화장 VS 허심
부처의 눈으로 보니 두두물물(頭頭物物 )즉 온 세상 만물이 부처다. 화엄의 연화장( 蓮華藏 )세계다. 장님이 광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밝은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밝다는 것이다.
장자는 성심을 해체하면 허심( 虛心 )이 된다라고 한다. 거울을 두 분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 거울은 다가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재단, 차별, 호오하지 않는다. 그것이 허심이다. 시비하지 않는 마음이 허심이다. 허심 도달시 드러나는 세계는 제물( 齊物 )의 세계다. 가지런할 제 물건 물. 있는 그대로 평등하게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온전한 것, 평등한 세계다.
제7식인 말나식 수행을 통해 평등성지로 전환한다. 나라는 것이 해체될 경우이다. 평등한 마음은 공부와 수행의 바로미터다. 생과 사, 행과 불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평등해지는가가 수행의 척도이다 공부가 깊을수록 마음은 평등해지고 편안해진다. 휴식처를 얻는다. 조주스님의 스승인 남전스님은 평상심이 도다. 자신의 마음이 평등한 마음에 가까울수록. 모든 것이 법성을 가지고 있음이다. 화엄의 연화장 세계와 제물의 세계는 모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눈이 열릴 때 오는 세계이다.
붓다는 깨닫고 나서 불법을 설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연꽃을 보고 생각을 바꾼다. 어떤 연꽃은 연못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고 어떤 연꽃은 밖으로 나와 있다. 즉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못 알아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법을 하겠다. 장자도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세상이 나를 괴이하다라고 할 것이다. 이 세상이 평등하다는 것은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 )이다. 부처의 눈으로 중생에게 내려 앉으면 중생의 삶이 고( 苦 )이다. 자신이 부처인줄 모르고 번뇌한다.
장자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한번 형체를 받고 태어나면 그것이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라는 의식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소유화기 위해 해치고 다투면서 말 달리듯 막을 수 없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종신토록 부림을 받다가 성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갈 바를 모르니 슬프지 아니한가
부처의 눈, 하늘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법성의 존재.중생의 눈으로 내려 앉으니 연민이 발생
인간세계는 고의 세계
인간세계는 팔고의 세계이다.
팔고는 생고(生苦)·노고(老苦)·병고(病苦)·사고(死苦)·애별리고(愛別離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
오온은 오음이라고 한다. 그림자라는 것이다.
고성제( 苦聖諦 )-고라고 느끼는 것에서부터 진리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무명에서 반야지로(밝은 세계로)
장자는 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고의 현실에 관한 장자의 표현은 붕새우화이다.어둡고 추운 북쪽의 바다에 사는 큰 물고기 곤. 이것은 우리의 무명의 업장이다. 번뇌하고 고통받고 있는 존재의 상징이다. 업은 우리 마음에 비친 그림자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업이 업인 채로 업이 아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업은 업이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던저져 있다.우리는 탄생, 성별, 부모 등 결정할 수 없다. 자신이 의지적으로 살았다고 착각한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출발부터 던져져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 표현한다. 경전에 따르면 알라야식의 업종자가 우리를 이렇게 던졌다고 한다. 알라야식은 속세에 지어 놓은 것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라야식 종자가 연을 만나 삶의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나면 업이 빠짐없이 알라야식 종자에 저장된다고 한다. 업과 과보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은 내가 지은 것이 돌아온 것이다. 태어나서 사는 것이 업이다. 업 자체는 중립이다. 선악없는 무부무기( 無覆無記 )이다.생긴 것은 죄가 없다. 업을 탓하고 원망할 때 그 업이 업장이 된다
* 무부무기 - 선도 악도 아니고 수행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 또는 그러한 마음 상태
무명의 물고기가 업장을 깨고 벗어나려는 노력이 붕이란 새로 변신하는 것이다.. 몸 아닌 마음의 변신 즉 성찰의 시작이다.마음은 거울과 같아 비추는 작용만 가능하다. 거울에는 팔식이 비친다. 마음에 비친 사과를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장자는 안시이처순 애락불능입야(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 즉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순리대로 처하면 슬픔이나 기쁨이 능히 끼어 들 틈이 없다)라고 한다. 거울에 비친 사과는 그대로 봐야 한다. '하는 생각'도 있고 '나는 생각'도 있다. '나는 생각'은 봐야 한다. '하는 생각'은 염( 念 )이라고 한다. '하는 생각'은 마음에 비친 걸 보고 생각을 내는 것이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마음에 비친 걸 볼 때 따라 다니지 말아야 한다. '나는 생각'을 봐야지 따라 다니면 안된다.성찰하며 마음에서 '나는 생각'을 바라 봐야 한다. 붕새는 성찰을 시작한다. 북쪽을 떠나 남명을 향해 비행을 시작한 붕새. 붕새가 업을 성찰하고 수행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북쪽은 빛도 없고 춥다, 무명이다. 밝음 즉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 남이다.깨달음을 위한 구도여행이다. 붕새비행은 반야지를 향한 구도여정을 표현한 것이다. 남명에 도착한 것을 장자는 무기, 무명, 무공으로 표현한다, 나라는 몸이 없고 나라는 이름도 없고 내가 한 공도 없다는 것이다. 붓다가 말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장자에서는 무아와 무상에 도달한 이후 남북이 해체가 된다.
- 장자의 혼돈: 남쪽과 북쪽의 임금이 혼돈에 은혜를 입었다.누구나 8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왜 구멍이 없는가, 고맙게 여긴 임금들이 혼돈의 얼굴에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다. 일곱번째 구멍을 뚫자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혼돈은 무분별의 이상적 상태인데 분별을 주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원래의 상태가 무분별인데 분별지로 죽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초적인 상태는 무분별이라는 것이다. 무기, 무명, 무공에 기초해서 무분별지가 된다.
무분별지의 세계 - 무기,무명, 무공을 넘어 무분별지의 세계( 분별을 하지 않으려는 그 분별 조차도 넘어선 상태)
붓다의 대열반 VS 장자의 영녕 ( 撄寧 )
공자는 60을 이순이라고 한다. 귀가 순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귀는 예민하다. 좋은 소리에는 가까이 가고 좋아한다. 역하고 듣기 싫은 소리에는 화를 낸다.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순이다. 공자가 무분별지를 얻은 것이다. 분별을 넘어선 분별하지 않는 지혜 무분별지다. 분별을 하지 않으려는 그 분별 조차도 넘어선 상태다. 분별하는 채로 분별하지 않은 상태가 무분별지다.
남북이 해체되어 무분별지를 행하는 경지를 장자는 영녕( 撄寧 )이라고 한다. 얽힐 영, 편안할 녕이다. 얽힌 채로 편안하다는 뜻이다. 세상을 벗어나서 편안한 것도 아니다.먼지 속에 있는 채로 편안한 상태다. 노자의 표현으로는 화광동진이다. 빛을 만나면 빛이 되고 먼지를 만나면 먼지가 된다.
중생은 이 세계는 영원히 변치 않고 즐겁고 나는 진실하고 깨끗하다는 '상락아정' 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 상락아정이라 생각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꿈같은 '전도몽상'이라고 한다. 붓다는 열반경에는 무아, 무상의 수행을 했으나 잘못 수행 것이다라고 한다. 너희들이 전도되었구나. 부정에 부정을 거듭해버렸다. 상락아정에 도달해야 대열반이다.
송나라의 청원선사는 휴식처라는 말을 했다. 청원선사가 법문을 하기를
1. "선지식을 만나기 전에는 산은 산, 물은 물인 줄 알았다. - 견문각지에 의한 분별의 눈
2. 그런데 선지식을 만나 30년 수행을 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 아니더라. - 공성을 자각한 눈
3. 30년 수행을 해 휴식처를 얻고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 무분별의 지혜의 눈
해석을 하자면 무아와 무상을 하니 공이다. 그 공을 다시 공하니 대긍정의 묘유( 妙有 )가 열린다. 결국 상락아정이 되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기에 행복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편안하고 편안하지 않음이 중요하지 않다. 편안함과 그렇지 않음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다.(편안하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는 마음. )
반야지를 얻기 위한 방편은 장자보다 붓다가 더 친절하다. 장자는 큰 그림만 그렸다면 붓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게 대기설법을 했다. 팔만사천법문을 했다. 자상하고 자유롭게 설문하였다.
반야지를 얻기 위한 방편설
연기법을 인간 실종에 대입 분석한 '12연기설'
고집멸도의 사성제설
공사상
유식사상
연기법의 핵심은 인과 연,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만물은 일어난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원인과 조건이 해소되면 없어진다.그래서 일체가 가유라고 말한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인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 공성은 가명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중도다. 중도는 올바른 정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우리 눈앞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허공꽃 같은 것이다. 다 지나간다. 구름을 붙잡고 너의 번뇌를 키우지 마라 이것이 정견의 의미이다. 나가르주나는 공사상을 정립하고 윤회의 문제 등 유식사상이 .
그런데12연기 등 일체언설로 표현된 방편술이다. 모든 언어는 방편이다. 언어로 표현된 것은 방편이다. 여기에 집착하면 안된다. 처방으로 쓸뿐 어떤 말에도 달라붙거나 집착하지 마라
결론
장자의 이명, 영녕과 붓다의 반야지, 대열반.
장자와 붓다의 긍극적인 지향점과 문제의식이 유사하다. 그 구도여정이 상당히 흡사하고 회통한다.장자와 불교 서로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수행법 - 장자의 좌망(무분별지)과 심재(무아) VS 붓다의 팔정도
Q. 붓다는 반야, 지혜, 영반을 깨기 위해 팔정도로 수행하는데 장자의 수행방법론은 무엇인가
A. 장자는 좌망과 심재를 말한다. 좌망은 앉은 자리에서 잊어버린다는 의미이고 심재는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의미이다. 공자와 안회의 우화를 통해 좌망을 설명한다. 안회;스승님 제가 공부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공자: 물 얻었느냐? 안회: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공자:아직 안 됐구나 안회: 또 진전이 있었습니다. 예를 잊었습니다. 공자:아직 아니다. 안회 진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좌망을 했습니다. 공자: 그래? 어디 한 마디 해 보렴.
잊었다는 것은 자기가 지은 성심이다.인의예지를 잊었다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가치관, 이분법적 틀을 잊었다는 의미다. 안회:제가 심재했습니다. 마음을 재하기 전에는 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마음을 재하고 나니까 내가 없었습니다.마음을 가다듬는 심재는 무아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좌망>
좌망[ 坐忘 ]
(1) 고요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현실세계를 잊어 절대 무차별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 가만히 앉은 채 마음을 평온하게 가져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것.
(2) 장자(莊子)가 주장한 수양법인 심재좌망(心齋坐忘)의 준말. 심재는 마음의 모든 추악한 면을 버리고 허(虛)의 상태에서 도(道)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좌망은 마음이 육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세속적인 지(知)에서 벗어나 대도와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사려(思慮)를 떠나 무(無)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양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좌망 [坐忘] (원불교대사전)
<심재, 心齋 >
심재는 정신을 청정(淸靜)하게 가다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장자에 있어서 도를 깨닫는 하나의 방법을 이른다. 이것은 <장자>의 인간세(人間世) 편에 나오며 공자와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의 대화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공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전심일지(專心一志)하여 귀로써 듣지 말고 심(心)으로써 듣고, 심으로써 듣지 말고 기(氣)로써 들으라. 귀는 듣는 데서 그치고 심은 부합(符合)하는 데서 그치라. 기라는 것은 허(虛)하되 어떤 사물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도(道)만이 허(虛)를 모여들게 한다. 허하게 되는 것이 곧 심재(心齋)이다.······"
여기서 보듯이 심재란 감관을 청소하고 심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궁극적으로 허의 세계를 이룰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허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히 나와 대상과의 간격이 없어지는 물아량망(物我兩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가 실현된다고 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재 [心齋]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강동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