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부이사장님 아니 존경스런 시인님께
불초 소생에게 좋은 시를 감상하라고 보내신 뜻밖의 사실도 놀랍지만, 그 보다도 충격과 감동에 사로잡혔던바 그 소회를 몇 줄 적어 올리려니 혹여 주제넘은 결례가 있더라도(문학평론가가 아니고 내 나름의 감상결과(작가를 떠나면 평가는 독자의 몫이니)의 독후감쯤으로 이해하시며 용서하시기 바랍니다.(서정남)
❒ 마음을 열면서- <물 詩. 1-탄생의 물>을 읽고
1. 우선 주제가 “물 詩. 1” 에 그것도 “탄생의 물”이란 부제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은 “진리”를 상징하는데, 그 “진리의 탄생”에 대한 시적 旅程 이 連作(大作)으로 설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長程의 출발이 “어둠의 여로”라는 隱喩, 그리고 그 “진통”이 “어머니의 자 궁”으로부터의 탈출한다는 상징과 그 상징성은 이미 초월적인 세계인 “ 생명 의 신비”라는 우주질서의 범주에 속하는 형이상학을 넘은, 이른바 영적 spiritual 천적 celestial 차원(degree)에 이어져 있는 점에서 도저히 그냥 지 나칠 수 없는 세계로 나를 끌고 갔습니다. 그것이 곧 “옹달샘”이고 “바람소 리”이고 “칠흑 혼돈” 과 “용암의 분노”와 “만유의 섭리를 깨우친 작은 몸짓” 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명의 여로”와 “환희의 신비”로 귀착하는 짧지만 웅장 한 시적구조를 보면서 그 치열하고 견고한 영적 천적 예술성까지 확보하고 있 다는 사실에 소스라치도록 놀랐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이른바, 형이상시를 넘어 이제는 “영성”의 창출 없는 시가 더 이상 고답적이 거나 상투적인 추상 관념의 애매모호한 언어유희에 안주할 수 없는 양 하여 소위 Hypertext 詩論의 주창하는 작금의 추이를 보면서, 과연 “영성”이란 무 엇이며 어떻게 그 실체를 인식하고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로서, E. Swedenborg 의 상응론 correspondence에 비 추어 김 시인의 시세계를 감상해보기로 합니다.
1) “물” 또는 “옹달샘”은 진리 Divine truth 또는 자연적인 사람 가운데 있 는 진리를 상징함. (AR 50) 그러므로 시인이란 자연적인 사람의 내면 에서 진리의 각성이 시작됨을 상징하는 시상이 싹트고 그 시상을 시로 승화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세상만물(현상세계에 대한 지각을 통해 인식하 고 이해하는 지혜가 발현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음. 그런데
2) 그 출발점은 “어둠의 먼 여로”로 비유됨. 어둠의 실체가 무엇인가? 태양 의 “볕”과 “빛”이 없거나 스러진 상황이 바로 어둠인데 태양의 볕과 빛은 자연계 만물의 생명의 에너지원으로서 환언하면 “생명력”인 바, 상응론 에서는 “볕”은 “사랑” 또는 “선”을 상징하고 상응하며 “빛”은 “진리”를 상징하고 상징하는 바, “선”과 “진리”는 하나로 결합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속성(본질)으로 하여 “선”을 떠난 “진리”와 “진리”에서 분리된 “선” 은 그 생명력을 상실한다. 그러니까 “진리” 아닌 “선”이 존재 할 수 없 고, “선” 아닌 “진리”가 존재할 수 없다. (볕과 빛이 결합한 태양처럼)
“어둠의 여로”는 햇볕과 햇빛이 없는 상태에서 길을 가는 상태 즉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이성실종의 시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 인지를 분별하기 못 하는 세상-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인식 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현실에서 지혜를 깨닫는 자 만이 환희 곧 참다 운 즐거움을 만난다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 나 오는 신비”에 비유한 것이 라고 봄.
3) “자궁womb”은 어린 아이를 탄생시키는 요람으로서 “천적인 사랑”의 ‘선’ 에서 발원 발출하는 탄생 곧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 랑”의 가장 깊은 곳 즉 “極 內的인 선”을 뜻한다. “생명의 신비”는 불가 사의한 비밀로 즉 하늘의 숨겨진 비밀 heavenly secret로서, 신학자도 철학자나 기독교신자도 아닌(?) 시인의 시적 영감이 이 처럼 고차원의 천 계에까지 이르렀고 그 비밀을 탐색하고자 하는 시인의 번뜩이는 시적 안 테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음. 그러한 열정에 의해 마침내 만난 곳이 “산 속 옹달샘”이요. “세상 바람소리”로 추론됨. 옹달샘과 물의 상징성은 상술 한 바와 같고,
4) “바람소리”의 “바람” 은 “영 spirit 또는 그 영을 지향한 삶”을 상징하는 바,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인데 “바람”의 부정적인 의미는 상술한 바람의 상태가 교란된 세상풍파를 상징하기에 족하다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 아가는 현실인식 즉 인간에 대한
5) 실존적 인식은 “지하 칠흑의 혼돈”이거나 “용암의 분노”에서 “만유의 섭 리를 깨우친 작은 몸짓”이요 혼신의 싸움(돌파구 없는 생존경쟁)으로 등 가화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칠흑’은 어둠의 극한적인 상태에 다름 아니고 ‘혼돈’은 전술한 바와 같이 선악이 뒤엉키고 정의와 불의가 혼재하 는 뒤죽박죽된 상태와 그런 상황에서의 식별능력상실 =이성의 실종 =인 간성 상실=비인간화의 카오스 상태를 상징하며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 해서 요청되는 에너지를 화산이 폭발하여 넘쳐흐르는 용암에 비유한 것이 라 본다. 분노는 부정적인 심정의 공격 기제를 뜻하는 바, 이 분노의 감정 을 억압하면 혈류속의 악성종양과 같아서 치료하지 않으면 악성종양이 된 다는 사실이 환기되고 연상됨. 즉 온갖 거짓과 악의 탐욕으로 인한 갈등 과 선과 진리에의 희원이 상충하는 갈등 현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만유 의 섭리를 깨우침으로써 극복하려는 몸짓은 상대적으로 초라한(작은) 고 독경지의 심정상태를 표출한 것으로 보임. 기실 저는 국제적으로나 국내 적으로나 조선조말. 1910) 국권침탈의 국치를 보면서 鬼國狂人-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를 외치면서 음독순국하신 우국지사 梅泉 黃炫 선생의 절명시를 기회가 되면 떠올리면서 難作人間 識者人 “글 아는 사람 세상 살아가기가 어렵기도 하다”를 음미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지요.
6) 이처럼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선지향의 치열한 삶을 추구하며 겪는 생존을 수단을 다름 아닌 “만유의 섭리”를 젖먹이 어린 것의 입술로 치환 대응하 는 에분감恚憤感의 표출은 참으로 눈물겨웠음. “오물오물 젖먹이 부드러운 입술”이 암유暗喩하는 이미저리가 감각적-시각적 청각적으로 절묘하게 들 어나 실체인식을 체득케 함으로써 객관적 상관물과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 을 여지없이 인식시킴과 아울러 진일보하여 영계 spiritual world와 천계 celestial world에 까지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고양시켜 준 기초를 나는 correspodence의 해석 즉 E. Swedenborg가 27년간이나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며 견문 체득한 기록문서(수십만 항목의 성문서)의 내용에 접근하 고 있는 사실(아마도 시적 영감에 의한 것이라 생각됨)에서 거듭 충격을 받고 있음. (어쩌면 나와 비슷한 우국충정이거나 선지향의 삶에의 갈증?)
7) “입술”에 상응하는 비의秘義를 살펴보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상징하 고 있음(AC 4791) 그리고 영계에서는 사람의 언어가 이원적이 아니고 단 원적이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사상이 외적이고 또 내적인고로 그 언어 가 이원적이며 그 때문에 내적 사상에서 분리된 외적 사상을 근원으로 해 서 얘기 할 수 있고 따라서 속과 겉이 다른 언어로 숨김과 아첨과 위선이 가능하지만, 육체와 분리된 영계에서는 뜻한 바를 말할 수밖에 없으므로 거짓과 위선이 있을 수 없음(TCR 111 영계에서의 체험). 그런데 “젖먹 이”에게 부드러움 젖을 먹이는 행위는 천부적으로 선과 진리로 교육되는 순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젖먹이는 거짓을 모른다(AC 2015-3, 3183. 사 60:16) . 생각해보시라.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거짓과 악에 있 음을! 그리고 그 거짓과 악으로 인하여 세상이 지옥이 되고 살 아가기가 힘 든다는 사실을 ! 그런데 이처럼 혼돈과 칠흑의 어둠으로 몰 아치는 바람소리를 붙잡고 젖먹이의 부드러운 입술로(순수성) “또 다른 생명의 잉태를 위해” “광명의 먼 여로”를 설정하고 그를 수단으로 하여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희원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사실 바람(공 기) 중에도 미세한 볕(사랑=열)이 있음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 에서도 밝히고 있으며, 이는 태초의 인간창조에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 다는 상징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8) “잉태”는 “합리적인 사람의 삶, 또는 합리적인 진리 Rational man, Rational truth"(AC 1961. 창 16: 11-12)를 상징하는 바,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샘솟는 합리적인 생각과 현실인식으로 출발하다보니 이번에 는 처음처럼 “어둠의 먼 여로”가 아니라 “광명의 먼 여로”로 전환된 “신천지”가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세계는 이러한 역정을 참 기쁨으로 맞이하는 자만이 그 신비한 깨달음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진술로 찬란한 詩 한편의 축성을 완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 생각을 마치면서.
폐일언하고, 충격과 감동은 큰데 시간에 쫓겨 분출하는 소감을 다듬을 사이 도 없이 여과 없이 털어 놓았습니다. 천지창조의 우주질서에 연결되는 흔치 않은 詩作을 보면서 치열하면서도 통합되고 조화로운 예술성을 짧고도 강 열하게 갈무리를 하셨을까 거듭 놀랐습니다.
그저 평범한 시인으로 알 고 있었 기에 그렇죠. 그런데 다른 일에 쫓겨 겨를 없는 사이에 다시 <물의 詩. 7. 어머 니의 물>을 이어서 상재한 것을 보면서(쓸 것이 많은 참 좋은 시인데), 이제 더 엄청난 주제 의 시 = 가히 우주적인 주제에 접근하고 있음에 또 충격을 받습니 다. 솔직히 몇날 며칠 같이 앉아 그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한 담론을 펼치고 싶 은 충동을 받습니다. 시간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 눈물겹습니다.
기실 2010년 이집트 여행 중 졸저 ⌜천상의 언어/ 지상의 언어⌟를 문협출판 부에서 발간하여 김연균 이사장 주제로 출판기념회까지 열러주는 행운을 만났 지만, 외견상 의례일 뿐, 아직도 저의 시는 “떠도는 언어”로서 주인을 못 만나 고 있는 암울한 sphere에 갇혀 있는 형국입니다.
그 문집에서 일종의 모험적 인 실험을 해봤던 거죠. 단순한 종교적 아지프로 agitprop 쯤으로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바로 보드레르 보다 2세기 전에 소위 조응이론을 시론에 접목했던 사실을 환기시키고, 이른바 종교 또는 신앙시를 표방하는 무 수한 시편들이 금과옥조로 사용하는 “영적” 또는 “영성”의 실체 인식과 어떻게 자연계내의 유한한 인간이 저 드높은 천국과 지옥의 현상을 객관적 상관물이나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로 그리고 거기서 진일보하여 그 초월적인 세계를 자연계 의 현상을 인식하듯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영적갈급을 충족케 하는 詩作이 가능한 길을 열 수 있을까에 천착한지 수십 년을 지나온 터이지만, 천동설만을 신봉하던 중세 암흑시대에 코페르니쿠수의 전환을 주창 해본들 뜻 없이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되고 마는 현실의 외로움이, 갑자기 “물 의 시”(아마도 연작시가 될 것으로 짐작됨)를 접하면서 이심전심의 詩的 소통 을 지각 perception하게 된 반응의 표출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 이와 비슷 한 현상에 대한 글을 쓰는 중이어서 시간이 없지만 결례가 도지 않는다면 처음 부터 다시 제대로 정연한 논리로 소회를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을 접어둔 채로 여기서 마칩니다. 거듭 좋은 시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질없는 사설이 번거롭게 했다면 그 또한 열렬한 펜으로부터 받은 소회로 보아주시고, 건승건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뜻하는 바도 꼭 이루게 되시 기를 기원합니다.
2014. 11. 25. 서정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