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만 해도 70까지만 살아도 사람들은 망자를 가르켜 호상이라 했다.
상여도 화려하게 만들어 상주를 꽃 상여에 태우고 조문객들은 그 뒤를 따르며 망자를 가뿐한 마음으로 보내 드렸다.
그 보다 10년을 더 살고보니 건강도 활동력도 예전 만 못함을 느끼게 된다.
그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요즘 유행되는 well-dying이다.
그 말의 시작은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생긴 말이다.
그러나 인간 수명이 늘다 보니 잘 살다 잘 가는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 속 뜻은 물리적인 죽음이라기 보다 영적 의미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 된다.
100세 시대라지만 장수 인구가 많은 일본의 사례도 48/100000 즉 100세를 넘긴 사람은10만명 중 48명뿐이다
나이 80이 되니 그러기에 죽음이란 단어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결국 하루 하루를 장담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준비도 없이 갑작기 그런일이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종교적인 문제는 각각 그 믿는 대상도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결국 사후 세계로 귀결 된다.
잘 죽는 길은 그리로 가는 티켓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 준비없이 어느 부인처럼 치매라도 걸려 복음을 접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다면 난감한 일이 아닌가?
유교 사상에 찌든 시절
지금으로부터 90 년 전 선친께서는 내가 태어난 고향에 예배당을 세우셨다.
말이 예배당이지 전기도 없는 깡촌 시골 외딴 고갯길에 의자도 없는 마루 바닥에 그나마 겨우 기와 지붕 정도였다.
6.25 직전
우리 집에 2~30명이니 되는 고아들이 갑작기 몰려 왔다.영문도 모르고 나는 고아들과 거의 2년을 함께 먹고 자며 자랐다. 철이 들고 나서 그때 그 고아들이 누구였나며 알고 싶었으나 마땅히 누구 한테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모시며 장가 안 간 삼촌 2명과 우리 8남매를 합치면 13명 식솔이 있었기에 무엇을 믿고 선친께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더구나 강직하시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결단을 말 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궁금하다.
그 휴유증으로 초등학교 6년을 수석으로 졸업한 셋째 형은 지척에 있는 중학교 조차 두어 달 다니다가 중도 포기해야 만 했다. 당시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찿아와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결국 학교를 그만 둘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아내에게 당신이 어머니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냐며 물을 때가 있었다.
아내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아니라고....
내 나이 70 중반에서야 그 고아들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터지고 그때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는 사실과 또
광주 방림동에 있는 동광원이란 자생 단체에서 그 일을 감당 했음을 알았다.
지금은 사회 복지 기관(귀일원)으로 우뚝 .설립자(이현필 )유지에 따라 모범 복지 기관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등이 휘도록 죽어라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
맨발의 성자로 일컫는 동광원을 세우신 이현필 선생님 뜻을 순종으로 받아드린 아버님께도....
돌아 가진지 어언 30여년
믿음안에서 천국으로 가셨을 부모님의 소천이 요즘 말로 well-dying의 표상이 아닐까?
자식으로써 조심스럽게 부모님의 영생복락을 기원해 본다.
ps
이현필 선생 일대기
책명 : 맨발의 성자
저자 : 엄두섭 목사
* 이미 3~40년전 발간된 책이라 서점 구입은 거의 불가능으로 판단 됨
올 여름 살인 더위를 이겨낸 그 용기와 건강으로 영혼까지도 well- being에서 well-dying까지 주님의 사랑이 넘쳐 나소서.. 아멘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wDWHwgo_KLY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