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명산,
덕태산과 선각산을 함께 넘다
1. 일자: 2019. 12. 28 (토)
2. 산: 덕태산(1118m), 선각산(1142m)
3. 행로와 시간
[노루목재(10:33) ~ 점진폭포(10:48)
~ (긴 된비알) ~ (805봉) ~ 덕태산(11:51) ~ 헬기장(12:01) ~ (1132봉) ~ 시루봉(12:37) ~ 홍두깨재(13:01), 삿갓봉 2.18km) ~ (식사, 긴 오르막) ~ 961봉/전망바위(14:02) ~ 삿갓봉(14:27) ~ (갓거리봉) ~ 선각산(15:10) ~ 한밭재/임도(15:43) ~ 점전폭포(16:20) ~ 노루목재(16:30) / 13.88km]
< 덕태산, 선각산 산행을 준비하며 >
다시 먼 산을 가려 마음 먹었다. 온라인산악회에 올라온‘진안
덕태산, 선각산 눈꽃’이란 글귀에 눈이 꽂힌다. 꽤 오래 정보를 검색한 끝에 신청을 한다. 여름과 겨울 근교에서
놀았으니,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멀고 높은 산을 선택한다.
오늘 오를 길은 진안의 알려지지 않은
1,000m대 7개 봉우리를 넘나드는 원점회귀 12km 코스다. 투구봉, 중선각, 선각산, 갓거리봉, 삿갓봉, 시루봉, 덕태산까지 1,000m대 봉우리를 오르내린다. 봉우리 사이에 표고차 100~200m 정도의 오르내림은 이어지지만, 들머리에서 덕태산까지만
올려 치면 주능선부터는 수월한 편이라 한다. 위안이 된다.
덕태산은 장수 땅
선각산과 어깨를 나란히 솟아 있으며, 진안 고원의 중추를 이룬다. 특히
남쪽 기슭에는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있어 의미가 큰 산이다. 덕태산과 선작산 사이에는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울창한 숲과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백운동 계곡이 있다. 두 산 정상에 서면 지리산, 남덕유산, 마이산의 두 말귀가 내동산, 고덕산 등 사방 광활한 신천지를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확 트이는 후련함을 느끼게 해준다 한다. 조망이 좋다는 말이다.
산길은 시계방향으로 덕태산, 시루봉, 삿갓봉, 선각산, 점전폭포로 이어지는 원점회귀 코스다. 가야 할 길을 삼등분 해 본다. 백운농원~덕태산, 약 2.5km 거리지만 비고 500미터를 치고 올라야 해 90분을 예상한다. 덕태산~선각산 3시간, 선각산~백운농원 2시간을 예상한다. 들머리 고도가 500미터
후반인 점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 희망사항 >
이번 산행의
바램은 흰 눈 풍성한 겨울 설경과 진안고원에서 굽어보는 광활한 눈 맛으로 요약된다. 몇 년 째 겨울에
눈다운 눈 구경을 못했다. 드넓은 고원 평원에서 굽이치는 겨울 산의 골격미를 바라보면 왠지 가슴이 뻥
뚫릴 것 같다.
코스를 정하는 데 있어서 한 몫을 한 건, 인근에 월간 산 선정 100대 명산에 오른 천상데미산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이한 이름으로 기억에 간직된 산과의 인연이 기대된다. 비록 산정에는 내 발로 오르지 못하겠지만 먼 발치로 조망은 가능할 게다. 훗날을 위한 눈도장을 찍고 오고 싶다. 아름다운 섬진강은 바로 천상데미 데미샘이 발원지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읽어보니, 선각산과 덕태산을 한 바퀴 도는 데는 14km에 8시간 정도 걸린다. 산악회에서 제시하는 12km, 6시간보다 길고 멀다. 눈 쌓인 겨울인 점을 감안하면, 소요시간이 걱정된다. 두 산을 모두 넘으면 물론 좋겠지만 몸에 무리가
가면 홍두깨재 어름에서 길을 꺾어 임도로 하산하는 대안도 염두에 둔다.
카페에
올라온, 굽이치는 산을 가로질러 광활하게 펼쳐진 설경이 참 매력적이다.
그 감동이 내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 진안 가는 길에
>
세모, 동지가
지나 한겨울로 들어선다. 차가워진 날씨가 싫지 않다. 과천에서
버스를 갈아 타며 본 과천 추사의 글씨에서 세한도를 그려본다. 초라한 초가와 노송 그리고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글귀, 이 계절의 정취를 잘 대표해 준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낡은 버스에 오른다. 쾨쾨한 냄새에 이내 적응이 된다. 옆 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 노루목재 ~ 덕태산 >
구불거리는 고개를 한참 올라서 노루목재에서
버스가 멈춘다. 주위를 둘러 본다. 눈 없는 겨울 산이 말
없이 내려다 보며 인사한다. 10시 35분, 산행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스한 한겨울, 계곡을 따라 펜션들이 줄지어 들어선 도로를 따라 15분쯤 오르자
점진폭포에 이른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는 덕태산으로
향하는 긴 오름을 시작한다.
잠시의 평지도 허락하지 않는 진득한 된비알이
805봉까지 이어진다. 고작 비고 200미터를 치고 오르는데 벌써 지친다. 시작 고도가 높다는 건 산이
높다는 걸 알리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산에서의 본 게임은 항상 치열하다. 된비알은1000고지 넘게까지 길게 이어진다. 땅만 바라보고 걷는다. 간간이 열리는 하늘 저편으로 가야 할 선각산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거친 돌 비탈이 끝 없이 이어진다. 덕태산만
오르면 나아지겠지….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다.
정상에 인근에 이르자 길가에 눈이 보인다. 살포시 내려 앉은 모습이 신설이다. 밤새 눈발이 내렸나 보다. 산죽이 호위하는 능선을 따라 또 한번 긴 오름을 치고 오르자
첫 봉우리 덕태산에 닿는다. 먼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광활하다는
느낌이 확 온다. 미세먼지가 남아서인지 선명하진 못하다. 저
멀리 금호남정맥의 장수 팔공산이 아스라하다.
< 덕태산 ~ 삿갓봉 >
작은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고는
이내 깃대봉으로 향한다. 조릿대 위로 눈이 녹아 내린다. 조금
더 일찍 올랐으며 상고대를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겨울 햇살에 길에 내려 앉는다. 눈 부시다. 새로 내린 눈을 밟으며 평탄한 능선 위를 초록을 느끼며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희고 푸르고 또 푸른 색의 화려한 조화가 놀랍다.
확 트인 능선에서의 풍광이 시원하다. 가야
할 봉우리들이 줄지어 눈에 들어온다. 깃대봉 정상에 서 있는 앞서 간 일행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깃대봉 정상에서의 풍경은 덕태산보다 더 낫다. 천상데미산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순하게 흐르는 능선의 고운 선이 참 인상적이다. 바위
난간 위에 서 본다. 산으로 둘러 쌓인 공간에 내가 주인인 냥 사방을 굽어본다.
홍두깨재로 내려서는 가파른 비탈이 꽤 길게
이어진다. 애써 오른 고도를 너무 쉽게 까먹어 버린다.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홍두깨재 우측으로 임도로 이어지는 탈출로가 보인다. 유혹에 흔들릴까 슬쩍 눈길만 주고 쉼 없이 삿갓봉으로 향하는 능선에 올라탄다.
길가 벤치에서 식사를 한다. 초라한 음식이건만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오름이 예상 외로 길다. 코스 안내 시 대장이 이 구간이 제일 힘들다 한 말이 생각났다. 트랭글에서
받은 고도표 상으로는 비고가 채 200미터가 안 되어 보였는데 진득한 비탈에 심신이 지켜간다. 여기다 하고 애써 오르고 나면 저 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961봉에 힘겹게 올라선다. 바위 위에 오른
이가 경치가 죽여준다면 올라와 보라 한다. 동참한다. 사실이었다. 확 트인 조망에 조금 전까지의 힘겨움이 날아간다. 산이 굽이친다는
말이 실감난다. 무주, 진안, 장수 소위 무진장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 최고의 풍광이다.
전망바위를 지나도 갈 길은 멀었다. 바라보는 봉우리의 풍경은 삿갓봉이라는 이름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펑퍼짐해
보이지만 산정까지는 꽤 길었다.
어렵게 삿갓봉에 도착한다. 시간과 거리 감각이 무뎌진다. 삿갓봉을 알리는 표지판 위에 바람이 옮겨다 놓은 눈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제
천상데미가 바로 발 밑에 있다. 마치 고운 잔디가 깔린 듯 평탄하게 흐르는 능선의 결이 곱다.
< 삿갓봉 ~ 노루목재 >
선각산으로 향하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겉모습 만으로는 완만하게
흐른다. 풍경의 주인공은 선각산보다는 천상데미산이다. 팔각정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 준다. 선각산 가는 길에 본 덕태산 주변 산세는 너무 완만해 지나온 오름이 진짜였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도 평탄해 보인다.
몸에 남은
에너지가 고갈 될 무렵 선각산 정상에 선다. 커다란 비석이 우뚝 솟아 있다. 저 멀리 마이산의 말귀가 보인다. 풍경은 덕태산보다 한 수 위다. 무엇보다 광활함이 큰 간 데 없다. 은둔의 명산 임에 동의한다.
헬기장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비박할 곳을 찾아 오르는
분과 마주한다. 배낭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난 산을 내려왔다는, 저리 큰 배낭을 멜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다. 마이산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눈 앞에 투구봉으로 향하는 긴 오름이 보이고, 봉우리
뒤로 독진암이 늠름하게 서 있다. 암자인지 알았는데 바위였구나….
눈 덮인 응달은 무척 미끄러웠다.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서야 임도가 이어지는 한밭재에 내려설 수 있었다. 투구봉으로
오를 용기도 힘도 남아 있지 않다. 조금 더 멀더라도 임도 길을 택한다. 백운계곡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 선택에 후회는 없다.
임도 길을 걸으며 산행 후 처음으로 찍은 사진들을
바라본다. 산이 흐른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먼 풍경의 산 골격이 선명하고 다양하다. 걷는 내내 진안 고원이란 말은 실감하지 못했는데 사진으로는 그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점진폭포 위에 다시 걸음을 멈춘다. 부러 폭포가 시작되는 바위 위에도 올라본다. 물 많은 계절 장엄하게
내리 꽂히는 물살을 상상해 본다. 겨울 해가 늬엇늬엇 저물다. 그늘이
짙어진다. 저 앞에 버스가 보인다. 트랭글 종료 버튼을 누른다. 13.88km, 헐 멀다.
< 에필로그 >
무사히 내려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멀고, 높낮이가 심해 힘겨웠다. 눈 많은 때 왔으면 풍경은 더 좋았겠지만, 7시간이 훨씬 넘는 죽음의
산행이었을 게다. 이리 힘들 줄 알았으면 섣불리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는 용기로 이어지고, 막상 당하면 헤쳐 나가기 마련이다. 한 번은 와야 할 곳이라면 오늘이 날씨로는 최적이었다.
힘든 구간임에도 산악회 멤버들은 모두 제시간에
하산했다. 놀랍다. 200명산이나 알려지지 않은
산을 주로 가는 온라인 회원들은 확실히 급이 다른 산꾼인가 보다. 그 속에 내가 끼어 있음에
감사한다.
버스가 출발한다. 아득한 느낌이 참 좋다. 냄새야 금방 익숙해진다. 한 데서 6시간
이상 고되게 보낸 이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다.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자장가 마냥 들린다. 내 눈도 스르르 감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언제부턴가 연말연초가 되어도 해가 바뀌어도, 맘으로 다가오는 시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마,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라진 때부터인가
보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돈의 논리가 겨울 거리의 낭만을 앗아갔다. 양재역 주변은 새벽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린다. 그래도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