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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닦는 곳
세상의 일을 접어두고
절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스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지게 되는 온갖 괴로움과 번뇌를 스스로 씻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절에 갈 때는 세삿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깨달아야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갑니다.
우리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함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항상 원하는 만큼 얻기가 어려우며, 비록 재물은 어느 정도 얻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잠시 즐거움이 생기다가도 어느새 괴로움이라는 덩어리가 고개를 들고 생겨납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을 따라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고요한 마음과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절이 세워지기 전에 수행(修行)이 먼저 있었습니다. 수행이 있으면 언젠가 시절 인연이 되어 절이 세워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하시어 수행하실 때는 마을에서 1시간 거리쯤 떨어진 숲 속의 나무 아래서 또는 신(神)을 모시는 사당(詞堂)인 묘(廟)에 머무르며 수행하였습니다. 숲 속은 종교에 관계없이 여러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곳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동굴 속에서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많은 출가자(出家者)와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이 모여 더 이상 숲 속이나 동굴에서는 수행을 하고 가르침을 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때에 맞추어 마땅한 시주(施主)의 인연(因緣)을 만나서 절이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여러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물과 노력과 신경을 써가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절에 놀러오는 유흥객 때문에 수행에 방해를 받는 일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며 중생을 깨우치게 하는데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 재가불자 :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절의 기원
절을 가리키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절은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 스님께서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의 모례의 집에 머무르면서 수행(修行)과 포교(布敎)를 함으로써, '모례의 집'이 신라 최초로 스님과 재가불자가 함께 수행하던 집이었습니다. '모례(毛禮)'라는 말이 나중에 신라의 이두(吏讀)로 '털례'로 표현되다가, 줄여서 '털'이 되고 다시 '절'이 되었습니다.
절은 또한, 절(拜)을 하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寺)는 머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범어의 비하라(Vihara)의 의미를 가집니다. 중국에서는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을 사(寺)라고 하였습니다. 후한(後漢)의 명제 때(67년) 가섭마등, 축법난 두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자 사신을 접대하던 홍로사(鴻 寺)에 머물게 하다가 뒤에 백마사(白馬寺)를 지어 머물게 했는데, 이로써 백마사는 중국 최초로 스님이 생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스님이 생활하는 곳을 사(寺)라고 하였습니다.
사찰(寺刹)은 불전 앞에 세우는 당간(幢竿)을 찰(刹)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원(寺院)은 중국에서 담으로 둘러진 집과 *회랑(回廊)이 있는 집을 원(院)이라 하였는데, 당나라 때부터 불교의 건물에 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암자(庵子)는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말합니다.
정사(精舍)는 마음을 닦는 집,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도량(道場)은 도(道)를 닦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람(伽藍)은 *범어로 공동체를 뜻하는 상가(Samgha)와 집을 뜻하는 아라마(Arama)를 합하여, 공동체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상가람마(Samgharam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상가람마를 *음역(音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고 했으며, 줄여서 '가람(伽藍)'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역(意譯)을 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중원(衆園)이라 합니다.
총림(叢林)은 스님들이 모여서 서로 화합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숲 속의 나무가 곧게 자라는 것에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총림(叢林)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염불원(念佛院)을 갖춘 종합수행도량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는 5대 총림이 있는데, 영축총림 통도사, 해인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입니다.
아란야(阿蘭若)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줄여서 란야(蘭若)라고도 합니다. 마을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랑; 벽은 없이 지붕만 있는 복도.
*범어; 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 산스크리트어(samskrta).
*음역; 비슷한 소리의 한자말로 번역하는 것.
*의역; 같은 뜻을 가진 한자말로 번역하는 것.
불교의 공동체
불교의 공동체는 교단(敎團)을 구성하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을 말합니다.
비구(比丘)는 범어 빅쿠(bhiksu)를 음역(音譯)한 말로 남자 출가자(出家者)입니다.
비구니(比丘尼)는 범어 빅쿠니(bhiksuni)를 음역한 말로 여자 출가자입니다.
우바새(優婆塞)는 범어 파사카(upasaka)를 음역한 말로 남자 *재가불자(在家佛子)입니다.
우바이(優婆夷)는 범어 우파시카(upasika)를 음역한 말로 여자 재가불자입니다.
*재가불자;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최초의 절
불교 역사에서 최초의 절은 인도의 갠지즈강 하류에 있었던 마가다 국(國)의 수도인 왕사성(城) 밖의 숲 속에 세워진 죽림정사(竹林精舍)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마가다 국의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부처님의 제자들이 1천명이 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하시던 시절부터 부처님을 존경하며 따르던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王)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르면서 수행할 집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수행처는 마을에서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아서, 낮에는 혼잡하지 않고 밤에는 소리가 없어 조용하며, 사람들로 해서 번거롭지 않은 곳, 홀로 앉아 수행하기에 알맞은 곳이면서도, 중생들이 부처님을 찾아 설법을 듣고 싶을 때 가기 쉬운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가란타 *장자(長者)가 왕사성의 북문 밖 가까이 있는 자신의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바치자 빔비사라 왕이 그곳에 집을 지어서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이 집이 최초의 절(精舍)인 죽림정사입니다.
다음으로 지어진 절이 기원정사(祇園精舍)입니다.코살라 국의 태자(太子)인 기타(祇陀) 소유의 동산에 수닷타 장자(長者)가 집을 지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많이 도우는 사람이라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 불렀습니다.
기타 태자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집을 지었다 하여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는데,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열반에 이르실 때까지 45년 가운데 24년을 이 곳에서 보낼 정도로 가장 오래 동안 머물었던 곳이었습니다. 금강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을 이 곳에서 설법하셨습니다.
*장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덕이 뛰어난 사람.
절에 갈 때는 공양물을 준비합니다
세상에서 재물을 얻고 있는 우리들은 스님들의 수행과 절의 유지와 가르침을 전하는데 필요한 재물을 제공합니다. 이것을 공양물(供養物)이라고 합니다.
공양(供養)은 '공급하여 기른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의 마지막 순간에 몸은 야위고 기력이 없을 때, '수자타'라는 소녀가 부처님께 올린 공양을 드시고 힘을 얻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전생부터 세상을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많은 공양을 받았습니다. 더러는 빚을 꾸면서 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 중에서 일부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공양 덕택일 것이며, 겪고 있는 불행 중에서 일부는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을 갚느라고 겪는 것입니다.
이제 되돌려 주고 싶어도 어디로, 누구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는 공양물은 바로 세상에 되돌려주는 일입니다. 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랜 전생에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가 공양을 받았던 사람도 있고 빚을 꾸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절에 공양물을 올리면 바로 그들에게 되돌려집니다.
또한, 절에 올리는 공양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의 중생들과 이 세상을 떠난 영가(靈駕)에게까지 나누어집니다. 기왓장 불사에 동참하면 내가 올린 기왓장 한 장이 절의 지붕을 덮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을 편안히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됩니다. 오랜 세월동안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에는 부처님께 감사하고 스님들의 수행을 도우며, 중생들의 은혜를 갚고 세상에 작은 등불을 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공양물에 담긴 의미
공양물에는 초, 향, 차, 꽃, 과일, 쌀 등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합니다. 하나 하나의 공양물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1) 초 - 지혜(智慧)의 등불
촛불은 등불과 같으며, 세상을 밝히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이 하루의 일을 마친 해질녘에 숲 속에 계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어둠을 대비하여 각자가 기름으로 만든 등불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처럼 전등이 없을 때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공양 올렸으나, 밤의 어두움과 함께 세상의 어두움인 무명(無明;어리석음)을 밝혀서 지혜(智慧;반야)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등불을 공양 올렸습니다. 지금은 촛불을 공양 올리거나 부처님 곁에 인등(引燈)을 밝힙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캄캄한 밤에 등불을 켜면 그 방 속에 쌓여있던 백년동안의 어둠이 일시에 사라진다. 이처럼 마음에 진리의 등불을 켜면 까마득한 날 동안 쌓였던 마음의 어둠이 한꺼번에 모두 사라지리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는 자신을 태워서(자비) 세상을 밝혀주는(지혜) 이타행(利他行)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향 - 해탈(解脫)의 향기
등불은 강렬하게 어둠을 없애주지만 꺼지면 다시 어둠이 돌아오며 가려진 곳은 밝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향은 가려진 곳에도 향기를 두루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모두 타버린 후에도 고운 향기는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향은 모든 속박(束縛)을 풀어주는 해탈(解脫)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립니다. 그리고 향도 초와 같이 자신을 태워서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이타행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차 - 열반(涅槃)의 맛
우리들의 괴로움은 *삼독심(三毒心;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열반(涅槃;Nirvana,니르바나.)이라고 합니다.
갈증을 풀어주는 감로수(甘露水)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괴로움을 목마른 갈증에 비유하여 감로수 즉 차를 공양 올립니다. 감로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이슬을 말합니다. 차를 대신하여 대개 맑은 물을 공양 올립니다.
(4) 꽃 - 보살행(菩薩行)의 아름다움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꽃이 피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하여야 합니다. 보살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꽃을 공양 올립니다. 또한, 꽃을 공양 올림으로써 아름다운 꽃처럼 우리의 마음과 세상도 아름다워집니다.
(5) 과일 - 깨달음(보리과;菩提果)의 열매
과일은 오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지극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열매가 맺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과일을 공양 올립니다.
(6) 쌀 - 깨달음의 기쁨(선열;禪悅)
봄부터 수많은 노력을 한 후 가을에 추수를 할 때의 기쁨처럼, 수행의 결과로 얻는 깨달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수행의 즐거움, 진리를 듣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쌀을 공양 올립니다.
* 삼독심;
①탐욕(貪慾);욕심(慾心), 집착(執着)
②성냄; 진심(嗔心), 진에(瞋恚)
③어리석음; 치심(癡心), 무명(無明).
한번쯤 생각해 봅시다
절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불공;佛供)는 여섯 가지 공양물을 정성껏 부처님 전에 올립니다. 그러나 불자들이 절에 갈 때는 여섯 가지를 모두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 절에서 필요로 하는 공양물을 준비합니다. '절에 갈 때는 향과 초를 가져가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으로 공양물을 준비하는 것은 적합한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절에는 향, 초가 너무 많아서 낭비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요즘은 절을 보수하고 스님의 수행을 뒷바라지하며 절을 운영하거나 중생구제를 위하여 돈이 더 소중하게 필요합니다. 초와 향을 공양 올리는 대신에 그에 적당한 돈을 복전함(福田函)에 넣으면 더 좋습니다. 복전함은 복(福)의 열매를 열게 하는 밭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복의 씨앗이 됩니다. 부처님 앞에 있는 함이라는 뜻에서 불전함(佛前函)이라고도 합니다.
옷차림은 단정하게 옷차림은 편안하고 깨끗하게 하되 몸을 너무 드러내거나 색깔이 요란한 차림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므로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깊이 생각하면서 준비합시다.
회색 빛깔의 수행복은 절에 와서 갈아입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수행복은 말 그대로 수행을 하는 옷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절까지 오는 길에 수행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장소를 지나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절에서 마땅히 옷을 갈아입을 곳이 없는 경우에는 집에서부터 수행복을 입고 가더라도 다른 곳을 거쳐서 가지 말고 곧장 절에 갑니다.
합장하는 마음
불교의 인사법은 합장(合掌)으로 시작합니다. 합장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창조신을 믿는 종교였던 바라문교에서 하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여서 오늘까지 전해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에 불교를 전할 때마다 그 나라에서 예로부터 행하던 방식은 존중하고 계승하면서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내용을 바꾸고 변화시켜 가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
합장은 본래 상대방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법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더 깊은 뜻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흩어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일심(一心)의 뜻과, 나와 남, 내 것과 네 것, 좋음과 미움 등 일체의 차별하는 마음, 둘이 아닌 마음을 버리는 불이심(不二心)과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을 상징하는 오른손과 중생을 상징하는 왼손을 합침으로써, 일체 중생과 함께 삶의 지혜와 깨달음를 얻기를 바라는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의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합장하는 방법
합장을 할 때는 두 발의 뒤꿈치를 붙이고 서서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서 두 손바닥을 붙입니다. 이때 손바닥이 벌어지지 않도록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기도 하는데, 이 때는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위에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킵니다.
합장한 두 손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가슴에서 조금 띄우고 합장한 손을 위로 45도 정도 세웁니다. 팔꿈치는 몸에 너무 붙이지 말고 겨드랑이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려뜨리는 기분으로 둡니다.
전체적으로 합장한 자세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하며, 어깨나 팔목, 손 등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닙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담긴 뜻
불교에서 왼쪽은 정(靜;고요함)을, 오른쪽은 동(動;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안으로 모으는 고요함의 기운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움직임의 기운을 눌러 줌으로써, 마음이 안으로 모여서 고요함(선정; 禪定, 定)을 유지되게 합니다.
부처님과 스님 앞에 설 때 하는 왼손의 바닥으로 오른손의 등을 감싸서 오른손의 바닥을 배꼽 아래의 아랫배(단전; 丹田) 에 대는 차수(叉手)를 합니다.
이 때도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도 왼발로 오른발을 누르며, 좌선을 할 때도 왼손으로 오른손을 누르며, 가부좌(跏趺坐)를 할 때도 왼발로 오른발을 누릅니다.
부처님과 보살의 위치 등을 가리킬 때는 방향을 순서대로 말할 때 '우좌(右左)'라고 하지 않고 '좌우(左右)'라고 하듯이 왼쪽부터 가리킵니다.
이 때의 왼쪽과 오른쪽이란 부처님께서 보시기에 즉 부처님 계신 곳에서 보아서 왼쪽, 오른쪽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왼쪽을 먼저 말하고 오른쪽을 나중에 말한다면 순서를 틀리게 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 곁에 계시는 보살 중에서 부처님을 기준으로 왼쪽에 계시는 문수보살을 먼저 가리키고 오른쪽에 계시는 보현보살을 가리켜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순서대로 나타내게 되는데,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왼쪽에 계시는 보현보살부터 가리킨다면 순서가 틀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왼쪽과 오른쪽을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판단하여 틀리게 말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부처님 계신 곳, 부처님이 보시는 방향에서 판단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중생의 어리석은 눈으로 판단하지 않고 부처님의 지혜의 가르침으로 살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반 배 하는 법
반 배(半拜)는 합장을 한 자세에서 목을 꺽지 말고 머리끝에서 허리까지 바로 세운 자세에서 허리를 천천히 굽힐 수 있는데 까지 90도 가까이 굽힙니다.
합장한 손은 내려뜨리지 않고 허리와 함께 그대로 내려갑니다.
굽힐 때는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굽히며, 다 굽힌 후에는 멈추지 말고 다시 숨을 천천히 들이쉬면서 몸을 바로 세웁니다. 너무 빠르게, 혹은 느리게 굽히지 말고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의 속도에 맞추어서 굽히고 세웁니다.
목만 까딱 하는 반 배는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리고 등이 굽어지거나 목을 굽히는 반 배는 아름답지도 않고 의젓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바른 자세를 갖는데도 좋지 않습니다.
어디서 절을 할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후, 뒷걸음으로 물러나 부처님을 정면에서 마주 바라보는 자리인 어간(御間)을 피하여 앞쪽의 가운데서부터 벽 쪽을 향하여 순서대로 자리를 잡고 *좌복(坐服)을 가지런히 편 후에 삼 배를 올립니다.
좌복을 펴고 서 있을 때는 좌복 위에 발을 올리지 않고 발가락 끝을 좌복 안으로 살짝 넣은 자세로 섭니다.
좌복은 수행을 위해 소중한 몸을 보살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발로 밟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뒤쪽에 자리를 잡고 삼 배를 올리는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오는 불자들이 참배를 하는데 불편을 줄뿐만 아니라 다른 불자들이 자신이 절을 하는 앞으로 다니게 되므로 자신의 수행에도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도 다른 불자가 절하는 앞으로 다닐 때는 조심하여 지나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좌복(坐服); 공부할 때는 앉는 자리(坐)로, 다닐 때는 손에 걸치고, 잠잘 때는 배를 덮는 이불(服)로 사용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방석(方席).
절은 마음을 낮추는 공부
절을 하는 근본 마음은 몸을 낮춤으로써, 마음을 낮추고(하심;下心), 비우며(사심;捨心), 닦는데(수심;修心) 있습니다.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는 이치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얻기를 원한다면 먼저 몸과 마음의 그릇을 낮추고 비우며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불;佛)과 부처님의 가르침(법;法)과 스님(승;僧)의 세 가지 보배(삼보;三寶)에 대하여 몸(신;身)과 입(구;口)과 생각(의;意)의 세 가지 업(삼업;三業)으로 예경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삼보에 예(禮)를 올리는 의미로서 삼 배를 드립니다.
머리를 바닥에 닿게 하는 절이라서 정례(頂禮)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례로 삼 배를 올린다 하여 삼정례(三頂禮)라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접족례(接足禮)라고 하여, 자신의 이마를 존경하는 스승의 발등에 닿게 하는 예법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받드는 자세는 접족례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몸에서 가장 높은 부분인 머리 위로 부처님의 몸에서 가장 낮은 부분인 발을 받들어서 최대한의 공경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불교를 믿는 각 나라마다 절하는 모양이 다릅니다. 인도와 티벳에서는 온 몸을 바닥에 붙이는 자세를 합니다. 중국에서는 둥근 상(床)위에 무릎을 대고 절합니다. 태국에서는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절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절하는 모습은 의젓하면서도 고요함을 느끼게 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