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 베트남 재구촌에서 작전 중인 한국군. 필자는 사진 맨 오른쪽에서 무전기를 메고 있다.
1971년 재구촌(在求村)에서
추석 전에 부산에서 작가 겸 스토리텔러로 일하는 딸로부터 전화가 와서 제 어릴 적 사진 몇 장을 찾아 달라고 했다. 아내와 함께 오래된 앨범을 뒤지다가 뜻밖에도 내 기억과 함께 모두 잃어버린 줄로 생각해왔던 베트남 전쟁 시절의 사진 몇 장을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대부분 영내에서 찍은 일상의 사진이라 몇 장을 넘기다가 전장에서 동료와 함께 찍은 구겨진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사진 뒷면을 들여다보니 “1971년 12월 재구촌에서”라고 적혀있었다.
지금도 태능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가면 교정에 고 강재구(姜在求, 1937~1965, 육사 16기) 소령의 동상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여 부하를 살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표상으로 서 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강원도 홍천 인근의 부대훈련장에서는 당시 베트남전 파병을 앞둔 수도사단(맹호부대)의 제1연대 3대대 10중대장이었던 강재구 대위가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선 중대원 가운데 한 명인 박이천 이병이 안전핀을 뽑고 잘못 던진 실수로 수류탄이 높이 치솟아 뒤에 있는 중대원 쪽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가 피신할 시간도 없었을 그 순간 강 대위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고 곧 폭음과 함께 주검으로 산화했다. 강재구 소령(추서)은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로 여러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주월군은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주월 맹호 1연대 3대대를 ‘재구대대(在求大隊)’ 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재구대대는 주월 맹호부대의 최북방 취약지를 담당하여 빈딘성(binh-dinh省) 푸캇 지역의 1번 도로 부근에 자리 잡고 푸캇 산악과 고보이 평야 일부를 작전지역으로 했다.
베트남 전쟁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웬만한 정보력으로는 베트콩과 양민의 구분이 불명확하여 타격 목표가 수시로 변하는 게릴라전이다. 따라서 베트콩과 양민을 분리하지 않으면 양민학살의 누명을 뒤집어쓸 수 있고,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느슨하게 대처하면 자칫 아군 희생의 위험성이 높아 이 문제는 작전 때마다 고민거리로 등장한다.
1968년경 당시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대민 심리전의 목표와 함께 작전 시 유의사항의 하나로 예하 부대에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취지의 훈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재구대대장으로 있던 노태우 중령(전 대통령)은 양민의 희생을 줄이면서 한국군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대민접촉을 확대하여 실질적으로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베트남전 최초로 부대 부근 평야 지대에 민간인 정착촌인 재구촌을 세웠다.
내가 베트남에 파병된 것은 1971년 7월이었는데 내가 소속한 맹호 1연대 9중대는 재구대대 본부와 같은 영내에 주둔하였으므로 전투가 없을 때는 1번 도로 수송로 확보와 재구촌 보호 경계근무에 투입되었다.
재구촌 주민들은 한국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깊은 밀림이나 푸캇 산간지역에서 소개(疏開)한 양민들로 주로 농사를 짓거나 돼지 등 가축을 치면서 때로는 한국군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베트남에 도착할 즈음부터는 베트콩이 수시로 이 마을에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다. 심지어 세를 더한 베트콩은 대담하게도 이 마을 부근 밀림 속에 숨어 우리 부대 베이스를 향해 박격포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여 우리의 대응 포사격(원점타격)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 중대는 한동안 주간에 1~2개 분대 규모의 병력이 번갈아 가며 이 마을에 주둔했다가 일몰 후에는 민병대에 마을을 넘긴 후 철수하곤 했다.
당시 재구촌에는 ‘린다’라는 미국식 이름을 가진 베트남 아가씨가 모친과 함께 간단한 생활용품과 과자류를 파는 잡화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피부색이 희고 눈이 크며 예뻐 우리는 부대에서 공급하는 일용품이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그 가계를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46년이나 지난 올해 7월에 내 형제와 가족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는 일정이 여의치도 않았지만, 베트남 패망 이후 마을이 온전할 리 있겠냐며 지레짐작하고 재구촌 까지를 방문하지 않았다가 지금에야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우리 소대장은 재구촌 경계에 나가는 병력의 군장을 점검하면서 대대 정보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늘 주의를 환기시켰다.
“린다는 적의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도 하지만, 우리 정보를 적에도 주는 이중 스파이야. 그 가계를 이용해 주기는 해도 말은 조심해야 해! 그 여자는 한국말에 아주 능통하다. 알겠나?”
고 강재구 소령과 재구대대, 그리고 재구촌에서의 기억들…. 지금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강재구 소령이 산화할 당시 입고 있던 군복 상의 호주머니에 들었던 작은 성경책 한 권이 유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경의 펼처져 있는 페이지의 한 구절에 빨간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이종관(45회-용산-대구)저도 청도에 이사 와서야 고 이인호 소령이 청도분인줄 알았습니다. . 청도읍 고수리에서 출생하여 해군사관학교(11기)를 졸업하고 해병 사단 소대장·수색 중대장 등을 거친 다음 베트남 전쟁에 청룡 부대 3대대 5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베트남 투이호아 지역에서 동굴을 탐색하던 중 베트콩이 중대원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자,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부하들을 대신해 전사하셨습니다. 지난 7월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다낭 해변에 있는 청룡부대 주둔지를 보면서 이인호 소령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모교 청도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그를 기리는 현충비가 서 있습니다.
첫댓글 저는 81년5월 홍천 11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시절에도 훈련소내에 재구탑이 있었는데 강재구소령이 여기에서
수류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조교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청도출신 이인호소령을 비롯하여 이종명 대령의 살신성인 정신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강재구 소령의 고향은 인천입니다.
@김진태(호방) 이인호소령 고향이 청도인데 착각했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이종관(45회-용산-대구) 저도 청도에 이사 와서야 고 이인호 소령이 청도분인줄 알았습니다. .
청도읍 고수리에서 출생하여 해군사관학교(11기)를 졸업하고
해병 사단 소대장·수색 중대장 등을 거친 다음 베트남 전쟁에 청룡 부대 3대대 5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베트남 투이호아 지역에서 동굴을 탐색하던 중 베트콩이 중대원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자,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부하들을 대신해 전사하셨습니다.
지난 7월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다낭 해변에 있는 청룡부대 주둔지를 보면서 이인호 소령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모교 청도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그를 기리는 현충비가 서 있습니다.
지금 군인들을 못믿는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죽을수도 있는 전장으로
돌격 앞으로 명령 떨어지면 얼마나 앞으로 나아갈지 사실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