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展
감각 콜라주, 사이의 대화
사라진 건 넌데 내가 없어진 것 같아_65x65cm_oil on canvas_2022
필갤러리
FILL GALLERY
2022. 12. 19(월) ▶ 2023. 1. 3(화)
서울특별시 용산구 유엔빌리지길 24 (한남동) | T.02-795-0046
www.fillgallery.com
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_78x114cm_oil on canvas_2022
감각 콜라주, 사이(間)의 대화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구상표현주의(Figurative Expressionism)를 유영하는 박종화 작가는 문학적 서사와 경험을 연결한 ‘개념적 붓질’을 강조한다. 디지털 이미지로부터 레디메이드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확장된 캔버스의 변주는 전통적 사유와 새로운 행위 사이를 오가며 동시대 미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역설적 재탐색을 통해 선험적으로 인식된 이야기들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는 ‘블랙 유머(Empirical Humor)’를 선보인다. 한국의 헤르난 바스(Hernan Bas)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네러티브는 이미지가 무한정 쏟아지는 소비 시대를 풍자하듯, 구상회화의 의미를 사유의 출발로 설정하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단순한 미메시스(Mimesis/模倣)의 차원을 넘어 실재와 환영, 현실과 욕망이 뒤섞인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을 작가의 현실과 매칭하는 타임콜라주(Time Collage)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린다는 행위를 동시대 맥락에 맞게 재배치하는 전략으로, ‘시·공간 사이의 서사’를 연결해 미래의 관람객과 만나는 가능성의 행위로까지 이어진다.
시간의 중첩이 만드는 ‘상상의 데페이즈망’
에스키스 없이 영화 장면을 픽스하는 방식,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나 화가들을 명화들에 조합하는 감각은 섞이면서 스토리가 이어지는 박종화 만의 세계관이다. 고흐와 친구 고갱 사이의 묘한 공간 사이에 다양한 스토리텔링들이 들어감으로써 생기는 뉘앙스는 작가가 명명한 언어유희이자 여백을 상징한다. <고흐는 때때로 반갑다고 거짓말을 한다>와 같은 표현들은 작가의 문학적 서사와 서명이 작품을 완성하는 정점임을 암시한다. 리얼리티와 유머가 만났을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삶은 다양한 시선으로 평면을 가로지를 때 비로소 진실이 된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의 구체적인 분석 속에 언어와 일치가 된 ‘이미지 텔링’이 녹아든다. 직관적으로 고른 이미지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캔버스에 스토리가 더해진다. 건조 속도가 빨라 쉽게 다루던 아크릴물감은 이미지텔링이 깊어질수록 자연스레 유화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첫 전시 《시네마 파라다이스》가 영화를 섞어낸 스토리텔링이었다면, 두 번째 전시 《Again》은 평면적 언어들 사이에 즉흥적 유머를 더해 “어떻게 하면 더 생뚱맞게 표현할 것인가”를 담아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고민들을 진일보하여 새로운 시리즈의 신작들로 구성했다. 특히 <나는 얼굴이 긴 사람으로 남겨지겠지>라는 작가의 자화상은 마그리트처럼 화면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같은 비율로 새를 구성했다. 어린 시절 별명이 ‘말’인 것처럼, 얼굴이 긴 자신을 희화화시켜 사인도 ‘UMAKUN(일본어로 말군)’이라고 달았다. 자화상에서 시작된 <비둘기 시리즈>는 다양한 대중적 캐릭터 속에서 다면(多面)의 현대인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확장중 이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널 안아줄 텐데>에는 보테로의 작품 속 인물들이 현실 인물처럼 등장한다. 작은 차에 무리하게 올라타려는 우리네 욕망이 안타깝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누가 나를 이 높은 곳에 올라오게 만들었을까?>는 산업화 시대 노동자의 현실을 ‘소년의 아슬아슬한 행동’ 속에서 조망한다. <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 속 붉은 옷의 여인은 현실과 그림 속 풍경 사이 어디에도 맘을 두지 못한 채 화면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사라진 건 넌데 내가 없어진 것 같아>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사이의 관계를 피카소와 게르니카로 풀어낸다. 작가는 피카소의 선택을 유보한 채 관계의 아이러니 그 자체를 그린다. 그 밖에 <이럴 거면 하지 말았어야지>,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마요>, <자전거에 올려놓은 가방은 무슨 죄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네> 등의 작품들은 언어와 이미지가 환유(幻喩; 상호깨우치는)하는 감각 콜라주로 기능한다.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마요_200x90cm_oil on canvas_2022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작가는 재현의 시작을 ‘그리는 행위의 재해석’으로 설정한다. 박종화는 “왜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미지를 찾고 조합하는 퍼즐 맞추기 같은 작업이 재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색을 취합하는 것은 화면과 타협하는 행위이자 한 장면 안에서의 어우러짐을 위한 창작의 필터링과 만나는 것이다. 초창기 작업들은 포토샵을 통해 베이스를 어두운 색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화폭에서 논다는 ‘플레이 페인팅(Play Painting)’의 개념을 정립한 이후, 이미지를 조합하는 과정은 게임 한 판을 즐기듯 ‘장면 캡쳐’를 통한 미장센을 연출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작가는 영화 보는 것을 즐긴다. 시간 떼우기로 시작했던 영화장면들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면서 구상은 놀이가 되고, 표현은 손의 감각에 의한 창작이 된 것이다. 작품 안에는 유명 작가들이 개입되는데, 이들의 공간은 현실 공간과 절대로 섞이지 않는다. 여러 장면들이 감각적으로 콜라주되면서도 시간 단위로 분절되는 화면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보듯 한 화면 속에서도 여러 세계를 설정하는 묘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질적 캐릭터를 섞어 ‘혼재성 사이의 묘한 질서를 창출’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각 경험이 모두 같지 않다는 본질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유머러스한 상황들을 낯설게 뒤흔드는 독특한 감각은 뒤샹·고흐·달리·워홀·마그리트 등으로 이어지는 초현실성을 강조한 화가들의 정신과도 닿아 있다.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들은 풍자적 감각 위에 ‘시각적 진실(시간의 깊이)’을 던지는 방식으로 질문이 질문을 만드는 ‘재현의 알레고리’와 만나게 한다. 시간을 중첩 시킨 까닭에 명화·영화·화가의 오마주가 섞인 직관적 스토리텔링은 내용에 있어서는 본질을 표현하되, 형식에 있어서는 오마주한 작가를 향해가는 일점투시의 방식으로 요약된다. 시간의 층차에 따른 화면 구성법은 모던 아트가 놓으려고 했던 재현의 본질을 쫓되, 감각 콜라주를 통한 표현주의를 구현하기에 ‘구상표현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나는 유쾌하고 싶다. 우리는 나이가 들고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지면서 웃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달콤하지만은 않지만, 나는 내 그림을 통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담긴 달콤함을 보여주는 전달자이고 싶다.” - 작가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