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창조의 원리
<재생적 상상>: 기억들을 회상하여 재생하는 기억 상상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노란주전자 / 유홍준
그날, 누이는 누런 주전자를 들고 뙤약볕 속을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시기가 달린 주전자를 들고 가고 있었다 목마르고 목말라 아버지의 거시기를 빨며, 불볕 속을 가고 있었다 누런 아버지의 거시기가 흘러 얼룩이 진, 검정 무명치마를 입고 가고 있었다 옆구리 찌그러진 주전자 되어, 한 됫박 눈물 찔끔 거리며 돌아올 수 없는 길 가고 있었다 이놈의 주정뱅이, 이놈의 아편쟁이, 이놈의 개망나니, 어머니가 주전자를 마구, 마구 짓밟으며 울부짖었다 주전자만 보면 지금도 나는, 긴장을 한다 주전자처럼 어깨를 오므리고, 파르르 떤다 나는 노란 주전자의 노란 주전자, 머리뚜겅이 들썩거리는
돌멩이 / 함순례
강물에 잘 씻긴 돌멩이 쥐어본다
차르륵 물 흘러내리며 손바닥으로 안겨드는
돌멩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달음박질 느리고 뱃심 약해 앞에 나서지 못하고
돌멩이나 날라주던 대학 시절 있었다
던진다, 던지고야 만다,
돌멩이 손에 들고 쥐었다 폈다 하며
가슴이 팽팽해졌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면
부엌문 뒤에서 틈 엿보던 때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 뒤곁으로 숨기고 두려움에 떨다가
알콜중독으로 비틀린 아버지
나 사이의
......,
가슴 끝 조여오며 요동치던 비늘들,
한 켜 한 켜 물살에 깎이고 쓸리다
지느러미 반짝이며 여기까지 흘러온 것인가
손 안에서 따스해진 돌멩이 하나
강물로 돌려보낸다
누구나 생의 안쪽 돌멩이 하나쯤 감추고 산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현대시와 이미지의 개념
<정신적 이미지(figurative image)>: 정신적 이미지는 지각적 혹은 심리적 이미지라고도 부르는데,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한다.
단단한 뼈 / 이영옥
실종된지 일 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물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물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 쎈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무잎 음표들이 옹알거릴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둥,
백지에 오선을 굿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벼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3월 /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비유적 이미지(mental image)>: 비유를 통해서 제시된 심상으로서 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형식적 기법이다. 이것은 비유의 기법과 마찬가지로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의 관계가 유사성 내지 동일성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단풍 / 박성우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 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點描 / 박용래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상징적 이미지(symbolic image)>: 다른 것과의 비유를 통해서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나 한 시인의 여러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이미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한 시인이나 한 작품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 시대나 한 민족, 혹은 어느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되풀이되는 이미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까마귀 / 구상
너희는, 영혼의 갈구와 체읍(涕泣)으로
영영 잠겨버린 나의 목소리가
불길을 몰아온다고 오해하지 말라.
오직 나는 영롱한 내 심안(心眼)에 비친
너희의 불의가 빚어내는 재앙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 줄 따름이다.
까욱 까욱 까욱 까욱
落葉後 / 김현승
남은 것은…
마른 손등으로 닦는
한 두 방울의 눈물
소금기 섞인 마른 눈물
일생을 썼으나
한 두 줄의 詩
다문 입술보다
아름다운 結晶을 놓친…
털을 뽑아 제 둥지에 찬바람을 막는
산짐승의 呻吟과 사랑
남은 것은…
창밖에
울고 가는 까마귀
4주 상상력과 창조의 원리
<재생적 상상>: 기억들을 회상하여 재생하는 기억 상상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노란주전자 / 유홍준
그날, 누이는 누런 주전자를 들고 뙤약볕 속을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시기가 달린 주전자를 들고 가고 있었다 목마르고 목말라 아버지의 거시기를 빨며, 불볕 속을 가고 있었다 누런 아버지의 거시기가 흘러 얼룩이 진, 검정 무명치마를 입고 가고 있었다 옆구리 찌그러진 주전자 되어, 한 됫박 눈물 찔끔 거리며 돌아올 수 없는 길 가고 있었다 이놈의 주정뱅이, 이놈의 아편쟁이, 이놈의 개망나니, 어머니가 주전자를 마구, 마구 짓밟으며 울부짖었다 주전자만 보면 지금도 나는, 긴장을 한다 주전자처럼 어깨를 오므리고, 파르르 떤다 나는 노란 주전자의 노란 주전자, 머리뚜겅이 들썩거리는
돌멩이 / 함순례
강물에 잘 씻긴 돌멩이 쥐어본다
차르륵 물 흘러내리며 손바닥으로 안겨드는
돌멩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달음박질 느리고 뱃심 약해 앞에 나서지 못하고
돌멩이나 날라주던 대학 시절 있었다
던진다, 던지고야 만다,
돌멩이 손에 들고 쥐었다 폈다 하며
가슴이 팽팽해졌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면
부엌문 뒤에서 틈 엿보던 때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 뒤곁으로 숨기고 두려움에 떨다가
알콜중독으로 비틀린 아버지
나 사이의
......,
가슴 끝 조여오며 요동치던 비늘들,
한 켜 한 켜 물살에 깎이고 쓸리다
지느러미 반짝이며 여기까지 흘러온 것인가
손 안에서 따스해진 돌멩이 하나
강물로 돌려보낸다
누구나 생의 안쪽 돌멩이 하나쯤 감추고 산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