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小史
- 1955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다. 서기 1955년은 단기로는 4288년. 이른바 쌍팔년도이다. 지금 50대이거나 더 젊은 층에게 쌍팔년도를 물어보면 아마도 8 두 개가 겹치는 88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을 떠올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쌍팔년도에서 가리키는 쌍팔년은 서기가 아니라 단기 연도이다. 따라서 내가 태어난 단기 4288년이 바로 문제의 쌍팔년도인 것이다.
쌍팔년도란 옛날 옛적이나 구닥다리 구식의 시대를 대표하는 대명사로써, 주로 군대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절의 오합지졸 같은 부대를 풍자해서 쌍팔년도 군대라고 비하조로 사용되던 은어였으리라.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서기를 쓰기 시작한 건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1962년부터라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1968년까지 학교 칠판 왼쪽 구석에는 흰색 페인트로 단기 42xx년 x월 x일이라고 쓰여 있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한동안은 서기와 단기를 혼용했던 것 같다.
암튼 이 쌍팔년도라는 말 자체가 단기를 쓰던 시대의 유물이므로 이제는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해졌다. 갑자기 단기가 나오고 쌍팔년도가 나오니까 내가 정말 구닥다리 구식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해서 서글퍼지려고 한다.ㅠㅠ
- 하지만 무슨 천지조화인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금세기 디지털 혁명 3인방 모두가 이 쌍팔년도에 태어났다. 바로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구글의 에릭 슈미트, 이들이 모두 1955년생이다. 이들이 모두 나랑 동갑이라니 세상 차~암 살맛나지 않는다.^^
- 이왕 엄청난 천재들로부터 시작했으니 또 다른 천재로 이어가보자. 이번에는 탄생이 아니라 사망이다.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불세출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해가 또한 1955년이다.
1879년생인 그는 유다인이었지만 유다교 신자도 아니고 다만 범신론자였다.
- 내가 좋아하고 또한 존경하는 첼리스트 요요마 또한 나랑 동갑 1955년생이다.
- 요요마 얘기가 나온 김에 화제를 음악계로 옮기면,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에밀 길레스가 철의 장막을 뚫고 미국 데뷔 공연을 한 것 또한 1955년이다.
에밀 길레스 데뷔 공연 이후 동서 교류가 원만하지 않던 냉전 시절, 러시아 3인방(피아노의 리히테르, 바이올린의 오이스트라흐,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이 서방에 와서 연주 녹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연주가들을 통해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당시 소련의 정책 덕분이었다.
- 이제는 눈길을 다시 우리나라 안으로 돌려보자.
전설적인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이 일간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도 1955년이다.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은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 연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1980년부터), 문화일보(1992년부터)를 거치며 2000년까지 50년 간 총 14,139회 연재된 최장수 4칸 시사만화이다.
- 1955년은 또한 대중잡지 «아리랑» 이 창간된 해이고
- 용산 미8군 사령부 주둔이 시작된 해이며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1기(전두환, 노태우 등)가 임관한 해이기도 하다.
- 1955년은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 제임스 딘 영화 <이유 없는 반항> 이 미국에서 개봉된 해이기도 하다. 제임스 딘은 이 영화를 찍고 개봉되기 한 달 전에 자동차 사고로 24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 1955년은 가톨릭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해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5년 성주간 전례를 개정하면서 성삼일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성삼일을 사순 시기에서 제외했다. 예전에는 성목요일 주님 만찬부터 성토요일까지의 성삼일을 포함해 40일(6번의 주일 제외)을 사순시기로 지냈다. 따라서 오늘날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38일간이다.
- 지금까지가 내가 여기저기 채널을 통해서 수시로 수집해온 1955년의 역사 중 일부인데, 가장 최근에 나는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을 통해서 아주 흥미로운 1955년의 소사를 또 하나 발견하고 엄청 반가웠다.
- 간결한 문체로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1955년 피천득은 AFKN 라디오에서 보스턴 심포니의 75주년 기념으로 생중계되었던 하이든 교향곡 B플랫 장조를 듣다가 이태전 어느 날 밤 미국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층계에서 마주쳤던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그녀(?)를 떠올린다.
- 내가 최근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의 저자는 피천득이 1955년 AFKN을 통해 듣게 된 하이든 교향곡 B플랫 장조가 하이든이 작곡한 13개의 B플랫 장조 교향곡 중에서(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은 모두 104개이다.) 과연 어떤 곡일까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찾아낸다.
- 아! 그리고 피천득은 본관이 홍천이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인으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이며 2007년 별세했다.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뚜와네트는 1755년생으로 나보다 딱 200년 먼저 태어났다.
-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가 6살 때 아빠를 따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연주 여행을 하는데,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이지아 앞에서 연주하게 된다. 무대 앞으로 나가던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한 소녀가 그를 일으켜 주는데, 당돌했던 꼬마 모차르트는 '고마워. 어른이 되면 너와 결혼 할거야' 라고 말하여 주위를 놀라게 한다. 바로 이 소녀가 모차르트보다 한 살 많았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따라서 모차르트 1756년생으로 나보다 199년 형님인 셈이다.
- 마지막으로 앞에 소개했던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에 실린 수필 <보스턴심포니> 전문을 여기 옮긴다.
보스턴 심포니
‘재즈'라도 들으려고 AFKN에다 다이얼을 돌렸다. 시월 어떤 토요일이었다. 뜻 밖에도 그때 심포니 홀로부터 보스턴 심포니 75주년 기념 연주 중계방송을 한다고 한다. 나의 마음은 약간 설레었다.
1954년 가을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에 걸친 연구 시즌에 나는 금요일마다 보스턴 심포니를 들으러 갔었다.
3층 꼭대기 특별석에서 듣는 60센트짜리 입장권을 사느라고 장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마다 만나게 되는 하버드 대학 현대시 세미나에 나오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교실에서 가끔 날카로운 비평을 발표했다. 크고 맑은 눈, 끝이 약간 들린 듯한 코, 엷은 입술, 굽이치는 갈색머리, 그의 용모는 아름다웠다. 오케스트라가 음정을 고르고 '샹들리에' 불들이 흐려진다.
갑자기 고요해진다. 머리 하얀 컨덕터 찰즈 먼치가 소나기 같은 박수 소리를 맞으며 나온다. 지휘봉이 들리자 하이든 심포니 B플랫 메이저는 미국 동부 지방 불야성들을 지나 별 많은 프레리를 지나 해지는 태평양을 건너 지금 내 방 라디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이 가을도 와이드나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벌써 단풍이 들었을 야드에서 다람쥐와 장난하고, 이 순간은 심포니 홀 3층 갤러리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꿈 같은 이태 전 어느 날 밤 도서관 층계에서 그와 내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 미소는 나의 마음 고요한 호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음향과 같이 사라졌다. 중계방송이 끊어졌다. 7,000마일 거리가 우리를 다시 딴 세상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이든 심포니 제1악장은 무지개와도 같다.
- 피천득 «인연», 민음사
2023. 9. 17
https://youtu.be/WVZ-tr78Yew?si=c0SMcvk9HLzETfFL
하이든 교향곡 85번의 별명 '여왕'은 마리 앙뚜아네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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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