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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풍광(風光)이 참으로 수려했다.
북에서 힘차게 뻗어내려온 한북정맥의 아차산이 둥지를 튼 곳이다.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한강이 서쪽으로 흘러 아차산을 감싸고 흐르고 있다.
그 강은 한양의 외사산 아차산을 만나 양명(陽明)한 생기(生氣)를 뿜어내고 있다.
이렇게 산과 물이 어우러져 살기 좋은 양택명당을 이루는 길지(吉地)이다.
그 아차산 자락은 사대부들이 별서(別墅)를 다투어 지어 빼어난 산수자연 속에서 풍류(風流)를 만끽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명당이라 불리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급호텔 쉐라톤워커힐은 아차산성 남쪽 기슭아래 한강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들어앉아 있다.
뒤로는 아차산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강 건너 들판 동쪽에는 검단산, 남쪽에는 남한산성, 서쪽에는 관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아울러 서남쪽은 한강을 비롯해 광나루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여 전망이 탁월하다.
"워커힐호텔이 들어선 터는 지맥 위에 똑바로 들어서지 못한 채 계곡 위에 넓게 자리해 지기가 쇠약하다.
또 좌측의 남동방에서 도래한 한강 물 이 호텔을 화살처럼 쏘아 충사(沖射)한 후 우측의 남방(丙午破)으로 빠지는데,
호텔의 좌향까지 동향에 가까운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놓여 길하지 못하다.
풍수 경전에 이르길, “정(情)이 지나치다. 간혹 초년에 발복하는 사람도 있고 불발하는 사람도 있다.
혹 장수하는 사람도 있고 목숨이 짧은 사람도 있으니 길흉이 상반된다”라고 했다.
이곳에서 자연의 기를 충분히 받고자 한다면 건물의 방향을 동남향[巽巳向]으로 앉혀야 한다.
이처럼 이곳은 주택을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호텔 터로는 최적이다 .
워커힐호텔은 동쪽에서 흘러온 한강이 아차산에 막혀 물길을 남서쪽으 로 바꾸는 곳이며,
절벽이 높게 형성된 대(臺)에 위치해 전망이 좋다.
대는 물에 의해 산이 깎여 나가며 언덕이 높게 형성된 곳으로, 사방을 조망하기에 좋다.
또 아래에는 물이 깊은 소(沼)가 있어 예부터 정자(亭子)가 들어설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홍진(紅塵)의 더러움을 멀리하는 선비들이 살림집과는 동떨어진 자기만의 공간을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자 문화이다.
정자는 시인묵객이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학문을 닦거나 벗들과 음풍농월하던 장소였다.
뒤로는 푸른 아차산을 베 개 삼고, 앞으로는 넓은 한강을 조망하기에 제격인 이곳은 휴식 공간이나
또는 모임을 열기 위한 다락[樓]이 들어설 장소로 적합하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의 <고제희칼럼>에서
국내 굴지의 기업 SK그룹은 선경직물로부터 시작한다. 선경직물은 최종건 회장이 일으킨다.
최종건 회장은 최종현 회장의 큰형이다. 선경직물이 SK그룹으로 성장하는데는 이들 형제의 혼맥이 일조한다.
최종건의 장녀 최정원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 고광천과 혼인했고, 차녀 최혜원의 남편은 박장석 SKC 부회장이다.
4녀 최예정의 시아버지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최종건과 이후락은 호형호제할 정도로 관계가 남달랐다.
최예정의 남편은 이후락의 3남인 이동욱이다. 이동욱의 형인 이동훈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인 김영혜와 결혼했고,
이동훈의 장남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 손희영과 혼인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SK가(家) 혼맥은 CJ가·한화가와 연결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고 최종현 전 회장과 고 박계희 여사의 장남이다. 부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이다.
창업기를 지나 도약기로 가는 길목에서 최종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경희대 김한원 교수는 최종건 회장이 박정희대통령의 도움을 받게된 과정을 이렇게 밝힌다.
‘선경직물 인수 이후 열정과 집념으로 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
최종건과 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
선경직물은 워커힐호텔을 인수하면서 기업의 도약기를 맞는다.
72년 12월23일 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안돼 선경그룹은 워커힐호텔 인수에 나섰다.
최종건이 정부 소유의 워커힐을 매각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72년 12월 초.
그동안 워커힐호텔은 교통부 산하 국제관광공사에서 운영하고 있었다.10년 내리 적자 신세였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워커힐을 민간에 팔기로 한 것이다. 최종건은 워커힐 인수를 통해 전환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최종건과 최종현이 마찰을 빚는다.
“전혀 업종이 다른 호텔을 인수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최종현)
“워커힐은 여느 호텔과 다르다.”(최종건)
“다르다고 해도 결국 숙박업인데, 섬유업인 선경이 호텔을 경영한다는 것이 걸맞지 않아요.”
“사업을 크게 하자면 이것저것 다각적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호텔은 그날그날 현찰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야.”
“지금 워커힐에 손님이 듭니까.”
“그것은 누가 경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당시 워커힐의 내정 가격은 19억5000만원. 이미 한진그룹에서 관심을 보인 상태였다.
한진 측은 내정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수대금의 20년 분할 납입을, 정부에서는 10년 분할 납입을 주장하고 있었다.
양측이 샅바싸움을 하고 있을 때 최종건이 나섰다. 내정 가격보다 비싸게, 그것도 일시불로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내용을 김신 교통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그럼 선경에 매각하시오. 선경의 최 회장은 아무 일이나 성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 아니오”라고 응원해준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결재서류 빈칸에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호텔로 발전시킬 것’이라는 메모까지 써서 보낸다.
이 말 한마디에 워커힐의 새 주인은 선경으로 바뀌었다.
73년 1월 중순 워커힐 공개 입찰에서 최종건은 26억3200만원을 써냈다.
10억원은 일시납, 나머지는 10년 분할 납입하는 조건이었다. 이 회사는 73년 3월 16일 상호를 ‘선경개발 워커힐’로 바꿨다.
73년은 선경직물을 설립한 지 20년 되던 해였다. 최종건회장으로선 그룹 확장을 위한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사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도움이 컸다고들 전한다.
SK그룹을 크게 성장시킨 최종현 회장이다. 최회장은 워커힐호텔 옆에 지은 빌라에 살았다.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는 최종현 회장의 풍수지리관을 <신동아 2007년 7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유명 기업인들이 묘터 봐달라고 연락하지 않습니까.
“기업인들은 묘터에 별로 안달하지 않아요.”
그는 풍수지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재벌가로 SK그룹을 꼽았다.
“최종현 회장은 제가 서울대를 그만뒀을 때 처음으로 저를 도왔던 분입니다.
처음에 재벌이 만나자고 하기에 ‘뻔한 일’인 줄 알았어요. 산소 자리 봐달라고 하겠지 싶었어요.
손길승씨가 저를 찾아왔더군요. 자연스럽게 SK그룹에 강사로 초빙됐어요. 최 회장과 인연이 닿아 그 집에 가보았어요.
최 회장이 살던 워커힐호텔 구내에 있는 빌라는 풍수지리상 별로 좋지 않은 터였어요.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살벌한 곳이었어요. 본래 큰물이 집 쪽으로 쏟아질 듯이 몰려오면 기가 너무 세거든요.
젊은 사람도 이기질 못합니다. 심리적으로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유발할 수 있어요. 그때 최 회장은 암 투병을 하실 때였어요.”
최 교수가 “집터가 좋지 않다”고 말하자 최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데리고 일합니다. 풍수 때문에, 그것도 물 때문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겨낼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제일 귀한데 어찌 땅과 물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습니까.”
“평소 기 수련을 좋아한 분이라 풍수에 귀기울이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요. 그분은 ‘집이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며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만일 제 말을 듣고 이사했다면 그분을 존경하지 않았을 거예요. 산소호흡기를 달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니 참 존경스럽더군요.”
-그렇다면 최 회장은 집터 때문에 사망했다고 봐야 하나요.
“그렇진 않아요. 최 회장은 그 집안에서는 꽤 장수한 편에 속했어요.”
이 호텔 경내 숲속에 여러 채의 빌라가 있다. 이 빌라는 정객들의 비밀스런 쉼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가 검찰 비리수사 대책을 숙의했던 사파이어빌라도 이곳에 있고,
DJ와 JP가 내각제 개헌 유보와 신당 창당에 합의했던 에스톤하우스 역시 호텔 북쪽의 강가에 위치해 있다.
특히 5공시절 지어진 에스톤하우스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됐는데,
MBC 드라마 ‘호텔리아’의 촬영장으로 사용돼 다시 한번 주목을 끌기도 했다
워커힐호텔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한 워커힐 아파트(Walker Hill Apartment)단지이다.
워커힐 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고급 아파트 단지로 선경종합건설(현 SK)이 건설하였다.
1978년 서울에서 열린 제42회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의 선수촌아파트로 건설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수촌아파트로 사격선수권대회 후 민간에 분양되었다.
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는 그 유명한 '피스톨 박' 박종규가 주도적으로 치른다.
박정희대통령을 가장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최고의 실력자이다.
박종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이라는 타이틀부터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1961년 5.16 군사혁명 때부터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저격에 의한 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물러날 때까지 13년간이나 맡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한국 현대사에서 많은 일을 한 ‘파워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애칭은 ‘G.D.(Giant Dynamite)’ 혹은 ‘피스톨 박’이었다.
그 애칭처럼 겉으로는 불같은 성격에 강한 인상을 풍겼지만 실제 모습은 인정도 많고 남도 잘 도와주고
또 외국어도 나름대로 잘 구사하던 학구파였다.
그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국가방위를 위해 참전했다.
5·16 당시 박종규는 장면 총리 체포조를 맡아 반도호텔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때 장면 총리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당시 장면 총리는 내각책임제 총리였지만 관저가 없어 관저를 구할 때까지 반도호텔 8층에 묵고 있었다.
박종규는 한·일회담 관계로 6·3사태가 벌어지고 전국이 시끄러울 때 김종필 당의장의 사퇴를 권고하기 위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쌍권총을 차고 시내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행동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어쨌든 박종규 소령은 5·16 성공 후 서울시청 앞에 박정희 소장을 보필하면서 차지철, 이낙선 등과 함께 나타난다.
박 소령은 그 후 최고회의 의장경호대장이 됐다.
육씨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육씨의 얼굴에 멍 들어 있는 것이 청와대에 접견 차 갔던 외부 여성인사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이 넌지시 묻지만 박정희의 언짢은 헛기침 하나로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1973년 청와대에서는 경호실장이 사정수석비서관의 방에 가 엽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호실장은 박종규, 사정수석은 홍종철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영수씨가 사정수석을 시켜 경호실장의 뒷조사를 한 것이었다.
육씨는 박정희의 옆에 딱 붙어서 술과 여자까지 챙겨주는 박종규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육씨는 사정수석이던 홍종철에게 박종규의 부동산 보유 현황과 사생활 등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우선 박종규의 비리를 캐야 그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수석실의 움직임은 박종규의 정보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 챈 박종규는 엽총을 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들어 소리쳤다.
"야, 홍종철. 당신이 내 뒷조사를 한다며!"
격분한 박종규는 엽총을 두어 발이나 쏘았지만 총알은 천장에 맞고 튀어 나갔다.
육씨가 생전에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박종규였던 것도 박정희의 술과 여자 때문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조카 사위 김종필은 생전에 박종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박종규와 나의 인연은 1949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육사를 8기로 졸업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속됐다.
숙군(肅軍)으로 군복을 벗은 박정희 소령이 문관(文官)으로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던 때다. 박종규와의 첫 만남이 기억에 생생하다.
정보국 배치 다음날, 사무실 한 구석에서 이등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디스 이즈 어 맵(This is a map). 댓 이즈 어 데스크(That is a desk). 스프링 해즈 컴(Spring has come). 아이스 앤드 스노 멜티드 어웨이(Ice and snow melted away)….”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다가가서 “귀관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더니 “박종규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라고 하자 그가 막 웃더니 “열심히 하는 걸로 보입니까? 영어를 하는 것이 장래에 좋을 듯해서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좀 읽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싹싹한 기질이 괜찮아 보였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고 육본이 부산으로 옮겨갔다. 전쟁 중 장교를 단기간에 양성하기 위해 부산에 육군종합학교가 세워졌다.
나는 일등중사로 승진한 박종규에게 “이 전쟁은 몇 년은 갈 거다. 장교가 돼야지, 사병으로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종합학교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박종규는 “장교? 난 하기 싫습니다. 이 전쟁 곧 끝납니다”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싫다는 그를 억지로 지프에
태우고 가 종합학교 5기로 입교시켜 장교로 만들었다.
박종규는 나를 잘 따랐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내가 대위였던 박종규를 정보국 행정과 인사계장으로
데려다 놓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그가 죽어버리겠다며 하필 우리 집 앞 우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아내 박영옥이 내게 전화로 급히 알려와 집에 가보니 박종규가 우물 속에서 양 다리를 쫙 벌린 채 두 발로 벽을 밀며 지탱하고
있었다. 우물에 뛰어들었다가 솟아올라오자 다시 빠지지 않으려고 다리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꺼내줄까? 그냥 빠져 죽을래?”라고 하니 꺼내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뛰어들 땐 언제고 꺼내달라고 하느냐”고 나무란 뒤
망을 넣어서 구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박종규가 행방불명이 돼 찾을 수가 없었다. 육군 방첩대(CIC)에 부탁해 찾아봤더니 제주도에서 발견됐다. 그를 서울로 붙들어 와 왜 거기 갔느냐고 물으니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다”는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나는 박종규의 인사 이동에 여러 번 힘을 써줬다. 전방부대로 가고 싶다기에 수소문해서 보내줬고, “영어를 좀 배워야겠으니
미군 부대에 보내달라”고 하기에 부평 미군부대에 파견장교로 가게 해줬다. 그 시절 박종규는 “나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 이외는 사람으로 보지않는다”는 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61년 5·16혁명 때 박종규가 맡은 임무는 장면 국무총리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박종규는 실행 하루 전에 미리 장면 총리 숙소인
반도호텔 8층을 답사했다. 혁명 당일 새벽 박종규는 공수단 중대장 6명을 이끌고 반도호텔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미 장 총리가 10분 전에 빠져나가 체포에 실패했다. 화가 난 박종규와 그 팀은 괜히 하늘에 대고 총질을 해대며 화풀이를 했다. 같은 시각 광명인쇄소에서 혁명공약문을 인쇄 중이던 나는 그 총소리를 듣고 무력충돌이 일어난 줄만 알고 바짝 긴장했다.
박종규는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과 청와대 경호실 차장을 거쳐 64년 경호실장에 오른다. 박 대통령은 그의 저돌성이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경호실장이 돼서도 술만 먹으면 호기를 부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가끔 술에 취하면 “박정희! 내가 그냥 안 둔다”고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한 다음날 새벽이면 정신이 든 박종규가
청와대 계단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그의 전날 행각을 이미 보고 받은 박 대통령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편한 아랫사람 대하듯 “술을 삼가든지, 좀 인간이 되든지 해라”라고 야단치곤 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박종규의 위세는 대단했다. 실세 중의 실세였던 이후락조차 박종규에겐 꼼짝하지 못했다.
수 틀리면 권총을 꺼내 들어 ‘피스톨 박’으로 불리던 박종규이다 보니 이후락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박종규는 사람이 변해갔다. 그렇게 나를 따르고 좇아 다녔던 그도 경호실장에 오르더니 나와의 인연은 싹 잊어버렸다.
세상 무서운 게 없게 되니 제 눈에는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인심이 이렇게 달라지는 게 바로 세상이다.
오죽하면 일본 속담에 ‘사람을 보거든 우선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라’는 말이 있겠는가. 돈을 훔쳐가는 것만 도둑이 아니다.
마음을 훔쳐가는 것도 도둑이고, 그게 더 고약하다. 돈을 훔쳐 가는 건 한도가 있지만 마음을 훔치는 건 한도가 없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연재물 김종필 증언록 <笑而不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