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4:1~12 주변문제들(비본질적인 문제들)
14장에서는 본질적인 문제 곧 중심문제가 아닌 주변문제, 곧 아디아포라가 나오는데,
예를 들어 주초문제라던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음식이나 절기 문제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나, 사람마다 달라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이며, 서로 양보하거나 포용해주어야 하는 문제임과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술을 입에도 대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친구들이 한 잔만 해, 그런데 그 한 잔이 마지막 잔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도박이 그러한데, 옛날에 일을 하는데, 눈이 부엉이가 돼서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눈에서 빛이 나왔다. 도박중독이 제일 쎈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특정 게임이 그러한데, 몇 시간이 아니라 수십시간 심지어 수십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식이 그러하고,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각자 자기 마음으로 확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다 시험해볼 필요는 없는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안하는 것이 좋지만, 사람이 그러한가. 이런 문제들은 복병같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이러한 주변 문제들이 같이 꼬여 있다. 이는 마치 신체 기능과도 비슷한데, 어떤 사람들은 특정 색깔을 보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염색을 하면, 얼굴이 붓는다. 또 어떤 사람은 옷닭을 먹지 못한다. 이런 것은 일괄적으로 딱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각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이러한 예를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우상제물 문제와 절기 문제이다. 우상제물은 우상제사에서 나온 제물을 먹는 것인데,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제물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은 아무 상관없다. 감사함으로 먹는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 너무 양심에 걸리고 꺼림직하다. 그것을 안먹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이런 경우는 감사함으로 먹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나를 우상숭배에서 건져주셨는데, 감사해서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자도 감사함으로 먹고,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먹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절기 문제도 그러한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켜야 하는가. 주일로 지켜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두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고린도교회도 그러했고, 로마 교회도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도 교회마다 이런 저런 본질적이지 않은 주변적인 문제로 싸우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예를 들어 돼지고기라던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동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나 우상숭배에서 나온 사람은 그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 매우 양심에 꺼리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 강한 사람이 우상제물도 어짜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제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냥 먹어. 왜 답답하게 안 먹느냐 비판할 수 있는데, 유대 그리스도인도 율법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자유가 있지만 먹지 않겠다 안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유대 그리스도인은 나는 이제 그런 것이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먹겠다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행15장에서 이것을 멀리하자고 결의하였는데,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것이 구원에 있어서 중심문제가 될 수 없다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바울은 성도마다 내가 먹지 않는 이유 먹는 이유가 있으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한다고 하지 않는다고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비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반면에 먹지 않는 자도 먹는 자를 비판할 수 있는데, 성도라는 사람이 우상에게 바친 우상제물을 왜 먹느냐 당신은 방종하는 그리스도인 또는 육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비판한다던지, 유대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에서 금한 돼지고기를 유대인인 당신이 왜 먹느냐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이 보니까, 먹는 그리스도인이나 안 먹는 그리스도인이나 둘 다 그리스도인인데, 서로 포용하고 그런 본질적이지 않고 주변적인 문제는 서로 포용하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하라고 하였다.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비본질적 문제, 곧 주변 문제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그의 주인과 그 사람의 관계로 그 사람 주관적인 문제에 끼어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우상제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우상제물이 매우 양심에 찔리는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주인은 같다. 그 사람을 세운 사람은 하나님인데, 왜 니가 비판하느냐. 교부 그레고리우스는 사탄이 투계장 주인처럼 둘 중에 죽는 닭을 잡아먹으려고 싸움을 붙이듯이 성도끼리 싸우게 한다고 하였다.
5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또한 절기도 그러한데, 원래 주일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자연스럽게 생긴 날이다. 원래는 7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첫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둘 다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이제 새 날 주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새벽예배를 비롯하여 온갖 예배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람마다 생각보다 마음으로 확정해야 한다.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토요일 쉬셨으니, 토요일을 안식일로 잡겠다. 6일 일하고 7일째 안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첫날 주일이 우리에게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신 날로 참 안식을 주셨으니 첫날을 안식일로 잡겠다는 것이 기독교의 대표적인 안식일날이 되었는데, 부활과 죄사함을 감사하며 평강 곧 평화를 누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죄와 사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아래 심판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런데 둘 다 주를 위하여 지킬 수도 있다. 그런데 먹는 것도 그렇다. 주를 위하여 먹을 수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너무 이런 것에 병적으로 민감한 것은 평강을 해칠 수 있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한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성도의 정체성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핏값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죄의 대속물이 되셨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율법의 정죄함이 없다. 또한 그에 이어서 죄로 말미암는 죽음의 권세로부터 오는 두려움에서도 해방되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죽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값을 다 청산하시고,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 죄가 있으면 죽음이 두렵다. 죽음 뒤에 죄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원죄 자범죄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로 말미암는 율법의 정죄를 다 받으셨기 때문에, 성도는 죽음은 이제 심판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관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런 비본질적인 주변 문제들에 대한 비판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백함으로 서로 직고함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이다. 이것은 지옥심판이 아니라, 상급심판으로 보이는 것은 형제끼리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굉장히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활의 활력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술을 입에 대기만 해도 알콜중독자였기 때문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금주를 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또 너무 느슨하게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중독문제는 늘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듭난 후에도 옛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것은 서로 비판하지 말고, 다만 각각 서로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했는데, 게임중독에서 나오고 어떤 사람들을 보면, 이것을 활용하는데, 나도 활용해보자, 그러나 절제가 안되므로, 나는 하면 안되겠다 마음에 확정이 생겼다. 그때 깨달은 것은 중독은 평생조심해야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판관은 내가 아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먹고 먹지 않는 믿음을 자기 마음으로 확정해야 한다. 불씨는 의견 차가 아니라 이 의견의 차를 잘못 다룬 데 있다. -매튜 헨리- 바울의 결론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자를 포용해야 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가 자식을 포용하는 것과 같은데, 또한 이런 문제들은 사람마다 강하고 약한 부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주장을 하기보다는 원칙대로 너그럽게 기다려주고 포용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