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수원화성, 성곽과 행궁을 한가로이 거닐다
1. 일자: 2022. 12. 21 (토)
2. 장소: 수원화성, 행궁
3. 행로와 시간
[장안문(08:10) ~ 서문(08:25) ~ 팔달산/화성장대(08:45) ~ 화양루(09:03) ~ 행궁(09:27~47) ~ 남문(09:58) ~ 창룡문(10:25) ~ 용연/방화수류정(10:44) ~ 장안문(11:02) / 7.97km]
밤새 내렸나 보다. 창밖 풍경은 온통 하얗다. 내일이 동지이니 한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 올 겨울은 유독 눈이 잦다. 반가운 일이다. 눈 덮인 성곽을 걷고 싶고, 소나무 푸른 가지 위 쌓인 하얀 눈을 보고 싶어 길을 나선다. 간밤 눈으론 부족했는지 아침에도 눈이 내린다. 북문 앞에서 길을 시작한다. 눈을 지붕에 인 장안문의 성문을 둘러싼 벽과 보루가 든든하다.
서문으로 향하는 길 위에 눈이 새하얗게 덮였다. 각루, 포루, 치 등의 성곽 구조물이 이어진다.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뒤로 키 큰 소나무가 머리에 눈을 잔뜩 인 채로 늠름하게 서 있다. 눈 내리는 이 아침 이곳을 찾은 보람을 찾았다. 녹색, 회색, 흰색의 은은하고 담백한 색의 조화가 참 좋다.
눈발이 거세진다. 화성장대 위에 선다. 장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내리는 눈발이 화면에 잡힌다. 흔치 않은 광경이다. 잘 생긴 소나무 뒤로 수원 시가지 풍경이 펼쳐지고, 그 시작은 너른 공터로 다가오는 화성행궁의 모습이다. 시간을 내어 행궁에도 들려야겠다.
장대를 내려선다. 눈은 더 거세지고 사위는 고요하다. 앞 사람의 발걸음이 눈에 파묻히고 내가 새 길의 주인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궂은 날씨에도 일찍 집을 나선 보상을 얻는다. 화양루라고도 불리는 서남각루로 향하는 용도라고 불리는 한적한 길 위에 선다. 순시(巡視), 령(令) 이라는 깃발에 바람에 나부낀다. 홀로 이 좋은 풍경을 즐긴다.
남문으로 내려서 얼마 전부터 핫플레이스가 된 행궁 주변 맛집과 예술인 거리를 지나 궁 마당에 선다. 지나는 길에 후소라는 열리문화공간의 앞마당과 건물이 멋져 잠시 들렸다. 문화와 예술이 있는 훌륭한 쉼터라 여겨진다.
지나는 이에게 사진을 부탁하여 찍고는 행궁 안으로 들어선다. 눈 덮인 지붕 위로 지나온 팔달산이 우뚝하다. 눈이 주는 풍요가 궁 안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천천히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이 얼마 만에 갖는 여유란 말인가.
내리던 눈이 가늘어졌다. 남문과 지동시장을 지나 다시 성곽 위에 선다. 부러 성 밖으로 나와 걸어간다. 성 안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눈 내린 겨울의 서정은 고요하고 풍요로웠다.
창룡문이라고도 하는 동문 위에 선다. 너른 공터가 있는 여백의 풍경이 참 곱다. 화성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든다. 동북공심돈이라는 건물 앞에 선다. 새롭고 낯설다. 오면서 머리에 넣어두려 했던 성곽 구조물들의 이름 알기를 포기한다. 길 위에선 그저 바라보고 느끼면 될 뿐, 그래도 충분히 인연맺기가 가능한데 굳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이유가 없다. 내려놓고 나니 순수한 내 느낌으로 풍경이 다가온다. 더 좋다.
연무대를 지나 또 성 밖으로 나왔다. 수원화성의 보물은 성곽 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은 그 자체가 명품인데 눈까지 더해졌으니 나만의 보물이 될 리가 없다. 수 많은 사진작가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다. 작은 내 핸드폰이 부끄러워 멀찍이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이내 자리를 뜬다. 연못과 성곽 그리고 정자가 만들어내는 눈이 있는 풍경은 가히 최고다.
공원 길을 걸어 장안문 앞에 선다. 청동으로 주조된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화성의 모습이 눈에 살포시 덮인 모습이 보인다. 걷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좋았다. 눈이 선물해 준 고요함과 포근함이 내내 나와 함께 해 주었다.
만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 에필로그 >
2시간 50분 남짓 홀로 걸은 눈 내리는 수원화성, 성곽과 행궁 나들이가 기분 좋게 끝났다. 등산이든 트레킹 이든 집을 나서기 까지가 힘들지, 걷는 길에선 후회가 있을 리 없다. 오늘은 모든 게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걷는 내내 눈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눈 내린 세상이 밝은 이유는 어두운 곳부터 하늘빛이 고이기 때문이고, 따듯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차갑고 낮은 곳에 하늘의 손길이 더 오래 머물기 때문이라 했다. 오늘은 눈 덕분에 수원화성 위 하늘도 더 넓어졌다.
다음 눈 오는 날 다시 화성을 찾을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