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3) - 동학농민항쟁
1. 1894년 정읍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항쟁은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하게 불타올랐던 민중의 저항이자 새로운 세계를 위한 실험의 시간이었다. 신분차별을 철폐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의 정신을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을 위협하던 서양과 일본의 침략적 움직임에 맞섰던 조선의 자주적인 투쟁이었다. 어떤 민중의 투쟁보다도 가장 광범위하고 집약적이었으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특별한 정치사회적 실험이 진행된 특별한 운동이었다. 1894년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3대 사건이 중첩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어쩌면 동학항쟁은 그러한 변화를 촉발시켰고 변화를 추진했지만 결국은 쓰러져야 했던 민중의 슬프지만 찬란한 운명이 폭발하였던 순간이었다.
2. 동학항쟁은 1894년 1년의 시간 전개 속에서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우선 그 진행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1월 정읍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 특히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은 전봉준의 주도로 봉기를 일으켜 관아를 점령한다. 이에 놀란 조정은 새로운 군수를 파견하고 주민들을 위무하려고 시도하지만 같이 파견된 이용태는 오히려 봉기의 가담자를 색출하고 또 다른 착취를 강행함으로써 봉기의 양상은 확산된다. 전봉준은 3월 고창의 무장으로 이동하여 그곳의 동학지도자 손화중 및 김개남과 협력하여 다시 봉기하였고 특히 부안의 백산에서 본격적인 군사적 행동을 시작한다.
3. 정부는 초토사로 홍계훈을 임명하고 경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은 정부군에게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승리한 동학군은 기세를 몰아 전주성에 입성한다. 조정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봉기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과 이용태 그리고 전주감사 김문현을 파직하고 새로운 전주감사 김학진을 파견한다. 김학진은 전봉준과의 협상을 통해 6월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이때 민씨척족세력은 동학항쟁의 기세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하여 청군의 청병을 요청한다. 청군은 아산만을 통해 입국하고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출병을 알렸으며, 일본 또한 인천을 통해 군대를 파견한다. 청병 요청에는 대부분의 대신들이 전쟁의 확산을 꺼려 반대했지만, 민씨척족세력은 은밀하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4. 전주화약을 통해 동학항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간행정조직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지방행정기관과 협조하여 행정을 운영하는 새로운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조직은 집강소를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집강소의 운영규칙이면서 정부에게 요구하는 ‘폐정12개항’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정부와의 협력, 탐관오리 및 횡포한 부호와 유림에 대한 징습, 신분차별 철폐, 외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표명했을 뿐 아니라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할 것’이라는 급진적인 정책제안도 담겨있었다. 동학의 요구와 때를 같이하여 정부에서도 새로운 국가적 실험이 시작되었다. 7월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이라는 근대국가의 청사진이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는 신분차별을 철폐하고 과거제를 없애며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행할 것이라는 선언이 담겨 있었다.
5. 정부의 개혁은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자발적인 성격보다는 일본에 의해 진행된 성격이 강하다. 일본은 동학군 퇴치를 명분으로 파견한 군대를 이용하여 7월 경복궁을 점령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유길준과 같은 개화파를 이용하여 조선의 정치체제를 변화시키려 압박했던 것이다. 또한 오랜 준비를 통해 일본은 대륙 침략의 토대를 위해 청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1894년 7월은 이렇게 조선의 치욕적인 경복궁 점령과 그에 이은 갑오개혁 그리고 청일전쟁이 동학항쟁의 와중에 동시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6. 동학의 집강소 설치는 신분과 관계없이 서로를 ‘접장’으로 부르는 평등의 정신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투명하고 공정한 행정절차를 위하여 민간기구가 감시하는 특별한 실험이었다. 하지만 집강소 실험은 계급투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분철폐가 이루어지자 하층계급들의 양반이나 상층계급에 대한 사적 복수가 자행되었고 때론 잔인한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하극상의 폭풍은 동학군의 2차 봉기 때 양반을 비롯한 반민중세력들이 ‘민보군’을 만들어 동학군을 공격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동학 세력의 내분도 주목할만하다. 동학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북접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접으로 분리되었고, 종교성을 중시한 북접에 비하여 남접은 훨씬 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북접의 지도자인 최시형은 수시로 남접의 지도자들에게 봉기중단을 촉구하였고 항쟁의 확산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7. 일본과 청과의 전쟁은 한반도를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일군과 청군은 양민들의 물자를 약탈하였을 뿐 아니라 전쟁의 피해는 곳곳에서 심각하게 발생한 것이다. 이에 동학군은 다시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고 10월 삼례에서 재봉기하였다. 외국의 침략으로 위태로운 조선의 운명을 극복하자는 우국충정의 재봉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맞는다. 패배의 원인은 우선 화력의 차이였다. 병력에서는 일본군과 정부군을 압도하였지만 일본의 신식총은 일당백의 위력으로 동학군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학자들은 동학군 지도자들의 전략적 부재가 패배를 가져왔다고 보기도 한다. 우금치는 방어에는 적당한 지역이지만 공격에는 위험한 지역임에도 무리하게 공격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는 동학세력을 와해시켰다. 그 후 몇 차례의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지만 동학군의 궤멸은 불가피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도주하였지만 그에 가장 가까운 제자나 친지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결국 처형되었다. 정말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액션드라마를 보는 듯한 사건 전개였다. 1월에 봉기한 동학항쟁은 12월이 되기도 전에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진행된 동학교도에 대한 처벌은 끔직한 학살극이었다. 대략 20 -30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된다.
8. 동학농민항쟁은 오랫동안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동학란’으로 불리며 동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손은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동학항쟁을 5.16혁명과 10월 유신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칭송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기조는 5공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동학항쟁이 정부에 의해 긍정적으로 인정되자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동학란에서 동학운동 그리고 동학혁명이나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변모되었다. 이런 이름의 변화는 동학항쟁이 근대적이고 민중적이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강력한 개혁정신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칭송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동학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혁적인 민중운동으로 인정되었고 중심인물인 전봉준은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9. 그 후 ‘동학항쟁’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학적 논쟁이 진행되었다. 동학항쟁의 ‘혁명성’을 강조하는 흐름에 반대하는 보수적 학자들은 동학항쟁의 1차봉기를 “만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복귀시켜 복고적인 개혁정치를 펴도록”하는 것에 있었고 2차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내기 위한 항일의병운동”이라고 보면서 ‘혁명성’보다는 복고적·보수적 민중운동으로 평가하였다. 동학항쟁의 창의문이 왕조체제를 인정하고 유교적 질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또한 대원군과의 밀착관계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을 들어 동학항쟁의 근대화적 성격 및 혁명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전봉준 또한 대원군과의 관계에서 대원군의 권력욕에 이용당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전봉준을 평가하면서 동학항쟁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것을 강조한다. “전봉준은 대원군의 정치적 야욕에 따른 농민군 동원 의도와 달리, 폐정을 개혁하고 외세를 배척해 보국안민을 달성하기 위해 농민군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고자 다양한 계층과의 연합을 도모했다. 전봉준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훼손하는 ‘농민군이 대원군의 이용대상이었다.’는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10. 동학항쟁에 관한 논쟁은 동학의 중요성이 재검토되자 다른 방향에서 점화되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려 하자, 각 자치정부에서 다른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정읍에서는 고부에서 봉기했고 황토현 승리라는 역사적인 현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부 봉기일인 1월을 ‘기념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고창에서는 동학항쟁의 실질적 봉기는 전봉준이 무장으로 피신하여 손화중과 김개남과 협력하여 시작한 ‘무장기포(봉기)’라고 주장하면서 3월을 기념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부안 지역에서도 ‘백산봉기’를 중요성을 내세우면서 ‘동학’과 관련된 각 지역이 자신들의 지역적 중요성을 경쟁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11. ‘동학항쟁’에 관한 논쟁은 오랜 토론과 논쟁을 통해 현재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논쟁은 어떤 세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따라 새롭게 촉발될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세력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본다면, 치열하게 조국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후대의 이념적 편가름 속에서 다르게 수용되고 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은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직시하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나선 투사들은 그들의 사상과 관계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해방 이후의 조국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은 당시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처럼 ‘동학항쟁’의 의미 또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그들이 지녔던 인간과 사회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동학항쟁의 의미는 인간이 서로에 대한 차별없이 진정한 평등의 세계를 꿈꿨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불합리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개혁의 정신이었다.
첫댓글 - 역사의 해석에 따른 극명한 입장 차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금, 나라가 앞장서서 사기를 치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철부지 희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