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죽다
언양읍내의 울산자연과학고등학교 후문, 후문이라 하기에는 손가락만한 작은 쇠살로 엮어져 한사람씩 지날 수 있는 쪽문이 있고요 그 옆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 시멘트 독도 다 빠져나가서 푸른 이끼로 옷을 입힌 담장에 빗대어 세 그루 살구나무가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나무는 몇 해 전 가을 앞에서 거대한 *매미가 지는 여름을 설워하며 발악하고 날아갈 때 그놈의 날개 짖을 이기지 못해 담장에 쓰러져 기대어 아랫도리를 반쯤 걷어 올리고 누었는데, 이끼마저 푸르게 입고 있는 늙은 담장이 안아주어서 헐떡이며 가쁜 숨을 쉬는데 다음날 증손자뻘 되는 그 학교 학생들이 일으켜 세워주고 걷어 올려진 아랫도리도 도톰하게 흙을 올려서 꼭꼭 눌러 상처를 쌓아주었는데요.
다음해 봄 두 그루는 화려하게 꽃 달았다 지더니 실하게 잎사귀 돋우며 콩알만 한 파아란 살구를 달고 있는데 그 나무는 꾀 한참 기간이 지난 후 옆의 실한 살구나무 잎 보다 작은 이파리를 내기만 했어요 그 추운 겨울 다보내고도 말입니다.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동상이라도 걸렸었나 보내요 그래 늦게 라도 잎사귀를 내었으니 다행이지요.
그런데 살구꽃도 지고 목련도 지고는 담장의 넝쿨장미가 꽃망울을 올리는 어느 날 여름을 코앞에 둔 그 화창한 봄날 쪽문 근처를 지나려는데 그 살구나무가 까르르거리며 몸서리치듯 웃어 재끼고 잎사귀들을 툴툴 털어내고 있어요
다른 것들은 바람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서 살랑이는데 그 나무만 몸통부터 부르르 떨며 가지 끝까지 털어대는 거예요 다가가 그 떨림을 느끼며 보니 나무 밑둥치에서부터 검은 실이 눌러 붙은 듯 위쪽으로 뻗어있는데 그 끝은 나무의 기둥이 둘로 갈라진 사이 옛날에는 중심이었던 기둥이 잘리어 옹이가 되고 그 옹이가 세월 속에 썩어서 움푹 팬 구멍이 된 곳으로 들어가 있는 거예요,
더 가까이 가서 보니 검은 실은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이며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끓어졌다하는 겁니다, 그 옹이가 삭아진 속에서는 지난겨울 동상에 걸려 썩은 살을 쏘다놓는 것 같았고요 그 나무에게 툭툭 두드리며 물으니 안에서 공공하고 비어진 소리를 냅니다 이번에는 큰 힘이 가해져 쿵하고 찍어대니 토악질되던 썩은 살이 뿌옇게 먼지를 공중으로 날리며 옹이 속으로 푹 꺼지는 겁니다.
잠시 후 이게 웬일입니까? 한 줄로 꾸물대던 검은 줄은 그 진동으로 몇 가닥은 땅위로 떨어지고 나머지는 나무에 뿌린 물감이 붙은 듯 납작 매달려 있습니다 진동이 멈추자 나무등줄기에 검은 물감은 다시 부산스럽게 흔들리듯 움직이는데 거반 옹이 속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입니다
이때 이었습니다, 무너져 내려 움푹 팬 그 구멍 속에서 엉클어진 실몽당이처럼 검은 물체가 꾸역꾸역 넘쳐 나오며 살구나무를 검게 칠하듯 내리는 것 이었습니다 나무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시 정갈한 검은 줄이 되더니 뒤이어 희고 도톰한 참깨 알갱이 같은 것이 줄에 달려서 내려옵니다 기겁을 한 살구나무는 까무러쳐 부들부들 떨면서 속이 비워지고 있고요 간혹 키들키들 웃는 듯 가지에 떨림이 오고 피었던 몇 잎사귀도 물 내림 하듯 땅 아래로 내리고 있었습니다 옆의 두 그루는 이미 밤톨만한 살구를 달고 행복해하는데
*매미 : 태풍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