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州 투입 공수부대는 鄭雄 사단장, 尹興禎 戰敎司 사령관이 지휘했다』
피의자 신문조서(1995년 4월7일)
성명: 鄭鎬溶(1980년 당시 특전사령관)
광주 최초 투입된 7공수여단 창설
문 피의자가 특전사령관으로 재직한 기간은 어떠한가요.
답 1978년 1월경부터 대구에 있는 50사단장을 맡고 있던 중 1979년 12월13일 특전사령관에 임명되어 1981년 6월경 육군참모차장으로 전보될 때까지 특전사령관 직에 있었습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에 최초로 투입된 7공수여단은 피의자가 창설한 부대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본인이 3사단 부사단장을 맡고 있다가 1974년 8월경 7공수여단 창설준비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0월1일자로 7공수여단을 창설했고, 같은 시기에 盧泰愚 장군이 9공수여단을 창설했습니다.
문 피의자가 광주사태 발생을 처음 안 것이 언제인가요.
답 5월18일경 알았습니다.
문 5월17일 당일에는 공수특전부대가 어떻게 이동했는가요.
답 5월17일 22시30분 육군본부로부터 충정부대 투입명령을 하달받고 1공수여단 4개 대대를 연세大·서강大·홍익大에, 5공수여단 4개 대대를 고려大에,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동국大에, 13공수여단 2개 대대를 성균관大에, 9공수여단 3개 대대를 서울大·중앙大·숭전大에, 7공수여단 4개 대대 가운데 2개 대대를 전남大·조선大에, 1개 대대를 전북大에, 나머지 1개 대대를 충남大에 각 이동시켰고,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육군중앙기동예비부대로서 거여동에 주둔시켜 두고 있었습니다.
문 전주와 대전에는 각 1개 대대를 배치하면서 광주에는 2개 대대를 배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광주에는 대전·전주에 비하여 학교 등 중요시설이 많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광주 현지의 鄭雄 31사단장이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은 당시 軍의 투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누가 軍의 투입을 결정한 것인가요.
답 육군본부와 2군 사령부가 협의하여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7공수여단에서 작성한 전투상보 건의사항 부분에 「공수특전부대의 작전투입은 신중한 고려 후에 결정되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전교사가 발간한 교훈집에는 「외부 작전부대의 투입은 억제할 필요가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5월27일 도청 진압작전 때 공수특전부대원들의 복장을 일반부대의 복장으로 위장한 점 등을 보면 공수특전부대가 시위진압에 투입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이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답 향토사단에는 행정요원을 제외하면 실제 병력이 거의 없어 소요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이동이 간편한 공수특전부대 병력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軍의 투입이 불가피한 경우라 하더라도 국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우선 일반 보병부대를 투입하여 선무와 대화를 통해 해결을 시도해 본 다음 그래도 해결이 안 될 경우 공수특전부대가 투입되는 것이 수순이 아닌가요. 그러한 의미에서 광주에 공수특전부대가 먼저 투입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다음 뒤늦게 20사단을 투입한 것은 앞뒤가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일반 보병부대는 전방사단이 아니고는 병력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계엄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20사단이 서울에 나와 있었습니다만 사단은 이동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부대 가운데 찾다 보니 7공수여단이 들어간 것입니다.
문 11공수여단에 대해서는 피의자가 5월18일 15시30분경 동국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11공수여단 본부를 찾아가 崔雄 여단장에게 광주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5월18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인 14시경 金在明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 본인에게 전화하여 『공수특전부대 1개 여단의 증파가 결정되었는데 어느 여단이 좋겠느냐』고 하여 본인이 『11공수여단이 좋겠다』고 하니까 육본에서 15시경 11공수여단에 대한 수경사의 작전통제를 해제해 주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동국대학교에 가서 崔雄 여단장에게 광주 출동을 명한 것입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에서 시위진압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11공수여단의 증파를 결정한 것은 7공수여단 2개대대로는 시위진압이 불가능하여 추가 병력을 투입한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주는 것으로서 신군부 세력들이 金大中을 체포하면서 그의 고향인 호남지역에서 학생 시위가 민중봉기로 발전하는 것을 봉쇄함과 동시에 집권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의 저항도 가차 없이 분쇄할 의지와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량 살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증파를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답 광주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육군본부에서 2군 사령부와 상의하여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어느 여단을 보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계엄사령부 작전참모부장 金在明 소장은 3공수여단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案을 제시했으나 본인이 11공수여단을 추천했습니다.
『해산과정 보고받은 일 없어』
문 책임지역 지휘관인 鄭雄 31사단장이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은 병력증원을 요청한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 누가 병력 증원을 결정하고 누가 피의자에게 그러한 명령을 하달했는가요.
답 특전사령관은 계엄사령관의 출동명령이 있으면 병력을 출동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부대출동과 관련하여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있고 없고는 육군본부에 문의하거나 본인이 관여할 대상이 아닙니다.
문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공수특전부대와 20사단의 증강투입에 대하여 사전에 상의를 받은 일이 없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사전에 상의가 되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계엄사령관의 결재 없이는 부대이동이 불가능합니다.
문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은 피의자의 건의에 따라 투입이 결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완전히 엉터리 주장입니다. 그것은 군대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명령이므로 본인과 상의할 대상도 아닙니다.
문 피의자가 5월20일 12시경 C-54 수송기를 타고 전북 정읍에 도착한 다음 자동차편으로 광주 전교사로 가서 尹興禎 사령관과 김기석 부사령관을 만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일기 사정으로 정읍에 불시착하여 어느 대대에서 내준 지프차를 타고 광주 전교사로 가서 전교사 간부들을 만났습니다.
문 피의자를 만난 尹興禎 사령관이 『양상이 대단히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런데 오늘 광주기관장들과 대책을 협의해 보니까 광주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더군』이라고 말하자 피의자가 『계엄확대에도 불구하고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계엄군의 확고한 결의를 보임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합니다. 부마사태 때는 기관장들이 한결같이 그 동기야 어떻든 시위를 하는 놈은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 한다고 했는데 광주는 의외군요』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본인이 전교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기관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고 하여 잠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좀 딴판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한 이야기는 본인이 한 것이 아니고,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본인과 尹사령관 둘이 있는 자리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광주 도착 직후 31사단에 배속
문 전교사 간부들을 만나고 崔雄 11공수여단장을 격려한 다음 곧바로 상경하여 周永福 국방부 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全斗煥 보안사령관 등과 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피의자가 『소요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유언비어 때문에 광주시민들의 감정이 아주 악화되어 있다. 계엄군을 조속히 증대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자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서울에도 아직 산발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시했는데 피의자가 『서울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는다. 광주를 그대로 두면 혼란이 굉장해진다. 1여단도 내려 보내겠다』고 말하자 全斗煥 장군이 1여단 대신에 20사단을 내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20사단의 증강투입이 결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구체적인 기억은 없습니다만 周永福 국방부 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全斗煥 보안사령관 등과 함께 만나 대책을 협의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본인이 광주에 갔다 와서 만났다면 李熺性 계엄사령관을 만났을 것인데 그때 1여단이나 20사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일이 절대 없습니다.
문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부대 병력은 누가 지휘를 했는가요.
답 7공수여단 2개대대는 광주에 도착 직후 향토사단인 31사단에 작전 배속되어 鄭雄 31사단장의 지휘를 받고 있다가 35대대는 5월19일 04시부로 11공수여단에 再배속되어 鄭雄 31사단장-崔雄 11공수여단장-7공수여단 35대대로 지휘체계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33대대는 5월21일 04시까지는 鄭雄 31사단장의 작전배속하에 그대로 있다가 5월21일 04시부로 11공수여단에 작전재배속되어 鄭雄 31사단장-崔雄 11공수여단장-7공수여단 33대대로 지휘체계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1·3공수여단은 광주에 도착함과 동시에 31사단의 작전통제에 들어가 鄭雄 31사단장의 작전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5월21일 16시부로 특전사령부 3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31사단에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로 이관되어 전교사 사령관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했습니다. 일단 他부대에 배속되어 작전통제권이 이양되면 원 소속 부대장은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거나 피배속 부대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부대는 광주에 상주하다시피 한 피의자가 실질적으로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미 他부대에 작전배속을 시킨 마당에 본인이 어떻게 지휘를 합니까.
문 피의자는 공수특전부대원과 학생 또는 시민과의 첫 충돌 상황을 알고 있는가요.
답 5월17일 자정을 전후하여 7공수여단 33대대가 전남大를 점령하여 기본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5월18일 09시30분경 전남대생 200여 명이 가방을 들고 교문 앞에 집결하여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는 것을 정문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이던 1개 지대가 출입을 저지하자 학생과 계엄군 간에 시비가 발생하여 33대대장이 학생들 앞에 나가 계엄령에 따른 휴교조치로 학교 출입이 불가능함을 통보하고 귀가할 것을 설득했으나 학생들이 가방 속에 미리 준비해 온 돌을 정문 근무 계엄군에게 투석하면서 『계엄군 철수하라』, 『全斗煥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정문을 향해 쇄도하므로 대대장이 2개 지대를 출동시켜 강제 해산시키자 학생들은 『금남로로 모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흩어진 것이 최초의 충돌로 알고 있습니다.
문 그 때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진압봉과 군화발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이를 말리는 시민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해산 과정에 대해 보고받은 일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교문 앞에서의 위와 같은 충돌이 있기 이전인 5월17일 자정 무렵 7공수여단이 전남大·조선大에 진주하자마자 곧바로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급습하여 마구 때린 후 수십 명을 연행하여 수사기관에 인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학교 점령 명령이 떨어지면 학교를 수색하여 숨어 있는 사람이나 위험물 저장여부 등을 점검합니다. 그러나 전남大나 조선大에서 수색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5월18일 광주 시내에서 공수특전부대가 벌인 초기 진압작전은 정당한 진압이니 과잉진압이니 하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고 하는데 진압 실상에 관하여 어떻게 보고받았는가요.
답 軍과 경찰의 시위진압 방법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인데 평소 경찰이 진압하는 것만 보다가 軍이 진압하는 것을 보고서는 강경 진압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무자비하게 진압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공수특전부대가 과잉진압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일이 없고 또 그 당시 정부나 軍의 관계자로부터 항의나 질책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軍이 안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바람도 있었다
문 당시 목격자들은 처음에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할 때는 시민들이 수수방관했으나 공수특전부대의 시위진압 방법이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니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광주시장이었던 구용상 前 의원은 5월17일까지 학생시위는 시민들의 반응이 냉담할 정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5월18일 각 대학에 계엄군이 들어오면서부터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답 지내놓고 생각해 보면 「광주에는 軍이 안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상황이 악화된 것이지 공수특전부대의 강경진압만이 문제의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때 시위진압에 나선 공수특전부대원들이 시위군중들의 머리·가슴 등 생명에 위험이 따르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난타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원이나 시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물론 눈에 띄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차별 난타함으로써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게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위진압 방법을 택한 것은 현지 지휘관의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아니면 상부에서 처음부터 어떤 목적의식에서 하달한 것인가요.
답 젊은 군인들이다 보니 진압과정에 다소 무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진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 초기진압 때 대검을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는데 공수특전부대가 시위진압에 나설 경우 통상적으로 대검을 착검하는가요.
답 착검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적으로 하되 다만 위력시위를 할 경우에는 착검을 합니다.
문 공수특전부대가 광주에 출동하여 최초로 총기를 사용한 때가 언제 어디에서라고 보고받았는가요.
답 당시에는 일절 보고받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5월21일 도청 앞에서 있었던 집단발포가 최초의 발포로 알고 있습니다.
군용 장갑차로 계엄군 공격
문 5월20일 23시경 광주 신역 부근에서 시위대들이 트럭 등 차량으로 3공수여단 병력을 공격하자 12대대·15대대 병력이 시위군중들을 향하여 발포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하여 12대대장 김완배 중령,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나 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으로부터 보고받은 일이 있는가요.
답 광주 신역 부근에서 발포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듣습니다.
문 5월21일 13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이 한 발포에 관하여는 어떻게 보고받았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고받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수십만의 시위대가 광주 시가지를 대부분 장악한 다음 마지막으로 도청을 장악하고자 최후 저지선을 펼치고 있던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중 그날 09시경 시위대들이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군용 장갑차로 계엄군 저지선을 돌파 하여 계엄군 1명을 즉사시키고 7명을 부상당하게 했습니다.
계엄군이 후퇴하자 곧바로 시위대가 버스로 계엄군 저지선을 향하여 돌진하므로 성명미상의 계엄군 간부들이 돌진하는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개시하여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사후에 알았습니다.
문 실탄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구체적인 발포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하던가요.
답 5월21일 13시가 조금 못 되어 장갑차의 돌진과 함께 시위대 쪽에서 사격을 가하는 총성이 들려오자 계엄군들이 수십만 시민들과 차량 공격에 위기감을 느끼고 4개 대대장이 모여 논의를 한 다음 상부에 발포를 건의했으나 상부에서는 절대로 발포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헬기 한 대가 도청 앞 광장에 내려앉아 도청에 있던 31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는데 그 직후 누가 31사단 철수 병력들로부터 얻어 왔다며 약 1600발의 실탄을 가지고 와 이 실탄을 장교들에게만 10발씩 분배하고 있던 중 갑자기 버스가 돌진해 들어오므로 먼저 실탄을 받은 장교가 이 버스에 사격을 가하여 저지했는데 계속하여 다른 차량들이 돌진하여 들어오자 여러 사람들이 발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포는 본능적이고 조건반사적인 정당방위 차원의 발포로서 그 때 공수특전부대원들이 실탄을 가지고 나가지 않아 쏘려고 해도 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31사단 경계 병력들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실탄 덕택에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5월21일 13시경에는 시위대가 실탄이 든 총으로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계엄군에 대하여 선제발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본인은 선제발포가 있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야당의원들의 주장을 들어보니 시위대의 무장시간과 관련하여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지 지휘관이나 하사관들을 상대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鄭雄 31사단장이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은 발포에 대해 사전 건의나 사후 보고를 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답 사전건의나 사후보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발포가 있은 사실은 두 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휘체계 일원화 지시 있었다
문 고소·고발인들은 崔雄 11공수여단장이 대대장들로부터 발포건의를 받은 다음 피의자에게 발포여부에 대한 승인을 구하자 피의자가 全斗煥 보안사령관·盧泰愚 수경사령관 등 新군부의 핵심들과 협의하여 발포를 결정한 다음 공식지휘계통이 아닌 崔雄 여단장을 통해 도청 앞에 있던 공수특전부대에 발포명령이 하달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답 허위날조입니다. 발포건의를 받거나 발포건의를 받고 全斗煥 장군 등과 상의한 일이 결코 없습니다. 본인이 발포를 명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여단장들이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본인에게 그런 건의를 할 리가 없지요.
문 5월21일 15시30분경 李熺性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라는 지시가 공식명령 계통을 통하여 하달된 일이 있었지요.
답 그런 명령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軍의 관례상 잡다한 부대가 동일한 작전에 참여할 때는 의레 강조되는 사항입니다.
문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라는 지시가 있은 후 곧바로 공수특전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31사단에서 전교사로 넘어갔지요.
답 5월21일 16시경 전교사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전교사로 작전통제권이 넘어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공수특전부대 3개 여단과 20사단이 투입됨으로써 부대규모가 엄청 커져 31사단장이 지휘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니까 전교사로 작전통제권이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도청 앞에서 발포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공수특전부대가 광주市 외곽으로 모두 철수했지요.
답 5월21일 16시 광주시내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둔지인 조선대학교에 집결하고 있다가 3공수여단은 새로운 주둔지인 광주교도소로, 11·7공수여단은 화순郡과의 인접지역인 주남마을 일대로 각 철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광주市 외곽으로 철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尹興禎 사령관이 시내에서 軍과 시위대가 충돌할 경우 엄청난 유혈사태가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5월20일 24시경 李熺性 계엄사령관에게 철수를 건의했고, 5월21일 09시경 계엄사령관 주재로 열린 계엄사령부 대책회의에서 계엄군을 광주시내에서 외곽으로 전환배치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시내에서 철수하여 광주교도소로 이동 배치된 3공수여단이 시위대의 차량뿐만 아니라 광주교도소 지역을 통과하는 차량과 행인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사망 10명, 부상 12명의 피해를 입혔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답 시위대들이 광주교도소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무장을 하고 침투해 들어오자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교도소 공격
문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를 경계하기 이전에 31사단 96연대 2대대가 경계할 때나 3공수여단이 철수한 후 20사단 62연대가 경계할 때는 무장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일이 일절 없었다고 하는데 왜 3공수여단이 경계할 때는 무장 시위대가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답 31사단이 경계할 때는 시위대들이 무장하기 전이고, 20사단이 경계할 때는 이미 공수부대원들에게 혼이 난 마당이니까 공격을 못한 것이겠지요.
문 고소·고발인들은 광주市 외곽으로 철수한 11공수여단 62대대가 5월23일 08시경 녹동마을 입구 화약고 앞 도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25인승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11명을 사살했고, 같은 날 14시경 주답지역 부근에서 검문에 불응하는 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17명을 사살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해 보고받은 일이 있는가요.
답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그런 주장을 제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당시에는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문 11공수여단 62대대장 안부웅은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하여 62대대 매복조가 광주에서 화순으로 질주해 가는 버스를 발견하고 검문을 하기 위하여 버스를 세우려고 했으나 사격을 하면서 그대로 질주해 버스에 사격을 가하여 11명이 사망했다고 증언했는데 도망가는 버스에 사격을 가하는 것도 자위권 행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요.
답 軍이 필요에 의해서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검문에 불응하면서 사격까지 가하며 봉쇄선을 돌파할 경우에는 사격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발과 편의복 마련, 광주 도착
문 5월23일 12시경 蘇俊烈 사령관(尹興禎과 교체된 신임 전교사 사령관)이 피의자와 협의를 거친 후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공수특전부대를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광주비행장으로 철수시키고 그 자리에 20사단을 교체투입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蘇俊烈 사령관이 본인에게 공수특전부대와 20사단을 교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온 것이 아니라, 공수특전부대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이 좋지 않으니까 옷을 일반 보병복장으로 갈아입히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와 본인이 좋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문 공수특전부대의 철수 결정과 관련하여 5월24일 피의자가 蘇俊烈 사령관에게 全斗煥 장군의 메모를 전달한 일이 있지요.
답 본인은 蘇俊烈 사령관에게 메모를 전달한 기억이 없습니다.
문 蘇俊烈 사령관의 진술에 따르면, 「蘇선배님, 공수부대의 사기를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기재하고, 그 밑에 全斗煥 장군이 사인을 한 메모를 피의자가 전달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본인은 그런 메모를 전달한 일이 없습니다. 蘇俊烈 사령관이 그런 메모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505 보안부대 관계자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문 공수특전부대가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공수특전부대 병력과 전교사 예하 병력 간에 오인사격이 발생한 일이 있었지요.
답 5월24일 오후 효천역 주변 야산에서 11공수여단 병력과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오인사격을 벌여 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참모 차정환 소령 등 9명이 사망하고 조창구 대대장 등 38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문 계엄군 간에 오인사격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지휘체계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요.
답 교도대로 하여금 매복을 지시한 곳도 전교사이고, 11공수여단으로 하여금 이동을 지시한 곳도 전교사였는데 다만 그 과정에서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이지 지휘체계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對간첩작전 등에서도 가끔 오인사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5월27일에 있을 도청진압 작전을 처음 안 것이 언제인가요.
답 5월26일 가발과 편의복을 마련하여 21시경 광주에 도착했는데 그 때까지 본인은 5월27일 00시01분부로 작전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하고 나서 비행장에 있던 여단장들로부터 蘇俊烈 전교사 사령관이 작전을 결심하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끝낸 상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22시30분경 전교사로 蘇俊烈 사령관을 찾아가 작전결심 사항을 확인한 다음 蘇俊烈 사령관에게 『외로운 결심을 했다. 이것을 잘못하면 정말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인데 군인이 임무를 부여받고 무한정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상부에는 보고를 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고를 안했다』고 하여 『현지 지휘관으로서 큰 결심을 하여 혼자 책임을 전부 다 지겠다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윗사람에게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말했더니 그 때서야 蘇俊烈 사령관이 李熺性 계엄사령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5·27 진압작전 시기는 蘇사령관이 결정
문 그렇다면 그런 중요한 작전을 蘇俊烈 사령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답 그 전에 이미 李熺性 계엄사령관으로부터 5월27일 00시01분 이후에 작전을 실시해도 좋다는 승인이 있었고, 그 상태에서 구체적인 작전시기의 선택을 蘇俊烈 사령관이 단독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문 군부 내에서 최초로 도청진압 작전이 검토된 때가 언제인가요.
답 5월23일 08시50분경 계엄사령관실에서 진종채 2군 사령관과 관계 참모가 참석하여 대책을 논의한 결과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의 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작전을 조기에 착수하기로 결론이 났으나 구체적인 시기 선택은 전교사 사령관에게 위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광주 현지 지휘관들도 조속한 진입을 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도청진압 작전과 관련하여 고소·고발인들은, 공수특전부대가 市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보안사령관실에서 피의자와 全斗煥 보안사령관·盧泰愚 수경사령관 등이 만나 그 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광주사태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국보위 설치를 계속 미룰 수는 없으므로 조속한 시일 내에 무력으로 완전히 진압하자』라고 결론이 났으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국 행정부로부터 필요한 협조를 얻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5월27일까지 작전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답 국방부에서 미국에 협조를 구하여 항공모함이 이동 중에 있었다는 사실은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만 국보위 출범을 위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끝장을 내자는 등의 결론은 내린 일이 없습니다. 당시 국방부에서 미국의 협조를 요청한 것은 만약 광주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소요가 확산될 경우 북한의 남침 등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것으로 판단한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5월26일 광주비행장에서 피의자가 20사단장과 3명의 공수여단장을 불러 모아 놓고 5월27일로 예정된 도청진압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본인이 5월26일 광주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교사로부터 작전지시가 하달된 이후였습니다.
문 5월26일 21시경 광주비행장에서 공수여단장 3명에게 가발 및 민간인 복장을 제공하고 격려를 한 것은 사실이지요.
답 가발 및 민간인 복장을 준비해 갔으나 작전이 임박했기 때문에 제공은 하지 않고 격려만 했습니다.
문 가발 및 민간인 복장은 5월27일 도청진압 작전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에서 준비해 간 것이 아닌가요.
답 머지않아 진압작전이 전개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5월27일 작전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선봉부대로 3공수여단 특공조 추천
문 蘇俊烈 사령관의 진술에 의하면 도청에 진입할 특공조의 편성에 피의자가 관여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본인에게 도청 진입의 선봉부대로 어느 부대가 좋겠느냐고 물어와 3공수여단 특공조를 추천한 일이 있었습니다.
문 공수특전부대가 도청에 진입할 때 일반 보병복장으로 옷을 전부 갈아 입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얼룩무늬 제복 대신 일반 보병 전투복으로 바꿔 입혔는데, 그 이유는 공수특전부대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이 좋지 아니하여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5월27일 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 뒷담을 넘어 들어가면서 맹렬히 총을 쏘아 대고, 나머지 3공수여단 병력도 M16 소총을 자동으로 갈기면서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항복하라고 해서 나오지 아니하면 수류탄을 집어던지는 등 시위 진압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도 지키지 아니하고 무지막지하게 진압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도청진압 작전 때 공수특전부대 병력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습니다.
문 蘇俊烈 사령관은 도청진압 작전에 앞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을 2차례나 만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해 주도록 신신당부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명령을 무시하고 강경진압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한 작전이었으니까 다소 강하게 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본인은 당시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 도청진압 작전이 마무리된 후 피의자가 周永福 장관과 함께 도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답 5월27일 새벽에 周永福 장관이 광주에 내려왔다고 하여 본인과 蘇俊烈 사령관, 朴俊炳 20사단장이 수행한 것이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문 당시 周永福 장관이 『나는 희생자가 적어도 500명은 날 줄 알았어. 그래서 작전을 미루어 온 것이지.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치러 내다니』 하면서 치하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희생자가 예상보다 적으니까 국방부장관이 안도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도청진압 작전과 관련하여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 피의자가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광주에 체재한 일자가 어느 정도 되었는가요.
답 본인이 광주에 체재한 일자는 5월20일 오전에 가서 오후 상경, 5월21일 17시경 가서 5월22일 16시 상경, 5월23일 17시경 가서 5월25일 15시경 상경, 5월26일 21시경 가서 5월27일 오후 상경 등입니다. 그러나 일시가 다소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가 바랍니다. 다만 광주에서 숙박한 일수는 4일이 틀림없습니다.
문 광주를 그렇게 자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답 본인이 광주를 방문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軍 작전에 있어서의 작전통제라는 개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공수특전부대 3개 공수여단은 2군 사령관과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전교사 사령관의 작전통제 하에서 광주사태 진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의 작전통제라는 개념은 작전통제권을 갖는 부대장이 배속받은 부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되 배속부대에 대한 행정·군수 업무는 원소속 부대 부대장의 책임 하에 이를 지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전 사령관인 본인은 광주에 출동한 3개 공수여단에 대한 결손병력의 충원, 사망자·부상자의 후송, 군수지원 등의 업무를 처리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부대는 그 부대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는 것이므로 원소속 부대장은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부대장에게 차출된 부대에 대한 특성을 설명해 주고 작전통제권을 가진 지휘관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자문에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全斗煥 보안사령관 만나
문 고소·고발인들은 피의자가 광주사태 기간 동안 거의 매일 헬기로 서울과 광주를 오르내린 것은 광주의 상황을 파악하여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답 서울에서 열리는 참모회의에 참석하고 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예하부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서울과 광주를 내왕한 것입니다.
문 광주사태 기간 동안 서울로 올라올 때마다 李熺性 계엄사령관이나 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요.
답 계엄사령관을 몇 차례 만난 것은 사실이나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매번 그 분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문 5월25일 黃永時 참모차장과 함께 보안사에 들러 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만난 일이 있지요.
답 네, 5월25일 16시경 全보안사령관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문 그 때 全斗煥 장군을 만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가발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문 보안사에서 가발을 지원하는 업무도 취급하는가요.
답 가발을 취급하는 곳은 아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보안사로 간 것입니다.
문 全斗煥 장군에게 가발을 지원해 달라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답 보안사에는 가발이 없는데 한번 구해보겠다고 하여 그냥 나왔습니다. 그 이튿날 10여 개를 구해 주어 그것을 가지고 광주로 간 것입니다. 그 때는 보안사령관을 만나지 아니하고 누군가를 보안사로 보내어 가발을 받아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5월27일에 있을 도청진압 작전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닌가요.
답 상당기간 못 만났고 하여 겸사겸사 들렀습니다만 도청진압 작전을 협의하기 위해 간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시 현안이 광주사태였으니까 자연스럽게 그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겠지만 구체적인 대화내용은 기억이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全斗煥 장군이나 盧泰愚 장군은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특별한 역할이 없었습니다.
계엄군 23명 사망
문 고소·고발인들은 사체를 암매장하기 위하여 피의자가 마대 3만5000개를 공수해 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답 진압작전에 마대가 필요했을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본인은 서울에서 가발과 편의복만 가져갔고 마대는 공수해 간 일이 없습니다.
문 공수특전부대가 광주에서 완전히 철수한 때가 언제인가요.
답 사태가 마무리되고 며칠 지나지 아니하여 모두 철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일시는 기억에 없습니다.
문 공수특전부대에 의하여 시위대 등 민간인들이 모두 몇 명이나 사망했는가요.
답 상당히 많은 수가 사망하고 다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2군 사령부에서 예비군 무기고가 피탈되지 않도록 특별히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31사단에서 무기고의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한 때문입니다.
문 공수특전부대원들은 모두 몇 명이 사망했는가요.
답 계엄군 측에서 모두 23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공수특전부대가 18명으로 가장 많고, 그 외 31사단에서 3명, 보병학교에서 1명, 20사단에서 1명이 각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공수특전부대가 시위진압을 하면서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화염방사기를 가져간 것은 사실이나 사용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염방사기를 가져가는 이유는 유색 액체를 넣어 발사하면 주모자 색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피의자는 광주사태의 발생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답 계엄사에서 軍을 투입할 때 서울·광주 그 밖의 모든 대도시에 대하여 같은 배려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 광주에서만 시위가 과격화되고 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은 호남지역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金大中씨의 연행으로 군부에 대해 반발심이 일어난 점, 방송국의 파괴 등으로 사실보도가 잘 안 되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악성 유언비어가 난무한 점, 예비군 무기고의 관리소홀로 시위대가 무장한 점, 현지 지휘관의 지휘능력 결함 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 악화 원인은 작전지휘 결함 때문
문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 공수특전부대 병력과 시위대가 여러 차례 충돌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작전지휘권자의 의도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위진압 과정에서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물리력과 물리력이 상호 충돌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킨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를 악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컨대 5월21일 도청 앞에 10만 시위군중들이 운집해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 돌진할 때 현지 지휘관들이 철수를 건의했음에도 鄭雄 31사단장과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이 이를 묵살한 일이 있는데 이와 같은 작전지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부마사태 때는 공수특전부대의 진압방법이 주효했는데 광주에서는 왜 통하지 않았을까요.
답 金大中씨 연행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문 5월18일 학생들이 전남大 정문 앞에 모여 시작한 시위를 경찰력만으로 대처했거나 부득이 軍을 투입했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진압방법을 선택했더라면 민족적 비극인 광주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 본인도 軍이 투입된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위의 주된 이슈가 金大中 석방이었던 점에 비추어 누가 시위진압에 나서더라도 충돌이 불가피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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