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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o - 별하늘의 회선곡
“…….”
잔뜩 긴장해있던 온몸이 한순간에 축 늘어져버렸다. 순간이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버틴 나였다. 마주한 눈을 너무도 당연하게 피해버리는 남자의 행동에 머리가 핑 하니 돌기도 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과 착각한 걸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남자는 너무나도 내 기억 속의 변백현과 닮아있지 않으냐. 그렇다면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아니, 혹시 나를 모른 척하는 걸까. 내가 싫어져서? 왜? 정말 내가 착각을 했나? 분명 또렷하게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먼저 눈을 피해버린 남자였다.
이내 그런 나를 지나쳐 빠르게 내 시야에서 벗어나버리는 남자의 행동에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때려 맞은 사람처럼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더라. 분명 백현이었다. 저렇게 모른 척할 리가 없잖아. 놀란 척이라도 했겠지. 그럼……그럼, 정말 백현이가 맞는데.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닌데. 백현이임을 확신한 순간,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앞질러 가는 남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저번처럼 한 순간에 사라질까 봐 더 조급하게 떨려오는 심장이었다. 점점 숨은 차올랐지만 그럴수록 더 빠르게 움직이는 내 발걸음이었다. 더 빠르게 달렸다. 조급했던 걸음은 급박한 뜀박질로 변해있었다. 코앞에 보이는 놈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하, 하아……백현.”
“…….”
“백현……이야?”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변백현이야?”
“…….”
“야, 너…….”
“…….”
“……야, 너.”
“나 안 잊어버렸네, 밥통.”
변백현이 맞았다. 그건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꾹꾹 눌러뒀던 속상했던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말을 걸어오는 놈의 행동이 답답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어오는 행동이 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하고도 안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무심결에 입술을 열었다가 또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까 봐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 한 채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여전히 애틋한 얼굴로 나를 스치듯이 내려 보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눈앞에 놈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내 끝없는 그리움이 결국 놈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놓은 건 아닌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놈의 뺨을 어루만져보고 싶었다. 나만,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난 알 도리가 없다. 처음 그 느낌과 같은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버려 이제는 모두 무감각해진 건지.
“변백현.”
“…….”
“어디 갔었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내 보였다. 자잘한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몇 년 동안 내가 놈을 만나면 제일 물어보고 싶은 말 들 중에 최선은 이거였다. '어디 갔었어?' 백현이가 나한테 질렸다는 생각도. 내가 싫어졌다는 생각도, 나를 피했다는 생각도 다 뒷전이다. 우선 놈이 어디 갔었는지가 제일 우선이다. 내가 싫어질 수도 있겠지.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그걸 묻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이미 받은 상처에 또 스크래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놈에게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어디 갔었어? 그동안 어디 있었어?
“미안해.”
“…….”
“미안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걸 바란 게 아니었다. 저렇게 애연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내려 보는 저 눈과 대답을 바라고서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잠시 어디 갔었으니 이제부터 안심하라는 대답을 바라고서 한 질문이었다. 혹시나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날까 봐 황급히 조각난 말을 가로챘다. 그래, 놈이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생각이다. 그건 단지, 생각이었다. 일단 말은 꺼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혼자 있을 때는 물어볼 질문이 산더미였는데 정작 입 밖으론 그 짧은 숨소리조차 내기 힘겨웠다.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요란스럽게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난 회사 지각을 앞두고 있는 철없던 18살 ○○○이 아닌 24살 ○○○이었다. 점차 내 불안감을 재촉해오는 벨소리 탓에 멀쩡하던 눈물샘이 펑 하니 터지고 말았다. 이런 추한 몰골을 놈에게 비추고 싶지 않아 이빨 사이를 꽉 깨문 채로 강제로 눈물 끝을 참아 보았다. 이런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
“어디 갔었냐고…….”
“…….”
“어디 갔었냐고, 미안한 게 아니라 어디 갔었어……그 말이 아니잖아.”
“○○○.”
“…….”
“변한 거 없네, 그대로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과 함께 뿌연 안개가 눈동자 밑에 자욱이 차올랐다. 꽤나 듣기 거북한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더 추해지기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감췄다가 황급히 다시 손을 내렸다. 여전히 백현이는 그대로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둥둥 수백 개의 말들이 내 시야 주변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놈을 사정없이 때려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 길게 간 거냐고, 이제야 온 거냐고. 왜 나를 모른 척했던 거냐고.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거냐고. 왜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고.
“너 전화 계속 온다, 안 받아?”
“……변백현.”
“응.”
“넌 나 안 반가워?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나 지금.”
“…….”
“엄청 떨리는데 너한테 하고 싶은 말 많은데 그럼 얘기 길어질까 봐 참는 거야.”
“…….”
“지금 늦었잖아, 너.”
“…….”
“맞지? 어디 가는데?”
“……회사 가야지, 이제 그럴 나이니까.”
“아, 회사.”
“…….”
“안 믿긴다.”
무겁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유난히도 지쳐 보였다. 내가 없던 사이 어떻게 살아온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놈도 꽤나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눈을 마주했을 때 떨렸던 가슴이 점차 안정을 되찾고 평정을 찾아갔다. 하루 종일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애써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마저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주체 없이 나오던 딸꾹질은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창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사이가 참 애매했다. 연락이 끊겼던 4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기억 속의 놈은 여전히 내 남자친구였고, 변백현이었다. 허나 그러기에는 우리 사이의 텀이 너무나도 길고도 멀었던 게 문제였다. 계속해서 싱그럽게 웃으며 말을 돌리는 놈의 의도를 알아챌 방법 또한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벨소리가 야속할 뿐이었다.
“연락할게.”
“…….”
“나 번호 바뀌어서 모를 거야, 찍어줄게.”
“아…….”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내가 상상했던 상황과 달리 너무나도 순탄하게 못해 단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놈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 대화할 시간도 아까워 쩔쩔맬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순간이었지만 모든 걸 다 잃은 기분이었다. 연락처를 받았지만 이대로 백현이와 더 이상 못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를 오랜만에 보고도 이렇게 태연하게 연락처를 주며 연락한다는 얄미운 심보가 유난히도 미웠다. 특히나 길쭉한 손을 뻗어 변함없이 내 머리 위로 손을 얹고 여전히 설레는 미소를 담은 채로 나를 내려 보는 눈이 그렇게나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야, 왜…….
“얼른 가, 늦겠다.”
“……야, 너.”
“연락할게, 받아.”
“…….”
하마터면 ○○○에게 두껍게 감싸뒀던 진심이 나올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혹시나 위태위태한 내 표정을 들켰을까봐 대충 얼버무리며 황급히 등을 보인 게 화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전 ○○이의 표정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마 미운 털이 제대로 박혔을 듯싶다. 나 같아선 뺨 한 대 멋지게 후리고 매정하게 뒤돌았을 텐데 놈은 그러지도 못 했다. 여전히 착하고 또 바보 같았고 사랑스러웠다. 꽤나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제 더 이상 놈의 시야에서 내가 안 보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쯤, 느릿하게 벽에 기대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속상한 현실이었다. 난 그동안 연락이 끊긴 이유를 설명하지 못 했다. 내 이유를 듣고 어떻게 반응할까 두려웠다. 지금도 난 내가 싫은데, 넌 어떠할까. 연락. 그동안 수도 없이 고민하고 나를 힘들게 했던 단어였다. 상상하기도 힘든 지난날의 기억에 자연스럽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처음 내가 기숙사로 짐을 옮기고 너와 연락을 한다던 사실에 힘들던 훈련도 행복하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지. 오전부터 오후까지 꽤나 버거운 거친 훈련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새벽 한 시가 넘어,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와 먼저 잔다는 문자 하나에도 난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등신처럼 웃음이 나오더라. 그날, 그러니까 그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더라.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변백현, 공 잡아 봐!’
‘아, 잠……!’
‘야, 괜찮냐?’
‘백현아, 괜찮아?’
‘변백현! 야, 선생님 좀 불러봐!’
‘백현아, 어떡하냐……아, 진짜.’
‘시발,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흐릿해지는 시야와 지끈거리는 발목 부근이었다. 점심시간에만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던 상황에, 훈련이라는 것도 잊고 실실거리며 휴대폰을 본 죗값을 치르나 싶었다. 꽤나 빠른 속도로 굴러 오는 공을 무작정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발 한 쪽을 들고 막는다는 계획은, 다가오는 공의 속도를 이기지 못 하고 보기 좋게 공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같이 꺾여버린 내 왼쪽 다리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모인 사람들 소리에 저절로 머리가 핑 하니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지끈거리는 느낌이 아닌 시큰거리는 느낌이 계속에서 내 발목을 미친 듯이 자극해왔다. 지긋이 눈을 감고 푹신한 침대에 뉘어졌을 때도 아까 전, 그렇게 끝나버린 ○○이와의 문자가 그렇게나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허나 이제는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해진 고통이 내 모든 것을 덮었을 때,
‘백현아, 엄마야.’
‘괜찮을 거야, 지금 수술한대.’
‘괜찮아, 백현아. 엄마 옆에 있어.’
생각하는 건 쉬웠다. 분명, 지금 그때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는 건 당연한 거였지만. 그동안 놈과 떨어져 지내면서 유일하게 버팀목이 돼주었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분명 녀석이 보면 언제 담배를 배운 거냐며 아주 기겁을 할 테지만.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기분 좋은 잔소리에 짧은 웃음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담배 한 개비를 버리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뜨니 몽롱해진 기분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딘가에 취해버린 낯선 느낌과 함께 전환되는 옛 장면이었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종종 지난 기억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아마, 그때의 힘들었던 경험을 함께 했던 건 유일하게 이거 하나였으니까.
‘발목이 아예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수술만으로도 낫기가 쉽지 않대, 완치되려면 2차 수술하고 재활 계속 해야만 한 대 백현아.’
‘아, 싫어…….’
‘지금 고집 피울 때 아니야, 선생님 말 들었지? 캐나다 가서 전문 의사한테 치료 받고 꾸준히 재활하자, 응?’
‘싫다고, 진짜.’
‘변백현, 엄마 말 들어.’
‘싫다고, 싫어 안 가.’
‘너 축구 못할 수도 있다니까.’
‘…….’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하에 끝까지 버틸 계획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한국을 떠나기는 싫었다. 아무래도 내가 하는 일이 축구다 보니까.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재활하며 느긋하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측에서도, 부모님도 모두 내게 비행기를 타기를 강요했다. 아마 그쪽에서 차별화된 재활 시스템이 내 돌아간 발목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허나 오기로라도 버티면 한국을 떠나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4살이었다. 사실상 말하면 완전히 캐나다에서 지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3년이란 재활을 거치고서 일 년 동안 한국에서 공부한 내가 가진 직업은 평범한 식품 회사 인턴 변백현이었다. 축구 유망주에서 인턴 변백현이 되기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밥 먹고 조금 쉬고 있어, 엄마 선생님 만나고 올게.’
‘…….’
‘백현아, 그리고 그때 넘어졌을 때 휴대폰 부서졌었지? 엄마가…….’
‘엄마.’
‘응?’
‘나 며칠 됐지.’
‘뭐?’
‘여기 온 지 며칠 됐지?’
알고 있었다.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거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힘들면서도 괜찮은 척, 보고 싶어도 웃는 척. 어느새 무난한 척하는 데는 도가 튼 나였다. 헐렁한 병원복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지겹고 탁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육 개월 째 되던 날이었다. 정신없이 수술을 받고 정신없이 치료를 하고 그때야 내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비행기를 탔다. 내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캐나다로 왔다. 하루는 길었다. 그 긴 하루 중에서의 절반은 반복되는 치료와 끊임없는 의사의 소견을 듣는 일이었다. 지겹도록 같은 날이었다. 그제야 말없이 연락이 끊긴 여자친구와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이건 내 바람이었지만 놈들이 나를 잊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은 이기적인 건가. 육 개월이 조금 넘었을 때는 놈에게 먼저 연락을 할 용기가 생겼다. 그동안 연락을 끊어버렸단 이유로 놈들이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아줄지 그게 문제였다.
한참을 같은 문제로 엄마 휴대폰만 들었다 놨다 했다. 딱히 지금 이 상황에서 새 휴대폰을 산다는 건 사치였다. 그렇게 온종일 재활치료를 받고, 하루 종일 멘탈 회복 치료 수업을 듣고 나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머릿속에 안정이 찾아오자, 거짓말처럼 ○○이가 그림처럼 지워졌다 그려졌다 반복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건 참,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래도 돈을 들이고 치료를 받는 동안 처음으로 효과가 나타난 날이기도 했다. 자그마치 육 개월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아무런 말도 없이 연락을 끊은 놈이 갑자기 온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조금은 작은 떨림을 안으며 휴대폰을 켰다 껐다만 반복하다 이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선 나였다. 만약 지금에서야 연락을 한 내 목소리를 듣고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 또 망설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락 못 했던 거고. 왜 지금에서야 연락을 했냐고 하면 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연락을 못 했던 건, 네가 내게서 벌써 도망쳤을까 봐 무서워서 그랬으니까.
‘지금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
사실 이런 경우도 생각 못한 건 아니었다. 육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럴 수도 있다며 쓸데없는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정말 혹시나, ○○이와 친구들이 먼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생각도 잠깐이나마 했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먼저 도망친 건 나였다. 그 뒤에 놈들이 내 곁을 떠났다고 해도 어느 하나 이상한 점 없었지만, 그 당시 내 상황은 그랬다. 지극히도 내 주의고,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막상 ○○이의 전화가 꺼져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며칠을 밤을 새우고 고민한 끝에 다소 내 모든 걸 거는 심정으로 간신히 버튼을 누르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조용히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런 내게 돌아오는 음성은 낯설고도 거부감이 드는 기계음이었으니까.
그러니 상실감이 컸다. 놈이 내게 어떤 말을 하고, 놈이 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먹고 용기를 냈지만, 그게 사실화되니 그런 것 같았다. 괜한 과장이라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난 그날의 용기를 다시 낼 수 없었다. 육 개월이었다. 육 개월이나 연락을 못했던 내가 처음으로 용기를 냈는데, 그게 제 마음대로 안 되니 한 순간에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더라. 몸 전체의 힘이 빠진 그 상태로 하루를 그대로 버텨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꽤나 많이 흘러 몸은 나아졌지만 내 정신 상태가 문제였다. 병원 측에서는 이대로 두면 다시 예전처럼 활발하게 뛰어다닐 수도, 축구를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다 개 같은 설득뿐이더라. 난 괜찮은데, 내가 괜찮다는데.
‘백현아, 이거 치료 받아야한대.’
‘나 괜찮다고.’
‘너 지금 정신이 많이 불안정한 상태래, 상담 받고 한국 가자.’
‘괜찮다고, 나 진짜 엄마……진짜로.’
‘엄마 말 듣자, 좀.’
‘나 진짜로 괜찮다고……괜찮아, 괜찮아 진짜.’
모처럼 예전 일을 회상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기억이 조각나 버렸다. 그 이후 같은 날처럼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는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저 정신과 상담을 받고, 또 연락해볼까 고민하고. 또 전화기가 꺼져 있으면 난 정말 어떡하지. 만약 ○○이가 다른 남자친구라도 생겼으면?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그런 소심한 하루들. 다시는 쉽게 용기를 낼 수 없는 어색한 상황들의 반복.
○○이를 만나게 된 건 나도 의외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정확히 일 년 째였다. 24살, 그 사이 축구를 할 마음은 깨끗이 포기한 뒤였다. 자꾸 축구를 하면 안 좋은 기억들뿐이었다. 아주 예전처럼 성격이 밝아진 건 아니었지만, 이젠 제법 안 좋은 생각만 하던 버릇도 차차 고쳐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처럼 월급은 적지만 야망은 어느 하나 뒤처질 것 없는 작은 식품 회사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밑바닥부터 꾸준히 일을 시작했다. 사실, 누구 밑에서 일해 본 적은 거의 없어서 처음에는 적응하는 게 문제였다. 물론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놈을 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정신을 놓고 산 이유 때문에 아예 연락이 끊어져버린 이 상황을 회복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도망가지 말라고 했으면서, 결국 먼저 도망을 친 것도. 도망을 가게 할 기회를 내준 것도 모두 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를 처음 본 건 오늘로써 일주일 전이었다. 참 단순한 날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직 젖은 머리를 미처 다 말리지 못한 채 내 옆으로 지나가는 ○○○을 발견했다. 이제 하다하다 환영까지 만들어 내고 잘 하는 짓이라며 나를 채찍했지만, 그마저도 다음 날 같은 시간 우연히 또 만난 놈의 모습에 간신히 억제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너를 우연히 봤을 때 난 도망쳐야만 했다. 설명하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끊어버린 연락에 대한 설명.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나 혼자 가졌던 혼란스러움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금 나로선 네가 먼저 날 알아보기 전까지 그저 도망치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오늘, 네가 먼저 나를 알아봤을 때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난 그동안 네가 생각나는 게 두렵고 미안해서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넌 그런 나를 아직도 잊지 못 하고 있었다니, 저릿하게 맴도는 지난날의 회한. 딱 느낌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
“어디 갔었냐고…….”
“…….”
“어디 갔었냐고, 미안한 게 아니라 어디 갔었어……그 말이 아니잖아.”
왜 연락 끊었어, 왜 연락 안 했어, 바람났니? 내가 싫어졌니? 가 아닌 어디 갔었어. 한 마디였다. 난 그 말에 태연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어떻게든 놈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했다. 용기를 내어 건 전화가 걸리지 않았을 때의 그 마음을 넌 이해해줄까. 일부러 말을 돌려도 보고 애써 침착하게 웃어도 봤지만 4년 전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마 ○○이는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듯 보였다. 그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 내가 느꼈던 딱 그 회한일 것이다.
“연락할게.”
“…….”
“나 번호 바뀌어서 모를 거야, 찍어줄게.”
아무렇지 않게,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래야 너도 울지 않을 테니까.
나만 빼고 모두가 도착한 건지 지겹도록 울려대는 세 놈의 독촉 전화벨이 지독히도 난잡한 머릿속을 잔뜩 뒤집었다. 이 애매한 기분으로 놈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을 안 만난 지 두 달하고도, 이 주가 흐른 오늘이었다. 각자의 회사생활과 취업 준비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어두운 분위기의 술집으로 발을 들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목소리들을 찾기 시작했다. 남자, 어느새 이 단어에 제법 어울릴법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김종대 벌써 취했어?”
“여친한테 까였대.”
“으, 힘내라.”
“야, ○○○ 너도 얼른 마셔.”
“뭐야, 김종인 너도 취했어?”
“그냥 조금 마셨어.”
“아, 그만 마셔. 널 누가 데려다 줘.”
“오자마자 재수 없게 왜 먹지 말라고 난리야.”
“걔랑은 어떻게 됐어.”
“아, 걔 때문에 존나 속상하니까 그 얘기 하지 마.”
참, 안타까운 인생들을 사는 내 친구들이었다. 사귄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여친에게 보란 듯이 차이고 허한 속을 독한 술로 달래고 있는 진상의 끝을 보여주는 김종대를 시작으로, 여자라곤 관심도 없는 도경수를 넘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시작된 짝사랑의 길을 아직도 제대로 밟고 계시는 김종인까지, 쌍으로 스펙타클한 인생들. 쓰디쓴 술을 입안 가득히 들이켰다. 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라도 참아 보였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반응할까. 내 말을 믿어줄까. 현실을 직시해줄까.
“경수야아아……도경수우우.”
“잘한다, 너도 취했냐.”
“경수야아아.”
“존나 도경수밖에 몰라, 나는 안 보이냐?”
“종인아아아.”
“미친, 너 뭐 속상한 일 있냐? 왜이래?”
“나…….”
“나 ○○이 데리고 먼저 갈게, 종인아. 종대 챙겨라 너가.”
“아,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나 오늘 백현이 만났다아아…….”
“…….”
“…….”
“또 닮은 사람이랑 착각했어?”
“아니야, 이번엔 진짜라고…….”
“○○○.”
“아, 진짜라니까? 막 나랑 얘기도 하고 그래써어…….”
“일단 나갈게. 종인아 김종대 좀 진짜 잘 챙겨라. 저 새끼도 맛 갔다.”
“조심히 가라.”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대충 분위기가 비슷한 사람만 봐도 백현이를 봤다며 울고불고 하던 지난날이 이런 상황을 초래할 줄이야. 비틀비틀 거리는 내 어깨를 단단히 고정하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주는, 늘 친절한 조력자 같은 내 사람 경수였다. 내가 제일 의지하는 놈을 보고 있자니 간신히 참고 있던 고삐가 풀리듯 눈물이 터져버리기 시작했다. 속상했다. 너무나도 속상하고 속상한데, 그중에서 제일 아픈 건.
“경수야, 도경수.”
“응, 말해.”
“백현이가 날 보고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막 웃어.”
“…….”
“막 그냥 웃고, 먼저 등 돌려버리는 거야…….”
“…….”
“이제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처럼, 걔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막 웃어.”
애연한 눈빛으로 나를 따뜻하게 내려 보는 그 시선이 유난히도 아프게 느껴졌다. 그 핑계로 마음껏 눈물을 쏟을 수 있었지만 그래봤자 지금 어떠한 말도 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경수는 그저 묵묵히 내 손목을 이끌며 택시로 같이 몸을 옮겼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놈은 내게 어떠한 말도 걸지 않았다. 아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듯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여전히 같은 골목길, 같은 건물들, 같은 집들. 그리고 경수와 우리 집이 가깝다는 사실, 내가 백현이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어느 하나 달라지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변백현만 달라져 있었다. 왜 그렇게도 태연하게 나를 대한 건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데.
“집까지 데려다 줘?”
“아니, 괜찮아…….”
“그럼 울지 좀 마.”
“……알겠어.”
“변백현이 뭐래.”
“……아까 했잖아, 그게 다야.”
“○○○.”
“…….”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실망할 이유 따윈 없어.”
“…….”
“네가 변백현한테 실망하는 건 이유를 다 들어보고서야, 너도 변백현 잘 알지만 나도 알잖아. 그 새끼 알면서도 왜 실망을 해.”
“……알아.”
“알면 울지 말고, 보기 안 좋다.”
“……응.”
“들어가, 가서 또 울 것 같으면 전화해.”
“알겠어, 할게.”
“그럼 기다리고 있어야겠네.”
아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네, 내가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는지 나보다 더 잘 알아. 힘 빠진 웃음을 내뱉곤 조금 풀린 기분과 함께 몸을 돌렸다. 아직도 비틀거리는 몸이 자연스럽게 추한 스텝이 나와 버려 또다시 바보 같은 실소도 터졌다. 혼자만의 새드 코미디를 제대로 찍고 있는 셈이었다. 눈앞은 혼미하고, 뿌연 거리는 익숙함으로 가득 찼다.
“…….”
“…….”
그 익숙함 속에서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이 보이자 비참함이 배가 됐다. 이 갑갑한 상황에서도 놈의 얼굴이 보인다는 자체가 비참했다. 그럼에도 더 짜증나는 건,
“○○○.”
“…….”
“술 마셨어?”
그럼에도 짜증나는 건, 날 보는 네 눈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였다. 내게 다가오는 그 얼굴이 반가울 수가 없는 거였다.
“…….”
“위험하게 왜 혼자 와, 경수랑 싸웠어?”
“……변백현.”
“왜 이렇게 늦게 와, 위험하잖아.”
“…….”
“그……엄청 기다렸는데.”
“왜 온 거야?”
“뭐?”
“왜 온 거냐고.”
“○○○.”
“나보고 아무렇지도 않아 했잖아. 나랑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그렇게 행동한 건 내가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
“종알종알.”
“…….”
“여전하네.”
“…….”
“혼자 앞서가는 것도.”
또 울컥하게 만드는 구나 결국. 이렇게 추한 몰골로 네 앞에서 보란 듯이 눈물만 나오게 하는 구나 넌. 기침을 하듯 터지는 눈물샘이 오랜만에 만난 벅찬 얼굴을 이곳저곳 껄끄럽게 망가트려 놓기에 정신없었다. 백현이의 선명한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기억하고 싶었다. 나 도망가지 않고 이렇게 있는데, 넌 왜 자꾸…….
“왜 울고 그래, 화장 지워지게.”
“말해봐 그럼, 내가 싫어졌어?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거야? 넌 눈물도 안 나?”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도 안 나, 멍청아.”
“…….”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까지 울어야겠냐.”
“…….”
“들을 자신 있어?”
“……뭐가.”
“내 변명 들을 자신 있어?”
“당연하지, 그거 들으려고 지금까지 악으로 깡으로 기다린 건데.”
“나도 악으로 깡으로 네 집 온 건데?”
“지금이 장난 칠 타이밍이야?”
“단순한 거 보니까 너 진짜 밥통.”
“…….”
“그러니까 우선, 제일 하고 싶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할게.”
“…….”
“많이많이 보고 싶었어, 매일 너만 생각하고, 힘들어도 너만 생각했어. 네가 나를 잊었을까 두려웠어.”
그동안 백현이가 가졌던 고통을 전해들은 순간, 무언가가 가슴을 후벼 팔 만큼 아픈 덩어리가 생겼다. 중간 중간 뚝뚝 끊기는 말에 심한 마음고생을 했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저절로 애타는 인상이 써지곤 했다. 사실, 어떠한 변명에도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놈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지겨워졌다는 사실도, 내게서 도망쳤다는 사실도 모두 보란 듯이 어긋나지 않았느냐. 근데 그런 게 아니라잖아, 그럼 화낼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 아프지 않을 만큼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위로 고개를 올렸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변백현.”
“응.”
“그래서 그걸 지금 말하면 뭐 어쩌자는 거야.”
“…….”
“그러다가 진짜 내가 너 싫어지게 되면, 네가 사과해도 안 받아준다고 그냥 가버리라고 하면 어쩌려고 지금 말하는 건데.”
“○○○.”
“그냥 가버리면 어쩌려고 그걸 지금 말하냐고.”
“……그래서.”
“…….”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
“…….”
“……지금도 간신히 용기낸 거란 말이야”
“…….”
“나 안 늦었지, 아직.”
깨물었던 입술을 더 강하게 앙다물어 눈치 없이 올라오는 눈물을 다시금 속으로 삼켜버렸다. 이 진지한 상황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선하게 눈에 밟혀왔지만, 저 웃음이 가식이라는 것쯤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너도 그걸 숨기려고 억지로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좋아?”
“뭐가?”
“안 늦어서 좋냐고, 내가 아직도 너 좋아해서 좋냐고.”
“…….”
“진작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알겠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별로 하고 싶지 않아.”
“…….”
“입술도 그만 깨물고.”
“…….”
“……해도 돼?”
“뭐를?”
“입 맞춰도 돼?”
“장난도 타이밍 보고 쳐, 응?”
“장난 아닌데 진짜.”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넌. 조금만 더 믿어보지. 안 떠날 거라고 믿어보지. 절대 네 기대 배신하지 않았을 텐데. 믿어보지……왜 힘든 걱정 때문에 지금까지 이만큼 어렵게 돌아온 건데. 뭐 때문에.
“변백현, 왜 나 못 믿었어?”
“알아, 내가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어.”
“나보고 도망가지 말라며.”
“알아, 다 알아.”
“그런데 왜 네가 도망가 왜……알긴 뭘 알아. 네가 지금 알고서 이런 거야? 모르니까 이런 거잖아.”
“아니야, 나 진짜 다 알아. 네가 안 떠날 거라는 것도 알고, 다 알아.”
“아는데 왜 그랬어, 진짜……나는 내가 잘못한 줄 알고, 그래서 너무 미안했단 말이야.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내가 다 잘못한 거 같아서…….”
잘 참았는데. 이왕이면 조금만 더 참을걸. 백현이 앞에서 추하게 이게 뭐야 정말. 그렇게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내 앞에 있는 이 상황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예쁘게 화장하고 네 앞에서 웃는 모습. 공주 풍 원피스를 입고 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고, 또 평소에 잘 하지는 못 하지만 애교도 떨어보고 싶었는데. 지금 난, 보기 좋게 그 기대들을 깨트려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그래도 마지막까지 숨겨본다고 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내가 잘못한 게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고마워서. 야속하지만 고마워서. 힘들게 했지만 결국에는 또 고마워서. 마지막으로 용기를 잃지 않은 게 고마워서.
“왜 울어.”
양손 가득 손을 들어 내 머리를 감싼 채로 나를 끌어안은 백현이었다. 한참을 꺽꺽대며 미친 듯이 서러움을 토해냈다. 그리움과 외로움의 갈증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많이 필요했다. 네가. 힘없는 약한 어깨가 더 가느다란 눈물들로 사정없이 번져갔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시간이 없다. 환상 같은 시간이다. 딱 그랬다. 지금 놈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다.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두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라도 하는 게 우선이다. 목부근에 힘을 주고 몸을 떼려는데, 오히려 더 나를 가깝게 제 품에 끌어당기는 것 아니냐.
“백현아.”
“알겠어, 조금만.”
“…….”
“진짜 조금만.”
“백현아.”
“…….”
“너 울어?”
“……조금만.”
“야, 너…….”
“지금만 울자, 지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