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선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된 대구와 구미 사이의 경북고속도로를 달린다. 100㎞에 속도계를 맞추어 막힘없이 달리는 기분이 정말 상쾌하다. 다닐 때마다 정체가 심해 고속도로가 아니라 저속도로란 생각을 하던 그때를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좋다.
넓은 길에는 다섯 개의 차선이 그어져 있다. 1차선 왼쪽에는 노란색, 4차선 오른 쪽에는 하얀색의 실선이다. 차선을 구분하는 가운데는 모두 하얀 점선이다. 도로를 확장 개통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차선이 깨끗하고 선명하다. 차량이 한적할 때 끝없이 이어진 차선을 보노라면 가슴이 시원하다.
넓은 도로 위를 차들이 질서 정연하게 달린다. 그럴 때마다 차선을 생각한다. 차선은 끝이 없다. 차가 달릴 수 있는 도로에는 어디든 선이 그어져 있다. 선은 모양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몇 가지 다른 색깔도 갖고 있다. 차선의 모양이나 색깔은 달리는 차의 운전자에게 조금씩 다른 메시지를 준다.
노란선은 주로 중앙선과 길 가장자리 구역선, 안전지대 등을 구분하는데 사용된다. 하얀선은 차량의 질서 유지를 위해 차량의 진행을 돕는다. 점선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차선의 변경과 차량 통행의 안내 역할을 하며, 다른 옆 차량과의 접촉 및 충돌방지를 위해 차폭의 간격을 유지해 준다. 청색선은 버스 전용선이다.
차선은 말이 없다. 선 위나 옆으로 지나가는 차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주는 메시지를 운전자가 무시할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가도 말하지 않는다.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수 없이 많은 경험과 경륜을 가진 선지자의 모습으로 길에 누워 지나가는 차량들을 보고 묵시적으로 가르침을 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차선에 길들어져 있음을 본다. 운전자들은 차선이 주는 메시지에 따라 도로를 달린다. 차량이 많고 길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 곳일수록 차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리 넓은 길도 차선이 없으면 달리기가 두렵다. 늘 다니던 길도 어느 날 갑자기 공사를 위해 차선을 없애거나 다른 곳으로 변경해 놓으면 당황하게 된다. 자동차 운전 경험이 더해질수록 차선의 고마움을 느낀다.
가끔 차선을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대부분 운전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차선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차를 몬다. 옆 차선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나 질서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예고 없이 차선을 바꾸어 앞으로 달려들어 차선 따라 곱게 가는 운전자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차선을 지키지 않아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차선은 운전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차선을 지키는 것은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차선은 전문가가 도로의 사정을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하여 긋게 된다. 사거리나 오거리 혹은 육거리를 지날 때 차선의 역할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옆이나 앞으로 다가오는 차와 충돌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차선만 따라가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 경이감마저 들 때가 있다. 교통은 흐름이다. 흐름은 질서와 규정(법규)속에서 이루어진다. 도로의 질서는 차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차선을 생명선이라 말하기도 한다.
새벽녘이나 해질 무렵이면 차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차선을 원망하곤 했다. 가끔은 노안으로 변해 가는 내 눈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선명하지 못한 차선을 나무라는 경우가 더 많다. 차선이 잘 보이지 않아 불편을 겪는 경우는 비가 심하게 내리거나 차량이 많이 다니는 사거리에서도 간혹 겪게 된다. 비가 심하게 내려도 잘 보이는 차선의 재료는 없을까, 차가 아무리 많이 다녀도 닳아 지워지지 않는 재질은 없을까, 이리 저리 궁리를 해 본 경험도 있다.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이란 것을 알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경험과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나는 가끔 미명의 새벽이나 해질녘에 차를 운전하게 되면 날이 밝기 전에,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차를 빨리 몰게 된다. ‘과속은 사고의 원인’ 차를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마음이 급할수록 에둘러 가거나 천천히 가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매번 나는 서두르고, 조급증을 내는 습성이 삶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선명하지 못한 차선의 진가는 이 때 나타난다. 비가 심하게 내리든, 차선이 닳아서든, 날씨가 어두워서든 차선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차선은 나에게 차를 천천히 몰고 가라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 차선을 따라가면서 운전을 하니 자연스럽게 느리게 갈 수밖에 없고 천천히 가다보니 위험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선명하지 못한 차선을 원망하기보다 고맙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 그만큼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차선은 인생의 안내자다. 차선과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실천으로 그때그때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퇴근 하는 차 속에서 차선을 바라보며 공존과 공유의 아름다운 사회를 생각해 본다. 차선의 가치를 음미하며, 차선을 지키면서 운전할 때의 여유로운 삶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