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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K. 비일의 성전 신학]
비일은 요한의 두 증인에 대한 환상(계 11:3-6)이 스가랴 4:·14과 연관되어 있음을 분석하였다. 요한은 스가랴서를 창조적으로 응용함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의미를 깨뜨리지 않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이미지는 스가랴 4장의 성전 재건 환상에 비추어 볼 때,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증인,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왕을 떠올릴 수 있으며, 종말론적으로 참된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제사장과 왕을 겸하는 교회 공동체의 이중적인 역할을 표상한다고 말한다. 스가랴 4장의 왕,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두 사람에 의해 수행하는데, 스가랴 6장은 한 사람의 메시아적 인물에 합쳐지고 이 메시아에 의해 진정한 성전 건축을 완수할 것을 예고한다. 비일은 촛대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표상하고, 촛대로부터 나오는 빛은 이스라엘이 세상에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신실한 증언의 촛대가 되는 일에 열심을 내고(계 2:5),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생명나무”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실 것(계 2:7)이라고 한다. 비일의 탁월한 분석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요한계시록 11:3-6은 1-2절의 "성소 측량"의 주된 목적을 설명한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의 공동체 한가운데에 자신의 임재를 확립하시는 일은 성도들의 예언적인 증언의 유효성을 보증하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뜻이다. 두 증인이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으면서" 지상의 왕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정에서도 증인 역할에 소홀함이 없다는 사실은 증언이 가지는 법적 성격을 강화시킨다(3-4절). 주님은 지상의 전지하신 심판관이시다. 왜냐하면 그의 "눈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슥 4:10, 14; 계 5:6). 증인들이 주와 가까이 있다는 표현 역시 그들이 주와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동시에 그분의 명령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짐을 강조한다(참조. Kraft 1974: 157).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들이 주의 주권적인 임재로부터 결코 멀어지거나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그들을 하나님과의 안전한 관계로부터 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비록 예언적인 증인들이 위험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참조. Prigent 1981: 156-167). 이런 개념은 더 큰 개념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주 앞에 서 있다"라는 개념은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영원토록 안전한 관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주 앞에" 서 있다고 묘사하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무수한 텍스트가 바로 이런 용례다(출 27:21; 30:8; 레 24:3). 요한계시록 11:4b는 스가랴 4:14(이에 대해서는 아래 설명을 보라)와 함께 레위기 24:4을 언급하는 듯하다. 이 레위기 텍스트에 따르면 "순결한 등잔대는 항상 여호와 앞에 [있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와 동일시된다. "촛대"(역자 주–등잔대)는 교회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교회야말로 요한계시록 1-2장이 반복해서 진술하는 "촛대들"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의 범위 내에서 서로 다른 두 개념에 대해 동일한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의 결핍이라 할 수 있다"(Kiddle 1940: 181).
성막과 성전의 촛대는 하나님 면전에 있었으며, 그로부터 생겨난 빛은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표상했다. 마찬가지로 스가랴 4:2-5에 있는 촛대의 등잔불은, 4:6에서 이스라엘(="촛대")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줄 하나님의 임재나 영을 표상한다고 해석된다(참조. 슥 4:6-9). 따라서 새로운 이스라엘, 곧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세상의 방해 공작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그분의 보좌 앞에 있는 성령, 곧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권능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있을 자신의 성소로서의 공동체—자신의 예언적인 증언이 유효함을 보증하려는 목적을 가진—한가운데에 자신의 임재를 확립하시리라는 1-3절의 주제를 계속 이어간다!
감람나무와 등잔대라는 두 개의 이미지는 스가랴 4:4의 결론부와 함께 4:14에 의존한다(참조. 4:2-3, 11-14). 스가랴서의 환상에서 등잔대는 스룹바벨이 기초를 놓았던 두 번째 성전을 표상한다(1:13-15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Beale 1999a를 보라). 이 성전의 양편에는 감람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등잔을 밝힐 기름을 제공한다.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요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들"(14절)로 이해된다. 문맥상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왕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 같다.
스가랴 4장의 환상 전체의 의미는 4:6-10에 요약되어 있다. 성전 건축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건축 공사의 완성을 방해하려는 적대 세력이 있었다(7절의 “산”은 아마도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세력을 표상함). 스가랴 4장의 요점은 이런 반대가 극복됨으로써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리라고 하나님이 보증하셨다는 데 있다. “이는 [육체적인]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과 다양한 은총으로 될 것이다(6-9절). 하나님의 이런 보증은 틀림없다. 공사의 시작이 불길해 보이고 반대 세력 때문에 완공 가능성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0a절). 그분은 자신의 풍성한 영(기름)을 제공하시고, 성전 건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주도하시려 이 영을 제사장과 왕(감람나무)에게서 나오게 하실 것이다. 스가랴 3:9의 “돌”이 스가랴 4:10의 “여호와의 눈”과 동일시되어야 할 “일곱 개의 눈”과 관련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눈[目]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성전의 기초석을 두루 살피고 있으며, 비유적인 차원에서는 기초석의 놓임이 하나님이 성전의 완성을 보증하시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배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스가랴 4:14를 선택한 요한계시록의 시도가 적절했음을 보여준다. 요한이 스가랴서를 창조적으로 응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인용은 원래적인 문맥에서의 의미를 깨뜨리지 않고 그 의미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 요한계시록 11:1-2에는 반대 세력에 맞서 참된 성전을 세우고 지키는 일이 소개되는데, 스가랴 4:14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부분의 절정에 해당한다. 제사장과 왕이 반대 세력에 맞서 성전을 세우기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주된 그릇인 것처럼, 요한계시록 텍스트에서도 두 증인은 11:1-2과 관련해서 동일한 역할을 하기 위해 성령의 힘을 공급받는다. 스가랴 4장의 성전 상황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도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성전의 운명은 의심스러워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적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아람어역 성경은 히브리어 텍스트의 적대적인 “산”을,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던 적대 세력 중 하나인 로마로 이해한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는 기독교 공동체의 성공적인 성전 건축은, 성령이 교회의 신실한 예언적 증인에게 능력을 부여하심으로써 그 확실성을 보증받는다(1:13-15; 19:10에 관한 설명을 보라).
스가랴서에 대한 언급은 성령이 예언자들에게 능력을 부여해주신다는 개념에 힘을 실어준다. 왜냐하면 스가랴 4장의 등잔불은 요한계시록 4:5과 5:6에서 이미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1:4에는 사도행전 1:8에 있는 교회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스가랴서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제사장과 왕으로 일하는 자들은 개별적인 인물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참된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교회 전체를 표상한다. 왕과 제사장을 겸하는 교회 공동체의 이중적인 역할은 이미 선명하게 확증된 바 있었고(1:6; 5:10) 다시 한 번 그렇게 될 것이다(20:6). 마찬가지로 유대교는 스가랴 4:3, 11-14이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왕적 인물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의로운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고 이해했다.
요한계시록 11:1-2에 대한 앞의 분석에서 살핀 것처럼 교회는 물론 성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승리를 거두셨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마찬가지로 아람어역 구약성경의 스가랴 4:7(Tg. Zechariah)도 성전의 머릿돌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나라들을 물리치심으로써 성전 완공을 보증해줄 메시아와 동일시한다. 특히 아람어역 텍스트는 스가랴 4:7이 묘사하는 성전의 "머릿돌"을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모든 나라들을 다스릴" 자로 이해한다. 스가랴 6:12-13은 메시아와 같은 인물을 "싹"이라 칭하며, "그가 성전을 건축할 것이요…다스릴 것이요…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을 것"임을 두 번 되풀이한다(아람어의 타르굼은 "싹"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대체함).
이는 스가랴 4장의 왕과 제사장의 역할은 두 사람에 의해 수행되지만, 스가랴 6장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역할이 한 사람의 메시아적 인물에게로 합쳐짐을 의미한다. 스가랴 4장의 성전 건축 프로그램은 스가랴 4:7; 6장에 대한 유대교의 해석 전통, 신약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에 비추어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각각 제2성전의 건축을 시작하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제사장 역할과 왕 역할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2성전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참조. 슥 6:15).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건축 활동은 계속되었지만 제2성전은 다만 종말론적 성전을 예표만 할 수 있었으며, 이 진정한 성전의 시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사장-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그 과업을 대신하셔야 했다.
스가랴 4장의 보다 넓은 컨텍스트는 현재 컨텍스트와의 관련성이 매우 풍성함을 보여준다. (1) 스가랴 1:16-17과 2:1-5에서는 한 천사가 예루살렘을 "측량"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이 그곳에 건축"되고 그분의 임재가 그곳에 있도록 제건될 것임을 암시한다(참조. 계 11:1-2). 앞서 살핀 것처럼 스가랴 1-2장은 미래의 예루살렘 전체가 온통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 성전이 되기 위해 측량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2) 그러나 사탄은 세상 권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는 일을 방해했다(슥 3:1-2; 4:7). 짐승과 세상이 증인들을 대적한 것처럼 말이다(계 11:5-10).
이런 측면에서 요한계시록 2:5에 있는 촛대로서의 교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의 촛대가 되는 일에 열심을 내고(2:5) 그분의 임재와 연합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생명나무"와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실 것이다(2:7). "생명나무"와 촛대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특히 앞서 요한계시록 11:4에 대한 분석에서 살핀 것처럼 촛대로부터 나오는 빛은 이스라엘이 세상에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상한다. 교회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이런 촛대 개념은 11:4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확증된다. 이 텍스트는 그들을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촛대"라고 말한다. 성전의 촛대가 에덴의 생명나무를 표상한다는 사실(앞서 주장한 것처럼)을 깨닫는 일은 두 가지 표상의 동일시를 강화시킨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은유는 실제적으로 동일하거나, 아니면 동일한 그림과 실재의 두 가지 상이한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레고리 K. 비일, 강성열 역, 『성전 신학』(새물결플러스, 2014), pp. 437-443.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개혁주의 성경신학 관점에서 성전을 이해하니 안전한 글이기도 합니다.
초신자와 가독성을 위하여 요약해 봅니다:
G. K. 비일은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 환상이 스가랴 4장의 성전 재건 환상을 종말론적으로 창조하게 발전시킨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스가랴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왕의 이중적 역할은 종말론적 참 이스라엘인 교회의 제사장적·왕적 사명으로 확장됩니다.
'주 앞에 서 있다'는 표현은 세상의 대적 속에서도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 안에 거하며 영원히 안전함을 의미합니다.
성막의 촛대가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나무를 표상하듯, 촛대인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적대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성전 건축을 보증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입니다.
스가랴 6장에서 제사장과 왕의 역할이 한 메시아에게 합쳐지듯,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참된 종말론적 성전을 완수하셨습니다.
교회는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상의 반대 맞서 예언적 증언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영적 성전입니다.
스가랴의 예루살렘 측량 환상처럼 하나님은 마지막 날의 공동체 한가운데 임재를 확립하셔서 교회의 증언이 유효함을 보증하십니다.
교회가 신실한 증인의 촛대로서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임재의 실체인 생명나무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결국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진행되는 성전 건축은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권능을 통해 그 확실성을 철저히 보장받습니다.
네, 본문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스가랴서 4장 1-14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호크마 주석>
슥 4: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 스가랴는 역시 인간인 만큼, 성령의 깨워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그의 마음이 하늘의 것을 생각하게 되지 못한다(Calvin).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땅의 것에게 매어 있다. 혹설에 여기 "깨운"다 함은, 벌써 받은 계시 (3장에 기록되어 있음)에 놀라서 거기에 집중된 스가랴의 마음을 돌이켜 일으킴이라고 하나 이연치 않다.
슥 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 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 "순금"은 가장 고귀(高貴)한 금속인데 여기서 그 변치 않는 성질일 생각하여 하늘의 것을 상징한다. "등대"는 두말할 것 없이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주발"은 바리(鉢)와 밭은 그릇인데 기름을 저장(貯藏)하기 위한 것이고, "등잔"은 불타는 심지를 넣은 등(燈)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각기 등잔에 있는 일곱 관은,
등잔에 기름을 흘려 들이기 위한 것이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에 대한 설명은 이아래 6절 이하에 나온다.
슥 4:4,5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 들이 무엇 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이니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주여 내 주여 내가알지 못하나이다 - 선지자는 여기서도 계시의 의미를 알려고 사모한다. 그렇게 진리를 탐구하는데 대하여 천사는 가르쳐 주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아는 체 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 무식을 고백하며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늘나라의 오묘한 진리는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이 깨닫는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성물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시지 않기 때문이다(마7:6).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이것은 위에 보인 수금 등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곧, 스룹바벨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겸하여 장차오실 메시야(그는 스룹바벨에게서 예표되셨던 참 스룹바벨이심)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순금 등대가두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으로써 그 빛을 발함과, 이 스룹바벨이 세울 성전(또 그것이 예표한 신약 교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립될 것이라는 의미에서천사는 여기 말한다. 곧,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한다. "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예컨대 부력, 병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력이나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킨다.
슥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이 비록 큰 산악(山岳)같을찌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그것은 평지와 같이 변한다. "머릿돌"은 건축이 완필된 때에 집꼭대기에 놓는 것이니, 그것을 내어 놓는 것은 그 건축의 마감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어 무리가 외쳐 기도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원어에는 文法上 女性인 고로 "건물에게"라는 뜻임)"있을찌어다"하고 기도하리라고 한다. 이것은, 그 기도가 하필 그 준공하는 순간에만 있으리라는 뜻이 아니고 그 건축공사 하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있음을 암시한다(Calvin). 성전 재건하는 동안 큰 무리의 외치는 기도는 그 공사를 격려하는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가 가장 힘있게 돕는다. "은총 은총"이라고 거듭 말함은, 그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될 수 있음에 대하여 역설함이다.
슥 4: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선지자의 이말은 종종 반복(反復)된다. 그것은, 그의 전하는 바가 하나님 말씀 밖에 다른 것이 전연 없다는 역설(力說)이다. "임하여"라는 말을 보아서, 그 말씀은 외래(外來,곧, 자기 밖에 하나님에게서 오는)의 것이다.
슥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마치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다(빌1:6;계1:8). 그가 스룹바벨을 시켜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으니
그가 또한 스룹바벨로 하여금 그 일을 마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여 격려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이것은, 계시를 설명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인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뜻이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이 필경 완성될 때에는 이 천사의 예고한 대로 됨이니, 그것을 보는 자는 그 천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안다.
슥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 "작은 일의 날".그때의 성전 재건이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미천(微賤)해 보였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더러 이런 미천해 보이는 시기(時期)를 멸시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처음에는 미천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 역시 세상 사람들이보기에는 미천한 것이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가 그때에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모르심이 없으신 성령께서그 일을 성사 (成事)시키겠기
때문이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數)이니, "일곱눈"은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성령을 비유한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 곧,"일곱 눈"이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한 다림줄을 기뻐 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지 않으랴!
슥 4:11
스가랴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두 가지 형식으로 묻는다. 그의 질문은, 그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는 계시의 뜻을 모른는 그대로 무관심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모본해야 할 심리이다. "금 기름". 이것은 금빛 같은 기름이다.
슥 4:13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 천사는 위의 선지자의 질문(11,12)에 대하여 곧바로 그 묻는 뜻을 알려주지 않고,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의 무식을 안타깝게 느끼도록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방법이다. 그는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는 사람이 간절하여지기까지는 줄 것을 주시지 않고
시간을 잡으신다.
슥 4: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는 말은, 문자역(文字譯)대로 "기름의 아들 둘"이라고 한다. 기름 발리운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제사장과 왕이다.(레21:10; 삼상10:1). "주 앞에 모셔 섰다"함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에 즉각 순종하려고 대비(對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이 둘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공급한다.
호크마 주석의 스가랴 14장 해설 내용이 만만치 않아서 요약해 봅니다:
성령의 깨우치시는 은혜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하늘의 오묘한 진리를 스스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처럼 자신의 무지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진리를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은 계시를 알려주십니다.
순금 등대는 변함없는 하늘의 가치를 지닌 신약 교회를 상징하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가집니다.
성전 재건과 교회의 세워짐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재건을 방해하는 큰 산과 같은 세상의 대적과 난관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지가 될 것입니다.
건축의 완성을 뜻하는 머릿돌이 놓일 때 모든 역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이 선포됩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통해 시작하신 성전 재건 공사를 반드시 마치십니다.
시작이 미천하고 작아 보일지라도 무소부지하신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기에 결코 멸시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여호와의 일곱 눈 곧 성령께서는 성전 재건을 위한 다림줄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로서 주 앞에 서서 순종을 준비합니다.
이 두 인물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공급받아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직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하나님은 주 앞에 모셔 선 신실한 일꾼들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완성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긴 내용을 읽기 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 건축을 가로막는 수많은 대적과 난관 앞에서도 교회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열심이 아닌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권능이 뒷받침되기 때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한몸에 지니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상 한복판에서 신실한 증인의 촛대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영적 성전의 사명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아무리 미천해 보이고 거센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주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과의 안전한 친밀함을 누릴 때, 마침내 우리를 생명나무와 하나 되게 하실 하나님의 약속이 참으로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공감합니다!
세상의 어떤 대적과 난관 앞에서도 오직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참 성전이신 주 앞에 신실한 증인의 촛대로 서서 주님의 임재와 위로를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아멘!
매우 좋은 내용의 포스팅과 댓글들을 읽으며 영혼의 양식을 채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