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1. 24. 일요일
『대유행병의 시대』-The Pandemic Century
마크 호닉스바움 지음/ 제효영 옮김
2020. 8. 19./ 로크미디어/ 628쪽
이 책은 스페인독감부터 코로나19까지 한 세기 동안 발생한 전염병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의학 역사가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와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세균 이론이 구축되고 세균 감염 질병의 백신이 탄생하는 토대가 만들어진 이후, 바이러스와 여러 전염성 병원체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이 발전해도 의학계가 이와 같은 생태학적, 면역학적 통찰을 어떻게 놓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유행병으로 번질 위험이 그대로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 왜 벌어지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유행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면서 병원체의 실체를 밝히려는 연구와 실험을 해나간 의학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의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공유함으로써 대유행병 확산 억제를 위해 촌각을 다투며 대처해 나가는 세계적인 의학 공조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바이러스와 인류는 앞으로도 계속 경쟁하면서 서로 진화할 것이며 공존할 것이다. 다만, 인류의 급속한 팽창과 소비 증가로 인한 생태계 변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인해 바이러스와의 생태학적・진화적 균형이 깨져감에 따라 치명적인 바이러스 변이의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 우려되는 점이라 하겠다. 의학이 날로 발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저자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지난 전염병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앞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발생 주기가 짧아질 새로운 대유행병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인류의 집단 지성이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 일깨워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문 중에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조지 버나드 쇼가 《의사의 딜레마》에서 밝힌 견해를 새길 필요가 있다. “질병과 관련된 특정 미생물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인지도 모른다.” 이 말에 담긴 원칙을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하면, 감염질환에는 거의 대부분 보다 폭넓은 환경적, 사회적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병원균이 생기고 확산되는 생태학적, 면역학적 요소와 그 병원균의 동태와 관련된 요소를 감안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러한 요소를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병원균과 질병과의 연관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 p.18
르네 뒤보는 인간을 “마법사의 견습생”에 비유하면서 의과학 분야에 형성된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동력”은 언젠가 의학의 유토피아를 이룩하겠다는 꿈을 깨뜨리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인은 과거부터 진화를 이끌어 온 자연의 힘을 스스로 거의 완벽히 통달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생물학적, 문화적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환상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엄청나게 복잡한 생태계의 일부이고, 무수한 고리로 얽혀 있는 생태계의 모든 구성요소에 묶여 있다.” p.19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각각의 유행병은 위와 같은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측면을 보여 준다. 의학계와 과학계에 구축돼 있던 지배적 패러다임과 확신을 유행병이 어떻게 약화시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병의 원인을 찾을 때 더 폭넓은 생태학적 통찰 대신 특정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어떤 위험한 결과가 초래되는지 볼 수 있다. …… 나는 각 유행병 사태가 대부분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는 방식으로 ‘알려진 지식’과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지식’을 찾기 위한 탐구를 어떻게 촉발하는지도 설명할 예정이다. 더불어 과학자들,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앞으로 이와 같은 인식론적 맹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p.23
뒤보가 밝힌 통찰을 병원균의 생태학적 특성에 적용할 때, 나는 병이 생기는 경우 대부분은 생태계의 평형 상태가 깨지거나 환경이 병원균의 지속적 생존이 가능한 곳으로 변형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p.24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세계 무역과 세계 여행이 가능해졌고 신종 바이러스와 그 매개체는 계속 국경과 표준 시간대가 다른 지역을 넘나들고 당도하는 곳마다 전과 다른 생태학적, 면역학적 요소가 조합된 환경과 만난다. p.26~27
전 세계적으로 폐렴균의 아형은 80종이 넘는다. 그리고 종류마다 캡슐의 조성이 다 다르다. 이러한 폐렴균은 대부분 코와 목에 병을 일으키지 않고 머물러 있지만, 인체 면역기능에 문제가 생기거나 홍역, 독감 등 다른 병이 생겨 면역기능이 약화되면 위력을 떨치기 시작하고 폐에 치명적인 감염이 발생할 수 있다. p.34
1918년에 독감이 퍼져나간 이야기는 전 세계에 총성처럼 울려 퍼졌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태는 런던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로 끝나지 않고 곳곳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 최근에 나온 추정치에 따르면 당시의 독감 유행으로 인도 아대륙 전체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1,850만 명이다. 전 세계 사망자 수는 최대 1억 명으로 추정된다. …… 그야말로 전 지구를 덮친 재앙이었다. p.76~77
DNA와 달리 RNA에는 오류 발생 시 정확하게 교정되는 기전이 없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동물 세포에 침입하여 대량 증식을 위해 복제가 진행되는 동안 RNA에 사소한 복사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이는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H와 N 분자의 유전학적 돌연변이로 이어진다. 다윈주의를 적용할 때 이렇게 복사된 바이러스 중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한 종류가 생길 수 있다. ……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면 인체 면역계가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단백질로 암호화된, 전혀 새로운 바이러스 아형이 생긴다. 전체 인구군 중에 항체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그런 바이러스가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감의 유행은 이러한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 p.81~82
사실 자연의 야생 서식지를 침범해서 거주지를 꾸준히 확장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 균형을 깨뜨리는 가장 큰 위협 요소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페스트는 소규모로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종류는 최소한 가래톳 페스트가 될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다. p.145
버넷은 1940년대에 이르러 인구 과잉 문제에 국제 무역과 항공 여행이 더해지면 자연계의 생태 환경이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받고 이 같은 병원체의 방출 사례가 점점 흔한 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p.202
항생제와 백신으로 이제 감염질환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여겨지던 시기에 터진 재향군인병은 세균 없는 시대가 시작됐다고 확신한 미국의 의학적 자신감에 걸림돌이 되었다. CDC(Centers for Disease Control)가 이 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p.246
레지오넬라 뉴모필라는 수백 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지만 인간이 도시를 짓고 상하수도 설비나 온수 시설이 실내에 갖추어진 건물을 세워서 새로운 생태학적 틈새를 제공한 후부터 번성할 수 있었다. 냉방 시설과 샤워 시설, 가습기, 분무 설비 등 호사스러운 다른 설비가 추가된 것도 이 세균이 미세한 입자에 실려 우리 몸의 기도에 자리를 잡는 효율적인 방식을 선사한 셈이 되었다. 의사와 공중보건 전문가 모두 현대의 대도시 중심에 이 고대의 생물체가 존재하고 병리학적 위협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년이 더 걸렸다. p.261~262
에이즈의 대유행은 재향군인병보다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제 의학이 감염질환을 거의 다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거두게 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 에이즈는 1980년 천연두 근절 이후 과학계와 공중보건 당국이 기쁨에 젖어 간과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병원체는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끊임없이 돌연변이가 생긴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인간이 사회적, 문화적 행동 변화를 통해, 또는 환경, 동물, 곤충의 생태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미세기생체에 강력한 진화적 압력을 가한다는 점이다. …… 에이즈도 인간이 ‘바이러스의 이동’ 규칙을 바꿔놓지 않았다면 아프리카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표현을 처음 만든 바이러스학자 스티븐 모스는 원숭이에 감염되던 HIV의 전구체 바이러스가 새로운 종간 이동 기회를 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증식될 수 있도록 만든 환경적,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도로와 철도의 발전과 국제선 여객기의 운항도 이 규칙을 바꾼 요소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p.325~326
닭과 오리 모두 조류독감을 돼지에게 옮길 수 있다. 돼지는 인체에 감염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도 동시에 감염될 수 있으므로 조류와 사람에게 각각 감염되는 독감 바이러스가 재조합될 수 있는 이상적 터전이 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인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돼지의 몸속에서 유전자를 교환하고 표면 단백질이 재구성되는 과정이 일어나며 그 결과 탄생한 새로운 잡종 바이러스로 인해 대유행병이 시작된다고 추정한다. p.340~341
에이즈가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행위와 더욱 빨라진 국제 이동 수단이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감염돼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면, 사스는 이국적인 동물을 단백질원으로 삼으려는 수요와 21세기에 더 빨라진 국제 항공 여행의 속도에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지 보여 준다. p.378
사스가 남긴 교훈은 더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터넷과 웹 크롤링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WHO가 세계 여러 나라의 보건 당국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질병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정부기관이 발병 사실을 감추려고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보가 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부각됐다는 것이다. p.379
사스의 동물 숙주가 늘 존재한다는 사실은 앞으로 또다시 감염 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그사이 전 세계가 경계해야 할 진짜 위협은 항원의 관점에서 이제껏 나타난 적 없는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사스가 효과적으로 통제된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중대한 위험 중 하나는 현실 안주다” 앤더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한 번 성공했으니 다음에도 또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러지 못할 수 있다.” p.381~382
의료진 중에 가장 먼저 쓰러진 사람은 칸의 동료 알렉스 모이그보이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이그보이는 에볼라 진단을 받았고 2014년 7월 19일에 사망했다. 병원 사람들이 사랑을 듬뿍 받던 수간호사 엠발루 J. 포니도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말라리아 치료제와 정맥으로 수액을 공급하는 것 외에는 칸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결국 포니는 7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부터 칸도 몸이 안 좋아졌다. 혹시 몰라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그는 에볼라 양성 판정을 받았다. …… 칸은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전,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 칸의 사망 소식은 시에라리온 의료계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고, 여파는 프리타운까지 전해졌다. 칸의 죽음은 에볼라와 맞서 싸우던 최고 권위자, 어니스트 바이 코로마 대통령이 “국가의 영웅”이라고 칭한 인물을 잃은 비극이었다. p.414~417
결국 큰 변화는 국제 사회의 자원이 추가로 동원된 후에 일어났다. 에볼라 사태가 지속되면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한 UN 사무총장은 2014년 9월 19일에 ‘유엔 에볼라 긴급대응단(UNMEER)’을 발족했다. …… 미 의회에서는 에볼라 해결에 54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투입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2015년 3월까지 영국, 프랑스, 미국은 군 자원을 상당한 수준으로 동원했다. 전 세계 20개국 이상에서 의료보건 인력과 감염자의 접촉 경로를 추적할 인력 수천 명이 서아프리카로 가서 “환자 0명 만들기” 노력에 힘을 보탰다. 이 같은 노력에도 WHO가 에볼라 유행이 종결됐음을 최종 발표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p430~431
수많은 전문가가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20세기 초,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발생한 첫 번째 대유행병인 스페인독감에 비유하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100년 만에, 어떤 역사가도 상상할 수 없고 어떤 소설가도 감히 지어내지 못할 만큼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진 것이다. p.515
2019년 말 CEPI(전염병 대비 혁신연합)는 알려진 병원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병원체로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신종 감염질환에 대비할 수 있는 혁신적 백신 개발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롭게 인지했다. 같은 해 초에는 세계은행과 WHO가 대유행병 발생 시 전 세계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조사한 연례 점검 결과를 발표했다. …… 현재의 발생률을 토대로 할 때 점점 더 우려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5,000만 명에서 8,000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 세계 경제의 약 5%를 휩쓸 대유행병을 일으키는 호흡기 병원체가 나타난 위험성이 아주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조사 위원회는 이렇게 경고했다. p.524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 상실은 이미 충분한 경고가 있었던 만큼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경고를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바이러스학자와 다른 전문가들이 예고한 대유행병에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총체적 실패이며 이런 상황을 가속화시킨 무사 안일한 정치인들이 빚어낸 결과라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어리석은 일이 없기를 바란다. p.536
이제는 전문가들도 의학적인 예측에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파스퇴르가 살던 시대부터 알려진 것처럼 미생물이 워낙 크게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이 끊임없이 미생물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차지하고 지낼 수 있는 새로운 생태학적 환경, 다른 장소로 퍼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지만 그런 사실은 보통 발병 사태가 벌어진 후에야 명확히 드러난다. 최근에 발생한 대유행병과 유행병 상황을 보면 가속도가 붙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IV와 사스가 비상 알람이었다면 에볼라와 지카, 코로나19는 위기가 사실임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p.539
데이비드 모렌스와 제프리 토벤버거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대유행병이 될 수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여러 번 지속적으로 일으키며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 본질적으로 빈틈이 있음을 드러냈다. (……) 이러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독감 대유행을 예측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예방할 수 있는 적절한 계획을 수립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지난 100년간 발생한 유행병을 되짚어 볼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새로운 전염병, 새로운 대유행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이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지가 문제다. 카뮈의 말이 옳았다. 전염병은 예측할 수 없을지언정 반드시 되풀이된다. p.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