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
2025년 03월 15일(토요일)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4년, 즉 1414년에 쌓기 시작해 세종 3년인 1421년에 완공된 성입니다.
이성은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고, 당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미읍성은 성종 22년인 1491년에 석성으로 완공되었고, 둘레는 약 1.8km, 높이는 5m에 달합니다.
성의 구조는 동, 남, 서의 세 문루로 이어졌습니다.
사적 제116호.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입니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습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습니다.
해미읍성의 동문 잠양루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의 동문. 해미읍성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습니다.
성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이며 옹성이 없습니다. 잠양루는 화재로 등으로 1926년에 소실되었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잠양루(岑陽樓) 편액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
해미(海美)는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친 지명으로,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에 걸쳐 축조,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에서 옮겨왔습니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의 정문. 해미읍성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습니다. 진남문은 선단석(扇單石) 위에 홍예석(虹霓石)을 무지개 모양으로 올린 홍예문(虹霓門)이며 옹성이 없습니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세 관아문 중 유일하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진남문(鎭南門) 편액
중수비
박공민환무공위덕비(좌), 좌영루첩중수비(우)
좌측 비석은 '현감겸좌영장박공민환무공성덕비(縣監兼營將朴公民煥茂功盛德碑)' 입니다.
1874년 해미현감 겸영장으로 부임한 박민환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박민환은 부임 당시 훼손된 읍성을 중수하기 위해 상급관청에 목재를 요청하고 돈을 빌려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이수(머릿돌)의 전면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습니다.
뒷면에는 조성연대(1849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측 '좌영루청중수비(左營樓堞重修碑)'는 1849년에 새운 비석으로 해미읍성의 중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비석은 헌종(憲宗) 15년(1849)에 건립된 '좌영루첩중수비(左營樓堞重修碑)'인데, 비문에 의하면 당시 성첩(城堞)이 붕괴되고 문루가 다 허물어졌기에 밀양 박민환(朴民煥)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848년 동문, 서문, 남문을 차례로 준공하였고, 백성과 관리가 단결하여 공사 중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1916년 소실되었던 서문 정분문(靜氛門)과 1926년에 붕괴되었던 동문 규양문(葵陽門), 그리고 현재의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이때 개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진남루 안쪽
진남문 안쪽 받침돌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라 새겨져 있습니다. 황명 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이고 1491년(성종 22)에 진남문이 중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병영시설답게 옛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검차
천주교도들을 매달아 고문하던 회화나무
회화나무(호야나무)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로 수령 300년 이상 추정되는 회화나무의 모습입니다.
1866년(고종3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고문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1,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의 목숨을 앗아간 얄굿은 운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직접 해미읍성을 찾아 순교자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만큼 천주교 신자들에게 의미가 깊은 천주교 성지 순례 코스입니다.
방문(榜文)
옥사 담 밖에 해미현감 영으로 수배범 방이 붙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부녀자 폭행 및 재물약탈자이고, 아래는 전 서리로 공금횡령 및 환곡은닉탈루자로 신체적 특징을 적어 놓았습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범죄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옥사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한 해미읍성 '옥사'의 모습입니다.
1790년대 정조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와 1868년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집니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잠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고 전합니다.
옥사내부
20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와 호서좌영
호서좌영 (湖西左營)
동헌으로 들어가는 해미읍성 외삼문은 2층 문루 형식으로 아래층 3칸, 위층에는 정면 3층, 측면 2칸의 누각이 있습니다. 원래 읍해루(揖海樓)라 하였으나 1970년대에 복원한 후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편액을 달았습니다.
호소좌영 (湖西左營) 편액
호소좌영 안쪽
동헌(東軒)
동헌(東軒)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입니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습니다
동헌(東軒) 편액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1579년(선조 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내아
내아(內衙)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官舍)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내아는 살림집입니다. 해미읍성 내아는 고증과 발굴조사를 통해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청허정으로 오르는 108계단
청허정
해미읍성의 청허정은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가진 정자입니다.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당부하는 의미를 가졌으며, 조선시대 병마절도사 조숙기(1434~1509)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건물입니다.
정허정(淸虛亭) 편액
490cm 높이의 성벽을 안쪽은 흙으로 비스듬히 쌓았습니다.
북문
북문(암문)
북문은 암문으로 문 위에 누각이 없습니다.
문루를 세우지 않은 비밀의 문으로, 주로 외부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로 쓰였겠지만 형세가 어려울 때는 도주로도 쓰였을 것 같습니다.
해미읍성의 북문으로 암문(暗門) 형태로 되어있고 앞에는 해자(垓字)도 보입니다.
소나무숲
청허정 뒷 쪽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충남도 100대 소나무숲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국궁체험장
지성정(枳城亭) 편액
탱자나무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습니다. 흔히 '탱자 성' 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합니다.
해미읍성의 지성루(서문) 안쪽
치성
치성(雉城)
천주교도들의 순교기념비
민속가옥
잠영루(동문) 안쪽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 안쪽
남문과 서문 사이에 2개의 치성(雉城)이 있습니다.
치성
해미읍성 서문 앞에는 순교 자리개돌이 있습니다. 원래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길이 4.2m, 두께 0.3m의 돌다리이었는데, 병인박해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행했던 사형도구입니다.
진품은 해미순교성지에 보존하고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품입니다.
해미읍성의 서문(지성루)
성 주위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 많은 탱자나무를 심었다 하여 해미읍성을 '탱자성'이라고도 합니다.
저성루(枳城樓)는 '탱자나무 지' 자입니다.
1916년에 붕괴되었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지성루(枳城樓) 편액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鎭南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