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광장과 진남관(성웅 이순신장군의 동상 건립기)1
여수는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자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영민들이 이순신장군을 도와 왜군을 물리친 구국의 성지이다.1967년 박대통령과 국민
들이 뜻을 모아 자산공원에 동상을 건립한바가 있다.그후 2006년 이순신광장 조성사업
을 시작해 2010년 3월27일 개장했다.임진년(1592년)5월3일은 왜적을 무찌르기위해 여수
앞바다에서 출정식을 가졌던 역사적인 날로 매년 여수거북선축제가 열린다.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개막을 앞두고 민족의 태양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이순신 광장의 거북선2

충무공찬가(손재형 쓰고 이은상지음)3
충무공 오! 충무공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여 지금 우리 눈 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거북선 거느리고 호령하는 그의 위풍 일생을 정의에 살던 그이시다.내동포 살리려고 피를 뿌리
신 그이시다.그날 땅과 하늘을 울리시던 그의 맹서 저산 저 바다에 그대로 서려있다.
외치는 저 목소리를 따라가자 갈 길은 오직하나 저기 우리를 이끄신다.
충무공 오! 충무공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여(손재형님이 쓰고 이은상님이 지으셨다)

이순신 광장4

오동도(동백열차.유람선)선착장5

오동도 정문(서방파제)6

오동도(봉황)7

한국의 아름다운 길 오동도8
오동도에는 2개의 전설이 전해진다.고려말 오동도에 오동열매를 따먹으러 날아든
봉황을 본 신돈이 오동도에 있는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내게하여 봉황이 나타나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아리따운 한 여인이 도적 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정성껏 무덤을
해주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해 겨울부터 하얀 눈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
나고 푸른정절을 상징하는 신우대가 돋아났다.그러므로 동백꽃을 여심화로 부른다.

고려시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여인9

梧桐島 閑麗海上國立公園(사인보드)10

오동도(사인보드)11
이른아침 오동도 둘레길을 걸어야 되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좌측으로 음악분수(240m).동백열차(320m).맨발공원(420m).우측으로 용굴(420m)
등대(590m)를 오르면서 구경을 한다.서방파제로 들어가서 맨발공원으로 나온다.

오동도(동백나무와 데크)12

오동도 풍경(오동도 등대)13

오동도 앞바다 풍경(종합상가.부잔교)14

도심순환버스.엠블호텔 인증샷15
주간코스-엑스포역 출발(10시30분.11시30분.12시30분.2시30분.3시30분.4시30분.5시30분)
7회 14.2km를 운영한다.코스는 엑스코.아쿠아플라넷.케이블카주차타워.오동도.엠블호텔
하멜전시관.이순신광장.여객선터미널.돌산공원입구.엑스포역을 운영한다(어른5000원)
야간코스는 하계7시30분에서 10시.동계12월에서 2월(7시에서 9시30분)-여수 엑스포역
돌산공원입구.예울마루.국동어항단지.선소.소호요트장.여문문화의거리.여수시청.교동
시장.이순신광장.엑스포역으로진행된다.

진남관(統制門을 오르는 일행)16

진남관(統制門)17

진남관(望海樓)18

진남관(매영성)(사인보드)19
1진남관 2통제문 3진남관 임란유물 전시관 4비석군 5망해루 6매표소 7안내판 8관리사무실 화장실 9협문 10주차장

공사중인 진남관20
전라좌수영은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성종10년(1479년)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고종32년(1895년)에 없앴다.현재 원형을 거의 잃고 진남관만 남아있다.조선후기 기록에는
건물80여동.민가2024호.우물9곳.연못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봄에는 매화가 만발해 梅營城이라고 불렀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이순신장군이 임란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해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선조26(1593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선조34년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진남관(국304호)21
진남관은 임란 때 이순신의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여수지역에서
목조를 조달하여 건축하였으며 정면15칸.측면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층목조건물로는 가장크다.
선조32년(1599년)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했다.현재의 건물은 숙종42년(1716년)화재로 불탄 것을 숙종44년
(1718년)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이순신전사 120년을 기려 다시 세웠다.1911년 공립보통학교로도 사용되었다.
뜻은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이며 글씨는 이제면이 썼다.진남관 앞의 2개의
돌기둥은 이순신이 수군의 밤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당시에는 4개가 있었다.
임란1년전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전라좌수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출정시킨 곳이다.
선조26년(1593년)8월부터 선조34년(1601년)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다.수군은 옥포.합포
당항포.율포.노령.명량.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7년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공의 공적인 통제이공수군대첩비.공의 눈물의 비석인 타루비.국내
최초의 사당인 충민사.그외 흥국사.송현마을에는 효자인 이순신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若無糊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말을 되새겨본다.

水使 柳光魯 淸德善政碑(좌).水使 崔公浣 撫恤軍卒 淸德碑(중앙).節度使 趙公文顯 淸悳善政碑(우)22
수사 류공광로 청덕선정비는 류광로의 청렴한 덕행과 선정을 기려 철종5년(1854년)에 건립했다.
수사 최공완 무휼군졸 청덕비는 수사 최완의 청덕을 기리는 비로 경종2년(1722년)에 건립했다.
절도사 조공문현 청덕선정비로 고종9년(1872년)에 건립한 철제비석이다.
고소대로 가는 길은 진남관에서 우측 위쪽으로 가면된다.즉 진남관 유물전시관 옆이다(가보지 못함)
이곳에는 統制李公水軍大捷碑(보571호)-(일명 좌수영 대첩비로 이순신장군과 수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으로 크기로는 국내비석으로는 제일크다.1615년 이순신의 부하였던 柳珩이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보내온 좋은 석질로 만들었다.비명칭은 金尙容의 글씨.비문은 오성 李恒福이 짓고
명필 金玄成이 썼다)과
墮淚碑(보1288호)-(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하자 부하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운비문으로
타루는 비석을 바라보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중국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와
東嶺小碣碑-(대첩비 건립경위를 기록한 비문으로 숙종24년(1698년) 기록은 진안현감 沈仁祚가 남김)
가 보존되어 있다.1947년 타루비와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이곳에 복원했다.
고소대는 당시 포루이며,장대로 사용된 장소로 충무공 이순신이 군령을 내리던 곳이다.
이순신 대교(동영상)23
이순신대교는 여수 묘도와 광양 금호동을 연결하는 현수교로 길이가 마치3775m나 된다.
2012년 05월10일 여수박람회 때 임시 개통했고, 정식으로는 2013년 02월08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2017.05.24)
첫댓글 5년전 여수세계박람회 후에도 많이 달라졌구나. 잘 보았네. 웃는얼굴아트센터에서 엑셀연수중
여수의 이순신장군의 최초 사당인 충민사를 보지 못했다네~그곳에는 비석을 바라보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墮淚碑가 있는데, 이번에는 보지 못해서 아까웠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