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중대면 덕곡리 텃골마을이다.말하는 명당의 전형을 갖춘 곳이다.
죄청룡과 우백호가 아주 실하다.동쪽 날과 서쪽 날이 힘차 감싸 안아고 있다.
그것도 네겹으로 기(氣)를 감싸는 속기(束氣)의 힘이 또한 대단하다.
"참 편안하고 편하게 안아주는 텃골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일행들은 유난히 포근하고 편안케 해주는 텃골을 격찬한다.
“광주(廣州)의 덕곡(德谷)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숲이 우거진 데다 산의 물이 빙빙 휘감고 돌아 흘러서 은자(隱者)가
터를 잡아 거처할 만한 곳이다. 더욱이 그곳에는 선대(先代)부터 가꾸고 기른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무성한 땅이 있었다."
-순암 안정복의 제자 황덕길의 <순암선생행장>에서-
이 덕골마을 텃골은 지난 600년동안 광주 안씨의 세거지(世居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새로 찾은 자리는 판서 이상 인물은 안 나오고, 천석군도 나오지 않는 자리이고, 나라가 망하면 가문이 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리는 좋습니다."
조선 초 무학대사 태종의 어명으로 이곳 텃골을 광주 안씨의 사간공 안성에게 명당길지로 잡아주면서 남긴 말이다.
1736년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나이 25세에 텃골에 돌아온다.
안정복은 ‘순암(順庵)’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순암이라고 불리는 집은 규모가 8칸이 되는 ‘엄(菴)’자형의 가옥이었다.
또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고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텃골마을을 뒤에서 튼튼하게 보호하여 주는 주산 영장산(靈長山)이다.
그 영장산의 생기(生氣)를 집안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주인의 마음을 담은 영장문이다.
그의 강학원 이택재(麗澤齋)이다.
'이택(麗澤')은 '역경(易經)'의 '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인접한 두 연못의 물이 물기(水分)를 유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벗들이 서로 도와
학문과 덕행을 닦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이택재는 안정복이 지은 서재 건물로 학문 연마와 제자들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과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
"선생은 마침내 그 땅에 복거(卜居)할 뜻을 정하고 조그마하게 집을 세웠다. 집은 ‘암(菴)’자 형상으로 지었고
‘순암(順菴)’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무릇 ‘천하의 일은 오직 순리(順理)일 뿐이다’는 뜻을 취해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옛사람의 학문하는 뜻에 따라 온 힘을 쏟았다.” -황덕길의 <순암선생행장>에서-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방술학보다는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어『성리대전』과 『심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인간의 윤리 도덕과 사회참여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그가 왜 광주로 환향한 것을 계기로 학문적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광주 환향 후, 안정복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광주로 온지 1년 후인 26세에는 중국의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도통도(道統圖)』를 지었다.
27세에는 뒷날『임관정요(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치현보(治縣譜)』와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鄕社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29세에는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하학지남(下學持南)』상·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그가 온 정렬을 기울였던 저술이다.
그리고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정전설(井田說)』에 대해 썼다. 30세에는 주자의 글을 모방한『내범(內範)』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광주 지역 근처에 사는 실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33세에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증손으로부터『반계수록(磻溪隧錄)』을 입수해서 읽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반계연보』를 짓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현실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정복은 35세에 자신의 학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안산 첨성촌에 살고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익과의 만남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익의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진지하게 하였다.
윤동규(尹東奎)·이병휴(李秉休)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權哲身)·이기양(李基讓)·이가환(李家煥)·
황덕일(黃德壹)·황덕길(黃德吉)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특히 안정복의 대표 저술인『동사강목(東史綱目)』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어린 시절이 아닌 30대 중반에 어느 정도 학문과 사상 체계를 이룬 뒤였기 때문에 이익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은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을 계승한 실학의 대가다.
관직에서 은퇴하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그는 <동사강목>에서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그는 '민심을 읽고 백성을 잘 살게 하고 실정에 맞는 토지제도와 지방자치안을 실천하는 것'이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런 그의 실학적 목민사상을 〈임관정요〉로 정리했다. 이 책은 나중에 〈목민심서〉의 바탕이 됐다.
순암의 8대손 안용환씨는 "실학의 3대 거두,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암의 <임관정요>가 아니었으면, 다산의 <목민심서>가 나올 수 있었을 지 없었을 지 모를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을 3대조(祖)로 하는 조선 실학이다.
성호 이익의 직계 수제자 순암 이정복이다.
성호 이익 후학에서 조선의 천주교를 이끌킨 중심인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다.
순암 안정복은 성리학이나 실학외에도 도교와 장 사상까지도 두루 수용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만큼은 이단사상(異端思想)으로 간주하여 배척에 앞장섰다.
양반과 상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들먹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 그가 천주교를 비난하는 이유였다.
천주교의 전파가 평민과 노비 외에도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전파되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그는 1785년《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 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그는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 비판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이 천주교에 호의를 보이자
이들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천주교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양반 상민의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실학사상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만큼은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벽파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영장산 자락에 병풍처럼 오붓하게 들어선 텃골에도 변화의 바람은 거세다.
굴다리 앞의 '중대1동 텃골'이란 푯말 주변에서 그 단초가 드러난다.
인근의 대형 물류창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 스튜디오, 그리고 중소공장도 부지기수이다.
여기에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로또복권을 사는 일까지도 흔한 풍경이다.
마을 안쪽으로 가다 보면 ○○빌라, △△주택 등 5층 안팎 규모의 건축공사는 항시 진행형이다.
안씨 묘역 위쪽까지 쭉 이어진 다양한 규모의 전원주택도 꼬리를 물고 건립되고 있다.
그만큼 이곳이 지리적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택재에서 영장산쪽으로 좀 올라가다 보면 빌라촌을 만난다.
이 빌라군(群)이 들어선 곳이 순암 안정복이 텃골에 들어와 살던 생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