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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시영 회장
장시영 회장은 치열한 한국 전쟁 시 참전했던 해군 군의관이었다. 장 회장은 해군인사규칙상 군의관은 모두 해군의 신분을 유지케 되어있어 해군이지 실은 해병대를 지원하여 전투부대에서 피를 흘리는 상병들과 4년 8개월을 동고동락하였다.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전투의 한 주역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 회장은 엄연히 해병대의 참전용사였으며 제주해병의 희망임과 동시 버팀목이었다.
예편 후 초대 탐라해병전우회장을 역임하였고 제주 해병혼탑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대한민국해병대 명예해병 제1호가 되었다.
□ 전라남도 도립제주의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며 희망과 기대가 컸던 그 해 12월초 24세의 장시영 의사는 제주도내의 유일한 의료기관 이었던 전라남도 도립 제주의원의 산부인과 과장을 맡게 되었다. 이 당시 원장은 오창흔이었다.
1947년 이 고장에서는 3·1사건이 발생하였고 도내에 파업사태가 확산되어 갔다.
파업을 유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파업을 종용했지만 거부하고 진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파업사태는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해결되었다.
장시영 의사는 도립병원근무를 사직하고 제주 읍 원정 통에 장산부인과를 개업하였다.
개업 후 6개월이 될 무렵 1948년 2월 27일 조천지서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내막은 조천중학교 2년생인 김용철군이 전 해에 일어난 3·1사건의 피의자로 수배 중에 있었는데 2월 24일 대흘 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를 조천지서에 연행하여 고문하던 중에 변사하였다.
그 사인을 놓고 경찰과 주민사이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사건의 검시의로 장원장이 위촉되었다.
장 원장은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검시결과를 제출하였다.
양심적인 행동이었지만 시대가 살벌하던 때이므로 불안 해 하던 중 4·3사건이 터지며 위기감은 더해갔다.
장 원장은 부산으로 가서 5월 10일 혼인을 하였다.
아내를 데리고 희망을 안고 고향 제주로 왔지만 이곳은 살벌한 얼음 판 같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장 원장 부부는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들어갔다.
□ 부산남포동에서 의원 개업
1949년 4월 의원을 개업하여 바쁜 날들을 보내는데 1950년 6.25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난민이 끝없이 밀려왔고 집을 구하기조차 어려시기였다.
7월에 제주도립병원장이었던 오창흔 선생이 찾아와 장시영원장이 개업한 의원에서 소아과를 담당키로 하여 함께 의원을 경영하였다.
어느 날 해군의무참모로 있는 B중령이 아내를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길 부탁했다.
장 원장은 그의 아내를 잘 치료해서 건강을 찾을 수 있게 했고 병실에 기거하도록 선처해주었다.
□ 해군의무실을 자원하여 개설
장 원장과 오 원장은 B중령에게 이 병원을 군인들을 치료하는 군의무실로 만들고 싶다고 하자 B중령은 해군본부에서 그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 B중령은 총참모장의 결재를 받아 오원장(45세)은 5급 문관(대위대우), 장원장(29세)은 6급 문관(중위대우)으로 대우하기로 하고 이곳을 해군본부 의무실로 지정하여, 필요한 의약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 하순이 되자 부상당한 해병들이 들이 닥쳤다.
해병은 7월에 군산·장항·이리전투와 8월에 진동리와 통영작전을 끝낸 후라 진해해군병원이 있었지만 부산에 와서 입원하는 환자도 있었다.
9월이 되자 제주출신 3,000명이 해병으로 입대하여 부산항에 들어왔다.
4·3사건 와중에도 제주젊은이들이 조국을 구하려고 출정하였다.
9월 12일 군함과 함께 제주청년들은 출정하였다.
17일 중앙동·광복동·남포동거리에 전단이 뿌려졌다.
유엔군을 비롯한 해병부대와 육군 제 17연대는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진두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완료하고 서울로 진군하게 되었고
워커 미 제 8군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 중이라 했다.
제주청년들은 12일 부산을 떠나 남해안을 돌아 인천으로 간 것이었다.
이렇게 북진을 거듭하다 연말이 되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4후퇴를 해야했다.
경인작전, 목포지구 소탕전, 원산·함흥지구전투 등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이 대거 몰려 고통을 호소하였다.
□ 해군군의관으로 임명
이런 참상을 보며 장 원장은 1951년 2월에 해군사관학교 제 13차 특교대에 입교하였다.
장시영 원장은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해병대 제1연대 군의관으로 강원도 전선에서 산과 들을 누볐다.
백병전으로 빼앗은 6월 4일~20일까지 도솔산 전투,
7월 8일~10일까지 924고지(김일성고지)와
1026고지(모택동고지) 전투 등에서 아군은 승리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희생도 많았다.
□ 당산동 소재 해병 제 2병원중대 선임장교
해병 제 1연대는 미 해병대를 따라 수도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1952년 3월 17일 장단·사천강지구로 이동하면서 해군의 최 일선 병원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한강 서쪽에 설치하여 해병 제 2병원 중대라 하였고 병원 중대장에 신예용 대위(안과, 장시영 중위와 동기생)였고 선임 장교는 장 중위가 맡았고 그 외 군의관으로 장 중위와 동기생인 김성권과 김세준 중위가 있었다.
그리고 사병은 100여명에 이르는 위생병과 행정요원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는 해병 제 4기생인 고철수(제 3대 제주도의원), 부창옥(제주 부씨 대종회장)해병도 행정병으로 있었다. 병원중대건물은 낡은 목조창고 4동이었고 치료약품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미군의 도움으로 의약품들을 창고에 가득 보관해 두어 유사시에도 걱정이 없게 되었다.
10월 2일 자정쯤 무전병이 긴급히 장 중위를 깨웠다. 전투단에서 무전이 왔는데 병원 중대는 비상 대기하라는 것이다. 그로 5분후 나팔 병의 나팔소리와 함께 포탄소리가 들렸다.
□ 아우성치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
조금 있으니 무전으로 서부전선이 터졌다. 곧 부상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다.
군 트럭 한 대에 부상병을 싣고 들어왔다. 30여명의 부상병이 누워 아우성치고 있었다.
트럭행렬은 그치지 않고 연속 들이 닥쳤다.
일시에 300여명이나 들이닥쳐 침대는 부족하였고 군의관은 장 중위를 비롯한 3명뿐이었다.
수많은 부상병들은 일선에서 소속, 계급, 군번, 연고지를 써서 목에 메달아 시급히 쓴 환자명부가 함께 도착했다.
제 1대대와 제3대대병사들이 많았고 그 중에 제주출신청년들이 많았다.
치료의 우선순위는 경상자를 우선 치료하여 원대 복귀시키고 중상자는 나중 치료하라는 명령이었다.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후방병원으로 후송대책을 세워 인천외항에 덴마크병원선과 진해해군 병원으로 일부 후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후송열차 배정도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이승만대통령이 병원중대 시찰
분주한 며칠을 지나 이승만대통령 일행이 부상병을 위문하러 왔다.
대통령은 처참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병들을 살펴보고 대통령과 영부인도 안타까워 눈시울을 붉혔다.
병원 천장은 선반이 없고 그대로 서까래위에 지붕뿐으로 가을바람이 싱싱 들어왔다 나갔다하고 있었다.
□ 답십리에 제 5해군병원 설치
다음 날 저녁 해군본부의무감이 당도하여 대통령이 서울특별시장에게 병원중대가 건물이 열악하니 빨리 나은 건물을 물색하여 옮기도록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이래서 서울특별시에서 알선해준 건물이 바로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소재한 전 연초제조창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해군본부 공병감실에서 약간의 수리를 한 후 해병 제2병원중대를 이전시켰다.
그래서 제5해군병원으로 승격하고 김정수 중령이 병원장이 되었고 내과과장에 김종석 소령, 외과과장에 백기오(서울백병원 원장을 하다 문관을 거쳐 현역으로 특별임관)소령이 부임했다.
이 때 장 중위는 외과의 군의관이 되었다. 이 제 5해군병원도 해병대 전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병원으로 이 시기가 10월 25일경인 듯하다. 그것은 10월 31일 오후 10시에 또다시 중공군의 제 2차 추계공세가 있었는데 이 때 부상당한 병사들은 제 5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성중인 간호장교가 처음 배치되었다.
그 때 가장 부상자가 많았던 것은 갓 보충 받은 신병과 제주출신 해병들이었다.
이렇게 제 5해군병원에서 6개월 정도 근무하다 대위로 승진하고 1953년 5월 다시 일선으로 지원해 나갔다.
이번에는 해병전투단 의무대대로 발령되었고 포병대대(대대장 소령 고상하)에 파견을 나갔다.
그 의무대는 155고지(도라산)옆의 벙커였다. 중공군포탄이 지근거리에서 작렬하는 위험 속에서 2개월을 보내니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 무려 3년 1개월 2일 18시간의 전투는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해 멈췄다.
□ 휴전 후 해병 포병대대 의무대장으로
휴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된 후 전투단본부는 파주 군 금촌으로 이동하여 포병대대는 금촌의 야산 동쪽에 자리 잡았다.
더불어 10월 17일 해병전투단이 여단으로 승격되고 여단장에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소장이 임명되었다.
해병포병대대는 연천에 가서 미군 및 한국육군과 더불어 실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장대위도 군의관으로 따라가서 만약의 경우 부상자치료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파주 군의 벽지마을은 근대 의료시설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질병이 창궐했고 치료한번 못하고 면역이 약한 노약자나 어린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장 대위는 농어촌 순회 진료에 나서 치료하고 예방주사를 놓아 주는 등 주민건강을 살폈다.
정전이 되면서 부상병은 많지 않았다.
장 대위는 불현 듯 전쟁 때 출전한 제주해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1950년 9월초 부산 제 1부두에서 보았던 어린 소변해병들 3,000명 중에 돌아오지 않는 해병들도 상당 수 있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갔고 고향땅 충혼묘지에 묘비가 세워졌다. 또한 부상을 입은 용사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제주 소재 제 3해군병원으로
그들은 야전의무실이나 제2병원중대 제 5해군병원에서 장대위의치료를 많이 받았다. 지금 수소문해보니 제주에 있는 제 3해군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장대위는 제 3해군병원전속을 희망하여 1955년 5월에 정든 제주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4·3사건으로 쫓기듯 고향을 떠나 7여년 만에 대한민국 해군대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 3해군병원 본원은 동문통 후생의원 자리에 있었고 병동은 제주농고 운동장에 퀀셋을 12동이나 지어 그 속에 부상병을 정양하였다.
1개동에 20여명이 들어갔으니 240여명 전우가 있었다.
당시 병원장은제 5해군병원 외과과장을 지낸 백기오 중령이었다.
이곳에서 6개월간 근무하고 장대위는 4년8개월 만에 예편하여 제주시 원정통에 장산부인과의원을 개업하였다.
□ 해병혼탑 건립
해병혼탑은 탐라해병전우회(회장 고철수)에서 해병 제주막사장 이서근(해간1기) 중령과 상의하여 제주시 동문로터리에 건립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건립 추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기로 하여 위원장은 장시영 선생을 추대키로 하였다.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유지와 참전 전우들이 동참하여 50만원, 해병대사령부에서 50만원, 장시영 위원장이 150만원을 지원하여 총 250만원으로 대영토건주식회사 박승옥 사장과 공사계약을 맺었다. 이 탑에 취지문은 문상률선생(해병 제 4기)이 초안한 것을 장시영 위원장이 수정, 보완하여 확정하였고, 비문은 전국에 공모하여 수합한 것을 장시영 위원장과 장재성
선생이 취사선택하여 문안을 만들었다. 정면의 해병혼의 휘호는 유명한 서예가인 청탄 김광추 선생이 쓰셨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1960년 4월 15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 탑은 제주인의 기상이며 제주사의 상징물이 되었다.
숭고한 뜻을 후세들이 기려야 할 것이므로 지금도 4월 15일 해병대창설 기념일과 9월 1일 제주해병의 날에 참배 장소가 되고 있다.
발췌>정수현,[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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