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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집을 지으라(벧전 2:4-5) - 교회적 성장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은 '갓난아이'라고 하였다. 갓난아이의 특색은 성장이다. 성장의 비결은 젖을 먹는 것이다. 그 젓을 가리켜 '신령한 젖'이라고 하였다. 신령한 젖은 곧 섞임이 없는 복음의 말씀이다.
신령한 젖을 먹음은 그리스도인 성장의 첫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두번째 단계는 '신령한 집이 세워지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는 신자의 개인적 성장을 가리킨다.
두번째 단계는 단체적 성장을 가리킨다.
신령한 집은?
1) 산돌 위에 세워져야 한다.
2장 4절에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하였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산돌이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초석」이라고 하였다.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1장 42절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하였다.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아무 쓸모 없는 돌과 같이 여겨 버렸지만(십자가에 죽였음) 그 분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하므로 머릿돌처럼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였다(벧전2:7).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다. 예수는 생명수의 반석이란 뜻이다.
베드로전서 2장 8절에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라고 하므로 심판의 돌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니엘 2장 34절에는 '뜬 돌'이라고 하므로 역시 심판의 돌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산돌'이라고 함은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를 가리킨다.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그는 자신이 살았고, 그 자신이 생명이시요, 또 생명을 주신다. 그가 견고하므로 남을 견고케 해 주시고 그에게 부딧히는 자를 부서뜨린다'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였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하였다.
'보배로운 피'(1:19)와 연관이 있는 '보배로운 산돌'이다. 다시말하면 생명의 주 예수시다. 부활의 주 예수이다.
신령한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곧 보배로운 산돌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의(義)의 원천이 된다(요16:10, 롬4:25, 8:10, 벧전1:3). 교회의 기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참된 교회의 영원한 기초이다.
2) 산 돌같이 세워저야 한다.
2장 5절에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하였다.
본문에는 '신자를 가리켜 산 돌같이'라고 하였다. 주의해야 됨은 우리는 산돌 자체는 아니고, '산 돌같다'고 하므로 산돌의 본체이신 주님 앞에 연합한 사실을 가리킨다.
어떻게 산 돌같이 되는가?
말하자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옴」으로 된다고 하였다.
2장 4절에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하였다.
'나아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신령한 연합을 이룬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생명에 연결되면,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체 곧, 그의 지체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리라」(요14:19)고 하였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므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요15:5). 신비적 영적 연합체를 가리킨다.
또 예수님은 머리요 몸이고 우리는 그에게 붙어 있는 지체라고 하였다(엡1:22-23).
특별히 에베소서 2장 20-22절에는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실을 산 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산돌' 자체요, 그리스도인은 '산 돌같이'되어 가는 것이다.
'산 돌되신 그리스도 위에 산 돌같이 세워지는 것이라. 그것은 마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이게 됨과 같다(롬11:23-24).
3)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벧전 2장 5절에서 또 말하기를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하였다.
여기 '신령한 집'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좁은 의미는 신자 개인의 마음 성전을 가리킨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의 마음은 주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하였다(고전6:19).
넓은 의미는 성령님의 교제 가운데 한 구성원 곧 지체로 이루어진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 본문에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하는 말이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지체와 지체가 머리요 몸인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연합하여 연합체의 몸을 이루는 교회를 뜻한다.
중대하고 중대한 것은 신령한 집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교회가 이 세상의 단체와 전혀 다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교회'는 '신령한 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①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이 신령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② 이 집의 기초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신령한 돌 곧 산 돌이기 때문이다. ③ 이 집에 현재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신령한 영이시기 때문이다. ④ 이 집의 성원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멤버들이기 때문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영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⑤ 이 집에서 행하여지는 일들, 곧 예배와 기도와 찬송이 신령한것 이기 때문이다. ⑥ 이 집에서 행하는 사명 곧 일이 신령하기 때문이다. ⑦ 이 집이 목표하는 최후 목적이 신령하기 때문이다. 곧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이기 때문이다.
결코 교회는 죽은 돌 위에 죽은 돌을 올려 놓은 세상의 집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산 돌 곧 부활의 영체이신 예수 생명체 위에 나아온다(방향). 그에게 세워진다(기초) 그를 위해 산다(목적).
그러므로 교회는 전체적으로 신령한 단체이어야 한다. 성령의 전적인 역사를 의존한다. 성령님의 전적인 감동 아래서 봉사하는 단체이다. 그래서 크네다너스는 「이것은 신자들이 합하여 하나님이 계실 영적 처소를 형성함인데 거기에 그가 계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며, 영적 교제의 즐거움을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성을 해치는 자는 주님 자신의 몸을 허는 자요, 대적자가 되고 만다. 결코 '신령한 집'을 세속의 집과 같이 여기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3. 신령한 제사장이 됨에 있다(벧전 2:4).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 곧 성화적 진보를 논하는 중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갓난아이로서 신령한 젖을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개인적 성장을 말한 있다.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을 세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성장 곧 교회적 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번째 성장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신령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됨에 있다고 한 것이다.
2장 5절에 「너희는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에 될지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성장 단계는 분명하다.
갓난아이가 젖을 먹고 자라서 성전이 되고, 이제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물이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는 세가지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제사장이 됨에 있다.
우리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앞에서 신령한 집을 세움에도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그 위에 산 돌같이 세워진다고 하였다.
본문에 제사장이 됨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된다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선택되고 부름받고 임직되었다.
신약의 '제사장'인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같이 된 것이다.
참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는 홀로 한분이신 대제사장이요, 영원한 제사장이요, 거룩한 제사장이시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공효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게 되므로 '제사장 같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제사장 사역을 가르킨다.
참 제사장인 그리스도는 ① 자신이 제단이었다. ② 자신이 속죄 제물이었다.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분이시다(히9:12). 그래서 그의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된 것이다. 또 자신이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그의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한다(히7:24).
그리스도인의 제사장 신분은 이미 이룩하여 놓으신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의 공효를 힘입어 그를 섬기고 봉사하는 산 제물로서의 헌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제사장이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제사장이 되라」는 말의 결론은 ① 그리스도의 속죄 공효를 힘입은 제사장 사역임을 뜻한다. ②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제사장직 사역을 말한다. ③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제사장적 사역을 말함이다.
결코 그리스도인된 제사장 직분이 속죄 제사를 위한 제사사역이 아니라, 헌신 봉사하는 복음적 제사장직임을 인식해야 한다.
2) 신본제일주의적 제사장을 가리키고 있다.
벧전 2장 5절 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라고 하였다.
여기 '기쁘게 받으실'이라는 말은 '영접한다'는 뜻의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납'을 뜻한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라는 말을 볼때
① 하나님 자신의 영존함을 알려 준다(존재).
②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예배)하지 못함을 알려 준다. 곧 예배와 봉사의 대상을 알려 준다.
③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신령한 제사(예배)들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려 준다.
④ 그리스도인의 제사 행위 곧 헌신과 봉사 행위는 결코 기복적이거나,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곧 사람의 제일된 본분(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세토록 그를 즐거워함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했다.
말하자면 신령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됨에 있다. '신령과 거룩'은 함께 따라 다니는 내용이 된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신령하고 거룩한 제사장'이시다.
(1) 그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영예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은 신령하신 분이시다. 그를 가까이 하는 자도 신령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① 신분 ② 옷 ③ 거처 ④ 음식 ⑤ 기업을 구별하고 살았다. 이것은 전문적 제사장들이었다. 저들만이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 직분을 향유하게 되었다.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다(벧전 2:9). 그래서 본문에 '제사장'이란 말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로서 제사장의 무리를 혹은 '제사장의 단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은 '만인 제사장 주의'이다. 반성경적인 중세기 로마 천주교의 교황독재주의를 도전한 사상 중의 하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가까이 직접 언제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 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다.
(2)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물을 통하여 중보적 사역을 감당하는 자이다.
제사장이란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s)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 복음의 제사장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매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역임을 말한다.
구약에 제사장들은 제물을 통하여 신약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작업이다.
(3)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제사장'이란 히브리 말 '코헨'은 '드림'을 의미했다. 곧 '바쳐지는 자'를 뜻했다. 자신을 그리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바쳐지는 사람이었다.
중대한 것은 「신령한 제사」라고 했다.
신령한 제사가 무엇인가?
① 개인적으로 몸으로 드려지는 산 제사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제물을 드리는 자였는데, 신약의 제사장처럼 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림에 있다. 몸으로 심방하고, 몸으로 봉사하고, 몸으로 전도하고 몸으로 예배함이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림이다.
② 교회적으로 드려지는 신령한 예배 곧 영적 예배를 뜻함이다.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 같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다.
여기에 '예배'라고 하는 프로스쿠네오( )는 '절하다', '엎드리다', '기치를 돌리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전인생을 드림을 뜻한다.
이 예배에는 여러 제물들이 도원되는데 ① 하나님의 영광을 비는 송축 ② 자기 죄를 자백하는 회개 ③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송, 서원 ④ 보은 행위로 드려지는 각종 물질적 예물 등이다. 말하자면 신령한 제물들이 수반된다.
'신령한 제물', '산 제물'은 제사장들에게 생명처럼 귀중하다.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이 신령한 제물이 된다. 그것은 육이 죽고 영이 살고, 육이 중심이 아니고, 영이 중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자기의 육의 행실을 죽이는 일은 언제나 신령한 제사 제물이 될 수 있다.
죠지 뮬러에게 누가 찾아 왔다. 그에게 봉사의 비결을 물었다. 조지는 대답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의 육, 육신의 소욕이 죽는 일은 산 제물이 되고, 신령한 제물이 되고, 신령한 제사장이 되는 첩경이 된다. 말하자면 '신령한 제사'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 드려지는 모든 헌신과 봉사 행위이다. 교회를 섬김이 신령한 제사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분명하다. 갓난 아이로서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람이다. 산 몸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산 몸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짐에 있다. 교회의 성원이 됨에 있다. 그리고 신령한 제사장 곧 헌신 봉사함에 있다.
4.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구속사적 예언의 성취이다 (벧전 2:6-10).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말할 때 갓난 아이라고 했다. 산 돌 같다고 했다. 신령하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다. 모두 그리스도인의 성임(聖任)과 관계되는 이름들이다. 사도는 ① 그리스도인은 갓난 아이로 ②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산 돌이신 예수 위에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③ 마침내 그 안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감에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은 구속사적 예언의 성취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바로서 신약시대에 이르러 그 예언이 성취됨을 본다고 했다. 그 예언이 성취되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2장 6절에 「경에 기록하였으되...」라고 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의 예언에 이 사실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심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다(2:6, 사26:18).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말도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함도 시편 118장 22절이나 이사야 8장14절 등의 예언 성취이다. 이 사실을 예수님 자신께서 인용하시면서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마21:42-44). 바울은 꼭같은 말을 에배소 서신에서 사용했다(엡2:20).
1) 그리스도는 믿는 신자들에게 보배가 되는 행복이다.
2장 6절에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둥이돌」이라고 했다.
여기 그리스도를 '보배롭다'고 말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구원의 존귀성을 말함이다.
2장 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 보배이다'고 했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 은사의 진귀성, 유일성, 희귀성, 가치성, 영원성을 말함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지불하신 속가가 '보배로운 피'라고 했다(벧전1:18). 흠이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했다. 죄 없으신 보혈을 뜻함이 된다.
2)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되는 행복이다.
2장 6절 중에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다. '모퉁이의 머릿돌' 곧 산 돌 위에 세워진 성전된 신자들의 행복을 가리킨다.
예수는 건축자들이 필요없다고 내버린 돌처럼 여김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렇게 비유로 나타내셨다. 그것은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나타난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는데, 실과 때가 되어 실과를 받으려고 종들을 불러 포도원 농부에게 보내었다. 그 때 주인의 종들을 맞이한 농부는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버렸다. 다시 주인은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내었으나 전과 같은 방법으로 절단을 내어 버렸다. 후에 주인은 자기 친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영접하고, 공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그가 상속자란 이유 때문에 그를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자고 했다. 마침내 그 주인의 아들은 포도원 밖에 내어 쫑김을 당하고 죽인바 되었다고 했다.
바로 이 경우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비유였던 것이다. 이 비유를 하신 다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려 주었다(마21:33-42).
예수는 하나님 왕국의 머릿돌, 주춧돌, 기초석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방인과 연합하여 그를 십자가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는 저 무덤 속에까지 버린바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좌정하시고,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유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버린 예수가 다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만 것이다. 만왕의 왕, 만유 주가 되었다. 그는 만세 반석이 되고, 견고한 반석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그를 거절하고 죽이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돌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2장 8절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고 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돌 위에 부닥치는 유물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진화론자, 자연신론자, 유상숭배자 등등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태복음 21장 44절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고 했다.
예수님 자신의 선언이다. 이 소리를 들은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킴인줄 알고 예수를 죽이려고 계획하게 된 것이다(마21:45-46).
이 사실은 십자가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진리이다. 그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십자가는 신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고, 불신자들에게는 멸망 곧 심판의 표적이요, 능력이 된다.
믿는자! 그는 예수가 보배이다. 믿는 자는 예수 때문에 부끄러움을 받지 아니 한다. 그러나 불신자는 예수 때문에 넘어지고, 예수에게 심판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저들이 순종치 않은 죄 곧 불신앙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2장 8절 하반절에 예수 때문에 「...넘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 계획이라고 하였다.
2장 8절 하반절에 「...이는 저희로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3) 아름다운 복음 선교를 하게 되는 행복이다.
벧전 2장 9절에 「오직 너희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사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4대 특권을 열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다. 이사야 43장 20절의 인용으로 혈통을 뜻하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영통 가족 곧 신생(벧전1:23)을 뜻함이다. 말하자면 '영적 이스라엘', '신령한 이스라엘'을 뜻한다. 영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뜻한다.
두번째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다. 이말은 '왕적 제사장'이란 말인데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주권을 뜻함이다. 말하자면 죄와 사망과 사탄과 세상에서의 왕노릇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주와 더불어 왕노릇할 것이다. 하늘의 천년왕국에서 되어질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주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영권 행사를 가리킨다.
모세와 그 백성들이 애굽과 애굽의 바로 앞에서 행세한 출애굽의 역사(役事), 다니엘이 다리오 왕 앞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행한 영권 행사가 그것이다.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 앞에서 행한 영권 행사나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과 그 추종자들 앞에서 행한 영적 행사가 그것이다. 사도들이 유대 공회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하게 나타낸 역권 행사이다. 바울이 여러 격전지들에서 나타낸 영권 행사이다. 실로 세상이 저들을 감당치 못하였다. 오는 말세의 증인이 받은 권세 즉 회개하는 권세 곧 굵은 베옷 입는 권세, 기도하는 권세, 예언(전도)하는 권세(계11:1-5) 등이 왕권 행사이다.
셋째, 거룩한 나라라고 했다.
역시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그의 충성된 신민들을 뜻한다. 성별된 신민들이다. 천국의 시민권자들이다(빌3:20-21).
넷째,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다.
출애굽기 19장 5절로 6절, 신명기 7장 6절, 14장 2절, 26장 5절 등의 사상이다. 친백성을 뜻한다. 특별한 백성 곧 선택받은 백성을 뜻한다. 성민이요, 선민을 뜻함이다.
이러한 특권을 받은 우리들은 「어두운데서 불러 낸 결과요」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한 결과」라고 했다. 여기 어둠은 자신 안의 세상이고, 그의 기이한 빛은 그리스도의 빛, 곧 구원의 빛, 영생의 빛, 천국의 빛이며, 우리들은 거기로 들어갈 자들이다.
그렇게 하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특권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기 「아름다운 덕」이란 이사야 43장 21절의 반영이다. 도덕적, 지적, 군사적 탁월함을 의미함인데, 예언론적 입장에서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의, 지혜, 선, 자비 등을 총칭함인데 그것은 그의 십자가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구원의 복음을 뜻한다. 그 구원의 복음을 선전 곧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제 사도는 이 부분의 마지막에 결론으로 벧전 2장 10절에서 전에는 우리가 이 행복을 모르던 자, 곧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긍휼을 받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호세아 2장 23절의 반영이다.
전에는 마귀의 백성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