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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및 일반상식 스크랩 [한현우의 팝 컬처] 문자메시지 言語에 적응하는 법
ginasa 추천 0 조회 27 14.06.13 07: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일보 2014.06.12.목

[한현우의 팝 컬처]

문자메시지 言語에 적응하는 법




전화 걸면 '큰일 났냐' 하고 'ㅋ·ㅠ·^^' 빼고 문자 보내면
'역정 났냐'고 疑心까지 받는 말과 글의 경계 무너진 세상
문자 歪曲과 텍스트 變異를 '그러려니' 받아들이라 하네


한현우 문화부 차장 사진
한현우 문화부 차장

출근길 지하철에서 20대 후반쯤의 여자가 누군가와 문자메시지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 손놀림이 독특해서 자연스레 그 스마트폰 화면에 눈길이 갔다. 메시지는 대략 이런 형태였다. "어제 개그콘서트 봤어?ㅋㅋㅋㅋㅋ", "ㅋㅋㅋㅋ봤지ㅋㅋㅋ", "ㅋㅋㅋ넘 웃기지 않아?ㅋㅋㅋㅋㅋㅋ".

사실 이보다도 키읔의 개수가 훨씬 많았다. 과장하지 않고 문자메시지 한 건에 대략 20~30개의 키읔이 붙어 있었다. 그녀의 손놀림이 독특했던 것은 화면 속 키패드의 특정 키들을 수십번 반복해 터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왼손 엄지는 ㄱ키를 두 번 눌러 ㅋ을 만들었고 이어 오른손 엄지는 띄어쓰기 키를 눌렀다. 그 기계적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도 정확한지 단 한 번도 ㅋ 대신 ㄲ을 입력하거나 불필요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정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ㅋ인 것 같았다.

바야흐로 키읔 전성시대다. 국어사전에서 리을 다음으로 가장 적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키읔이 스마트폰의 탄생과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자음이 됐다. 세종대왕께서도 이것을 예견치 못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대학 1학년인 조카가 나의 대학 시절 사진을 찾아내 이런 문자와 함께 보냈다. '헐 삼촌!!!! 앨범 보다 충격받아서 보내봤어요ㅋㅋㅋㅋ'. 아 참, 키읔과 함께 느낌표와 모음 'ㅠ'도 엄청나게 쓰이고 있다.


뉴욕타임스에서 '전화하지 마세요. 나도 안 할게요(Don't call me. I won't call you.)'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은 것이 이미 3년 전 일이다. 이 신문의 서평(書評) 에디터인 파멜라 폴은 이 칼럼에서 "다들 문자로 대화하는 지금,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밤 10시 이후에 전화 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배웠으나 지금은 '전화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고 가르쳐야 할 지경"이라고 썼다. 문자로 인사하고 축하하고 위로하고 회의하고 보고한다. 아무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전화를 걸 정도라면 정말 무슨 일이 난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문자메시지 언어에 적응하는 게 싫어 ㅋ이나 ㅠ를 쓰지 않았고 느낌표도 남발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용♥♥♥' 또는 '감사합니닷!!!' 같은 문자를 보내면 '네, 팀장님도요' 또는 '네. 감사합니다' 하고 답장하면서 '애들처럼…' 하고 혼잣말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생각을 고쳐먹게 된 것은 어느 날 후배의 문자를 받고 나서였다. 후배가 '형, 이번 주 토요일 ○○○ 공연에 가세요???' 하고 물음표가 낭비된 문자를 보냈다. 짧게 '아니'라고 답했는데 후배는 잠시 후에 '형, 화나셨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 왜?' '그냥… 화나신 줄 알고ㅠㅠ' '아냐. 무슨 소리야?' '그거 봐요. 화나셨잖아요ㅠㅠㅠ'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그러니까 전화를 걸라고, 전화를!). 나중에 후배를 만났을 때 그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ㅋ이나 ㅠ, 느낌표와 물음표, ^^을 쓰라고.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그 후로 내가 쓴 문자메시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윗사람이 '그럼 이따 저녁때 보자구^^'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하고 답장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지난번 모임에 못 나가서 미안~' 같은 문자에 '괜찮아'라고 답하면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그 기의(記意)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기표(記標)가 무례해 보였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통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소쉬르가 주장한 언어의 기호체계로 해석을 시도해 보면 ㅠㅠ의 기의는 '불행하게도' '미안하지만' '부득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ㅋㅋ은 의성어 '킥킥'의 약자라기보다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어떤 악의(惡意)도 품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느낌표는 감탄부호가 아니라 마침표의 모바일 확장 형태로 해석해야 옳다.

후배의 충고를 들은 뒤로 고집을 꺾었다. 몇 가지 문자메시지 언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화났느냐' 같은 오해를 사지 않게 됐다. 이를테면 '네' 대신 '넵'이라고 쓰면 상대방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그 모양도 나쁘지 않았다. '아닙니다' 뒤에 ^^을 붙이는 것만으로 '무슨 문제 있나?' 같은 반응을 면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초급 단계를 넘어 ㅠㅠ나 ㅋㅋ 같은 기호(모음 또는 자음이 아니라)를 쓰게 됐다. 느낌표를 쓸 때도 두 개 이상 사용했다. 이왕 감탄부호로 쓰지 않는 김에 후하게 쓰는 거다. 오늘 조카가 보낸 문자에도 ㅠㅠ와 ㅋㅋ, !!을 섞은 답장을 보냈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처지에서 문자의 왜곡과 텍스트의 변이(變異)는 반갑지 않은 일이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출판물은 물론 신문 역시 그 유행을 가장 나중에 좇아야 한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문자메시지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대화나 통화를 대신하는 유사 구두(口頭)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자메시지가 글이 아니고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우리는 그렇게 글과 말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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