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을 지키는 것은 산과 들, 물이 흐르는 곳만은 아닙니다. 바다에도 봄 향기가 있습니다. 꽃향기를 따라 걷는 문학산책보다 아직은 봄 바다를 걸으며 문학산책을 하는 것이 절기상 바르다는 생각에서 강릉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꽃향기의 꽃그늘을 걷는 문학산책은 백운산 자락에 있는 토지 문화관이 제격일 것 같아 이곳에 머물던 박경리 선생의 추억하며 백운산 자락에서 야생화 향기와 함께 산책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강릉 봄바다를 앞 세운 것입니다.
1. 초허 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내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우 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물게 하오
이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나그네와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파초 (芭蕉)
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鄕愁,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情熱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1936. 초허 김동명
“초허 김동명 시인은 종교인이면서 동시에 망국의 통한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인, 교육자와 정객으로 다양한 삶의 거적(巨跡)을 남겼으며, 조선어 말살의 격랑기에 우리 언어로 시작(詩作)에 열중한 지사적 인물”입니다.
2. 교산 허균.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스스로 말 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교리책과 기도문을 가지고 들어와 천주학을 했다고 합니다. 새 시대의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관심을 갖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성리학에 치우친 당시 선비 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자기만의 시각을 버리고 서자나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습니다.
강릉 사천 교산에 있는 교산의 시비.
3. 허난설헌(허초희)
불운의 천재 시인 허초희, - 본명은 초희(楚姬)이라 하고 별호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蘭雪 軒)은 호입니다. 여인은 1563년 명종 18년 태어나 1589년 선조 22년 27살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오빠 친구 이달에게 시학을 배운 초희는 어릴 적부터 찬사를 받습니다.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없었던 사회의 당시 세태에서 자신의 한을 시에 풀어낸 동북아시아 최초의 베스트셀러 시인의 반열에 오른 여류 시인입니다. 우리들을 지탱해주고 있는 역사 안에서 규수 시인이라 불리는 여인은 정몽주의 어머니와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허란 설헌입니다.
모춘(暮萶). 늦봄에
연쇄요공학미귀(煙鎖瑤空鶴未歸)
안개는 공중에 자욱한데 학은 돌아오지 않고
계화음리폐주비(桂花蔭裏閉珠扉)
계수 꽃 그늘 속에 구슬 문은 닫혔네
계두진일신령우(溪頭盡日神靈雨)
시냇가는 온종일 신령스런 비만 내리고
만지향운습불비(滿地香雲濕不飛)
땅에 가득한 구름은 젖어서 날지 못하네
난설헌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것과 조선의 여인으로 태어난 것과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남편곁에 묻히지 못하고 죽은 아들과 딸과 함께 경기 광주 초월에 묻혔습니다.
아래 작은 무덤 두 개가 난설헌의 아들과 딸의 묘입니다. 좌측 큰 무덤은 난설헌의 묘이고요. 남편의 묘는 한 단 위에 재취로 들어 온 부인과 함깨~~~~
4. 매월당 김시습
금오신화의 작가 김시습은 쓸쓸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거듭된 가정사의 참극으로 지쳐 가던 중 접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불의의 소식을 들은 젊고 순수했던 21세 김시습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날 며칠을 통곡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서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나서 승려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영월로 쫓아 보낸 뒤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반 인륜적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매월당은 자신의 작품 금오신화의 주인공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5. 신사임당
신 사임당은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의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검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죽헌은이라 부른 그곳에서 훗날 대학자가 된 율곡이 태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선비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입니다. 율곡이 외할머니 이씨에 대하여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에 따르면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말은 서툴었지만 행동이 재빨랐고, 모든 일에 신중하되 착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은 없었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신사임당은 그 중에 둘째 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그녀는 스스로 강릉 오죽헌에 살 때 자신의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당호에는 고대 중국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태임(太任)을 닮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태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태교를 처음으로 실천했던 여성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 여류 서화가로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한시(漢詩)와 그림이 전해집니다.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더하여 한국 최고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지요. 당호는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妊堂) 이라 하였고 그 밖에 임사재(任師齋)라 하기도 하였으며 남편 이원수는 부인의 학문과 인품이 앞선다는 것을 알고 부인의 뜻을 받아들인 남편이었지만 가부장적인 전통을 지켜온 사대부인지라 매사 일처리가 정확하고 깔끔한 부인의 모습이 힘들었는지 주막집 여인 권씨를 첩으로 들여 방을 얻습니다. 본 부인과 달리 권씨는 자유분망하고 술이 과해 술주정을 부리기도 일 수 였는데.. 이러한 일탈이 이원수에게는 해방감을 불러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5남 3녀의 모친으로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을 파악하고 자신 사후에 벌어질 일에 근심을 두고 남편과 단판을 지며 권씨와 관계를 정리하라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갑론을박으로 대화는 늘 끝나버리더니 신사임당 사후에 권씨를 집안으로 불러 들여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가정사로 인하여 가출하여 강릉 외가로 외할머니를 찾아가던 세 째 아들 율곡은 금강산으로 가 일 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큰 아들과 권씨는 늘 부딪치지만 이원수는 모른척하고 넘겨버립니다.
서울- 강릉- 사천. 초허 문학관 - 사천 교산 허균의 시비 부터 - 사천해변을 걸어 경포해변으로 나가 - 초당에서 허난설헌과 허균의 문학을 살핀 후 - 경포 호수를 옆에 두고 걸어 - 배다리 부근에 있는 매월당을 뵙고 - 차편으로 오죽헌 - 다시 강릉역으로 가 - 귀경하는 일정입니다. 참가자에 한하여 별도의 자료는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