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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장 終末을 향해서
혁련정관(赫蓮正官)은 단애 위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애검(愛劍)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의 희귀한 벽라온옥(碧羅溫玉)으로 만들어진 한 자루의 검(劍),
"네가… 이제부터 네가 잘 해주어야 한다."
사태는 최악(最惡)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强)했다.
순식간에 제왕장성의 수비대는 반이나 쓰러졌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언뜻 시선에 들어온 것은
느닷없이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제삼수비대장(第三守備大將)과
땅을 향해 허무하게 엎어져 가고 있는 제오수비대장(第五守備大將)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토록 믿었던 자신의 무수한 수하들이 허공에 피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으아악!"
"크악!"
피(血)!
피가 폭죽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크하하하… 제왕장성의 불나방 같은 자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모조리 전멸시켜라!"
고함,
그리고 비명 소리,
꽃검 꿰이듯,
도검(刀劍)에 목, 가슴, 배를 찔리고 넘어지는 제왕장성의 고수들…
대세(大勢)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창궁무벌과 혈해사천의 고수들……
둥! 둥! 둥!
장엄한 북소리를 앞세우고 서서히 원을 그리며
제왕장성의 고수들을 압축해 오고 있었다.
천하(天下)를 위해 우정(友情)을 버렸고,
중원(中原)을 위해 정의(正義)를 배반했다.
생존(生存)을 위해선 위선자(僞善者)가 되어야 했으며,
보다 완벽한 위선(僞善)을 위해 살인자(殺人者)가 되어야 했다.
정말이다.
황금(黃金),
명예(名譽),
절대권력(絶對權力),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태어나서 울고 웃고 살아온 이 땅,
또 우리가 죽어가야 할 이 땅,
중원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러한 내 행위를 용납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본좌를 영웅(英雄)으로 추앙하던 네놈들이
오늘은 가증스런 살인자(殺人者)로 매도하고 있다.
좋다!
본좌를 살인자라고 하자!
가증스런 위선자(僞善者)라고 치자!
그렇다면 네놈들은 뭐냐?
선(善)?
웃기지 마라!
정의(正義)?
사기치지 마라!
영웅(英雄)?
유치한 수작마라!
네놈들의 그 풍요한 뒤안길에는 한 사내의 삶이 무참히 구겨지고
허무하게 녹슬어 참담하게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네놈들은 기억(記憶)해야 한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능욕보다도 더 치욕스런 나날들을 맨살로 부딪치며
이빨로 짓씹어 삼키던 한 인간의 참담한 삶을 네놈들은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
한 자루의 장검이 마치 독사(毒蛇)의 혓바닥처럼 흔들렸다.
"알겠느냐? 이것이 바로 나다."
"아버님…"
"누구도…"
무림제왕이 한 걸음 움직였다.
"천하의 그 누구도…"
땅이 패이고 지면이 흔들렸다.
"나 대존(大尊)을 심판할 자격은 없다!"
근처의 나뭇잎들이 미친 듯이 휘말려 올라갔다.
"설사… 야접 설화린일지라도… 복수를 할 망정 본좌를 심판할 수는 없다!"
무림제왕의 십여 장 반원 내의 모든 물체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설사 설천상 대형(大兄)이 다시 살아나온다 해도…
나, 대존을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꽈르르르…
무림제왕의 신형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본좌의 생각은 옳았다. 오늘로써 관외사세(關外四勢)는 중원에서 사라진다.
이는 본좌의 이십년(二十年) 혈계(血計)…!
너는… 너는 이 아비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파앗--!
무림제왕의 신형은 빛살처럼 혈전장(血戰場)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을 떠는 청지의 귀엔
무림제왕의 무거운 음성이 벼락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죽지마라!
청지는 가슴을 꼭 끌어 안은 채 꼼짝도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부친의 뒷모습에 서린 저 고독한 기운은 무엇인가?
보는 이의 가슴을 설움으로 한없이 적셔내는 저 허무는 무엇인가?
무엇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그녀의 가슴을 치밀고,
온 몸에 몸서리쳐지도록 스며든 그것은 이내 그녀의 두 눈을 붉게 충혈시켰으며,
급기야 청지는 뜨거운 눈물을 와르르 쏟아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어 앉았다.
"아버지--!"
그것은 두 얼굴을 지닌 채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가혹한 운명과 그 참담했던 삶에 대한 동정과 연민,
거기에서 비롯된 위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요란한 말발굽 소리,
번뜩이는 도검(刀劍),
살기로 희번득이는 시선,
그것은 일대장관이었다.
혁련정관은 조용히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집을 땅에 툭 던지며 중얼거렸다.
"이제… 검집 따위는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싸움이며 또 승산(勝算)이 없다는 것을…
"무적패왕권(無敵覇王權) 사마웅(司馬雄)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어떠한 작전(作戰),
어떠한 용병(用兵)으로도 제왕장성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죽어가는 거다. 모두…!
지연작전으로 부질없는 삶을 연장시키는 것 보다는
불꽃처럼 싸우다 불꽃처럼 죽어가는 거다."
문득 그는 혈전장(血戰場)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벌판을 빽빽이 메우고 있는 혈해사천(血海死天)의 고수들 한가운데에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가냘픈 몸매의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 보기에 그것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일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목과 가슴을 부둥켜 안고 쓰러지는 사람들…
"청지… 제법이구나."
혁련정관의 입가에 한줄기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한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가녀린 어깨에서 핏줄기가 쭉 뿜어져 나왔을 때,
청지의 신형은 쓰러질 듯 휘청했다.
"와하하하… 젖비린내 나는 계집, 네년의 껍데기를 벗겨주마."
맹렬하게 짓쳐들어오는 적안염제 막위강(幕葦剛)의 검을
무의식적으로 막으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끝났어… 제왕장성은 이제 끝장이 난거야…"
바로 그때다.
문득 그녀는 등에 한 사람의 몸이 닿아오는 것을 느꼈다.
"사형…?"
"맞아, 나야. 상처는 좀 어떤가?"
"아직 버틸만 해요."
등과 등을 맞대니 한결 적을 상대하기가 쉽다.
"성주께선…?"
"서쪽 진영을 막고 계세요."
"상황은 어떤가?"
"거의 절망적이예요."
막위강의 검이 무섭게 내리찍어 오고 있었다.
청지는 안간힘을 다해 검을 머리 위로 올려 막았다.
깡!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조금도. 누구나 언젠가는 맞는 죽음이예요…"
"그가 보고싶지 않은가?"
혁련정관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청지는 안다.
갑자기 청지의 두 눈엔 이슬이 맺힌다.
"보고… 싶어요."
"행복한 녀석이군."
"누가요?"
"설화린… 그녀석 말이야."
"후훗…"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군."
"왜요?"
"죽음을 눈 앞에 둔 여인의 사랑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어도 울어 줄 여인조차 없는 사내도 있으니 말이야."
순간 청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막위강의 검이 독사처럼 그녀의 어깨를 찢고 지나갔다.
"다쳤나?"
"아아뇨…"
청지는 찢어진 어깨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미안해요, 사형. 사형은 참으로 좋은 분이예요.
그가 없었다면… 난 사형을 사랑했을 거예요."
"후후…"
혁련정관은 툴툴 웃었다.
그러나,
이 순간 춤추듯 검을 휘두르는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너를 다시 만나 기쁘다. 영원히 못만날 줄 알았는데…"
"사형…"
"됐다. 이제… 성주께 가봐. 이곳은 내가 맡는다."
"사형…"
"누군가는… 지켜 드려야 해, 마지막 모습을… 어서 가. 이곳은 걱정 말고…"
"사형…"
이번 싸움에서는 아무도 살아 남을 수 없음을 청지는 알고 있었다.
"뭣하고 있어? 빨리 가라니까…"
"그럼…"
청지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영롱한 시선으로 혁련정관을 올려다 보았다.
"몸조심 하세요, 사형…"
이것이 부질없는 당부임을 청지도 혁련정관도 모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후면 죽게 될 것이다.
혁련정관은 씨익 웃었다.
"청지… 너도…"
청지의 두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는 눈물을 혁련정관은 보았다.
"어서 가라… 어서…"
"그럼, 사형… 나중에 또…"
청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휙 신형을 날렸다.
"청지…"
검을 휘두르며 혁련정관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뼈에 새겨 두기라도 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청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때다.
분명히 막았는데 그 막은 검을 밀치고 들어오는
새파란 독사의 혓바닥과도 같은 칼날을 혁련정관은 보았다.
그 혓바닥은 정확히 그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윽…"
혁련정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새파랗게 날이 선 한 자루의 검(劍)이 그의 등을 꿰뚫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마침내 잡았다!"
적안염제 막위강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멈춰라!"
온 산야를 쩌렁하게 외치는 엄청난 외침이 들리는 순간,
그 아득한 곳을 유성처럼 날아 떨어지는 한 명의 인영을 막위강은 보았다.
그 모습이 시야에 쏘아져 들어온다 싶은 순간,
그는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그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것과
빗살처럼 치달려 온 한 인영이 쓰러지는 혁련정관의 몸을 안은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화린…"
혁련정관의 얼굴에 조용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와 주었군… 정말… 고마우이."
"안돼--!"
설화린은 혁련정관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외쳤다.
"죽지마라! 정관… 죽으면 안돼."
그러나 혁련정관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했다.
그의 말은 그러나 입 속에서만 맴돌뿐 입 밖으로는 나와주지 않았다.
설화린은 그의 머리를 조용히 안아 들었다.
비로소 그의 입술이 열렸다.
"화린… 청지를… 그녀를… 울리지… 마라."
이것이 이 시대(時代)의 청년제일고수(靑年第一高手)가 남긴 한 마디였다.
혁련정관의 머리는 스르르 꺾이는가 싶더니 이내 푹 떨어졌다.
설화린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혁련정관의 시신 앞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남겨 놓았다.
그것은 복수(復讐)였다.
"멋진 수하에 멋진 용병(用兵)… 위지주천,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무림제왕은 툴툴 웃었다.
위지주천의 작전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면서도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무림제왕과 일천여 제왕결사대(帝王決死隊)는
여지껏 신속 은밀한 작전으로 어떤 싸움에서든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설마 이 세상에서 자신이 거느린 제왕결사대 보다
더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무리들이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령같은 무리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가 동으로 가면 동(東)에서,
서(西)로 가면 서쪽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무리들에 의해
결국 기습과 속공을 원칙으로 하던 그의 제왕결사대는
엉뚱하게도 거꾸로 적에게 기습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만약 청지와 무적패왕권 사마웅(司馬雄)이 제 때에 원군(援軍)을 와 주지 않았다면
제왕결사대는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허헛… 사마웅, 그대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오."
그러나 사마웅과 청지의 표정은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존주, 일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
"지원을 약속했던 북해성궁(北海聖宮)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야접의 혈야회(血夜會)도…
이제는 탈출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이 상황에선 야접의 혈야회와 북해성궁이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해도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림제왕은 비장한 표정으로 근처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 외쳤다.
"들으라! 우리는 지금 일찍이 처해보지 못한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기로 마음먹은 자는 살 것이니…
위대한 제왕장성의 용사들이여, 모두 죽기로 싸우자!"
"와아--!"
배수진(背水陣)이었다.
옛날 한신(韓信)이 그러했듯
생(生)과 사(死)를 대전제로 필사의 돌진을 감행한 제왕장성의 정예들,
아아… 섬멸시키려는 자와 생존(生存)하려는 자!
문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다.
밤이 으슥해 오자 오천여 제왕장성의 고수들은 불과 오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심한 상처를 입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전멸(全滅)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이 처절하고도 참혹한 싸움은 이제 종말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위지주천이 이끌고 있는 창궁무벌의 지옥군단(地獄軍團)은
완벽한 대소절진(大小絶陣)을 이룬 채 제왕장성의 결사대를 짓밟고 있었다.
"쳐라!"
"밟아라!"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
지금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승리는 뻔하다…문제는 재수없게 내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 뿐이다!)
그렇다.
창궁무벌의 승리는 기정사실처럼 확실해 보였다.
무림제왕이 오십여 명 남짓한 수하들을 이끌고 배수진을 결심하고 있을 때,
위지주천의 지옥군단 이천여 명은 그들의 바로 코 앞에 있었다.
그런데…
"으으… 저, 저건… 도저히 인간이 아니다!"
창궁무벌의 최종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부장(副將) 용화벽(龍華壁)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그는 평생 동안 무수한 싸움을 거치며 살아온 발군의 무인(武人)이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무수한 도검(刀劍) 속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 적이 없는 그였다.
한데,
그러한 그가 지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도록 지독한 전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백 팔 명의 흑의인(黑衣人)들,
그들은 분명 인간이되 결코 인간이랄 수 없었다.
오직 살인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길들여진 살인병기(殺人兵器)나 다름없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과,
정확한 기계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바로 가혹한 죽음의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창출해낼 수 없는 살인적인 동작이 아닌가?
"으으… 저, 저들은 대체…"
용화린은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일백 대 천(一百對千)!
숫자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천(千)은 백(百)의 적수가 도지 못했다.
게다가 저건 또 뭔가?
노도처럼 휩쓸며 짓쳐오는 일천여 기마대(騎馬隊)!
모두 여인(女人)들로만 이루어졌으나 이들의 무공 또한 통천가공할만 하지 않은가?
"와아--"
채채챙! 번-- 쩍!
"으아아악!"
정말이지 이건 싸움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도살일 뿐이었다.
"와하하하…시건방진 놈들!
이따위 솜씨로 우리 혈야회의 백팔사접(百八四蝶)을 막아 보겠다는 수작이냐?"
일검무정(一劍無情) 단월빙,
그는 손에 검(劍) 대신 가늘고 길다란 죽창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 죽창으로 상대의 목만을 전문적으로 노렸다.
죽창의 끝은 결코 날카롭지 않았으며 또한 뭉툭했다.
그러한 것으로 찔리면 상대는 쉽게 죽지 않을뿐더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푸-- 욱!
"케에엑!"
단월빙의 죽창은 자로 잰 듯 정확했다.
뿐만 아니라 최대한 느릿하게 상대의 목을 노렸다.
"크아아… 빨리! 제발 빨리 죽여 줘… 으아아…"
죽창에 꿰뚫린 상대는 살인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허나,
단월빙은 상대를 절대 쉽게 죽이는 위인이 아니었다.
죽창 끝에서 꿈틀거리는 상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다.
"헐헐헐… 이놈은 머리가 채 여물지도 않았구나."
철수무정(鐵手無情) 형운비는
단월빙의 뒤를 따라 다니며 그가 목을 찔러놓은 상대만을 골라 전적으로 죽였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몸부림치는 상대를 일으켜 세워 그대로 머리를 치는 것이다.
퍼억!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하기사 비명 따위를 지를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헐헐… 이봐, 빼빼! 찌르는 동작이 너무 느리다.
이것 봐라. 여기 멀쩡한 놈이 또 하나 있다."
"ㅋㅋ… 그래?"
푸욱!
"흐흠… 좋군. 이 감촉은…"
일검무정 단월빙은 될 수 있는 한 상대의 목에
죽창을 느릿하게 쑤셔 넣으며 느긋하게 그 감촉을 즐겼고…
"빌어먹을… 죽어가는 놈을 보고 즐길 새가 어디 있어."
철수무정 형운비는 죽창에 당한 상대의 머리를 그대로 난타했다.
비명도 없었다.
상대는 죽창에 난자당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흔 일곱… 아흔 여덟… 아흔 아홉… 네놈이 꼭 백 명째다."
회안무정(灰眼無情) 염백후의 잔인함 역시 그들 못지 않았다.
묵혈환사륜(墨血環死輪)!
그 가공할 병기를 양 손에 쥐고 상대의 팔과 목을 차례차례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으로 허리를 치는 것으로 그의 살인은 끝난다.
"으악!"
"크아아악!"
그러니 공포와 그 아픔이 오죽하랴!
"크하하하…"
천하에 이토록 무자비하고 끔찍한 도륙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창궁무벌 고수들의 실력은 절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천하 최고의 자객들이었다.
순식간에 일천여 창궁무벌 고수들이 도륙당했으며,
이 사실은 즉각 위지주천에게 보고되었다.
"무엇이?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하, 하오나… 놈들은 도저히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놈들은 혈해사천의 전 고수들을 도륙하고…
본 창궁무벌의 일천 오백여 지옥군단마저…"
"뭣?"
"그렇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곳에 있는 오백여 명 뿐입니다."
"이럴 수가…? 지옥군단이 이토록 허무하게 깨지다니, 대체… 도대체 놈들의 정체는 뭔가?"
"아무래도… 북해성궁의 고수들과 야접(夜蝶)의 혈야회(血夜會)같습니다."
"무엇이? 야접의 혈야회? 으으… 그렇다면… 야우(夜雨)마저 실패했단 날인가?"
"그 보다도 빨리 조처를 취하셔야…
놈들은 지금 지옥군단을 완전히 포위한 채 포위망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으으… 야접, 결국 네놈이 결정적인 순간에 변수(變數)로 등장할 줄이야…"
위지주천은 두 눈에 살광을 폭사하며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좋다. 어차피 군림천하(君臨天下)하려면 놈이 마지막 관문이다.
그렇다면… 놈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본인이 직접 찾아간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럴 필요없다, 위지주천! 본인이… 직접 왔으니까."
한 마디 무심한 일성과 동시에 사위에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장내에는 세 사람의 흑포인(黑布人)이 나타났다.
흑포인들,
일견에 보기에도 무서운 고수들이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팍팍 파동치는 주위의 공기,
그 자세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고,
두 눈에선 무서운 신광(神光)이 철철 넘친다.
눈 앞에 분명히 위지주천이 서 있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세 명의 흑포인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시립해 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순간,
나뭇잎이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설화린이었다.
"야접… 실로 교활하구나!"
"그렇지도 모르지."
설화린은 억양없는 음성을 흘려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채 무섭게 얽혔다.
"어떤가, 위지주천… 아직도 군림천하(君臨天下)를 꿈꾸는가?"
"야접, 네가 반각만 늦게 왔어도… 본인의 꿈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허나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이제 나는 너를 벰으로 해서 꿈을 이루기로 작정했으니까…"
조용한 어조였지만 그 어조 속에는 말로 형용못할 자욱한 살기(殺氣)가 내포되어 있었다.
"후후… 사람이란 죽을 때가 되면 가끔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지.
그동안 너는 그 헛된 망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제… 꿈은 깨어졌으니… 너는 편히 쉴 때가 되었다."
편히 쉴 때가 되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긴장감은 단 한점의 허점이나 틈이 생기는 순간 무섭게 폭발할 것이다.
이때 돌연,
위지주천은 수중의 검을 비스듬히 치켜 올렸다.
윙-- 우우우우--!
응후한 파공음이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울렸다.
뿐만 아니라 바람도 없는데 그의 장포가 팽팽히 나부꼈다.
그것은 그가 공력을 극도로 일으켰다는 증거였다.
설화린의 얼굴이 갑자기 침중하게 굳어졌다.
파츠츠츠…
위지주천의 검 끝에서 금빛의 검광(劍光)이 뻗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검 끝에서 뻗쳐 나오는 검기(劍氣)의 길이는 무려 일장(一丈)에 달했다.
설화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으음…놀랍다! 검기가 일 장이 넘다니…
그렇다면 이자의 공력(功力)은 최소한 오갑자가 넘는단 말인가!)
그렇다.
이건 절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검기(劍氣)가 검에서 발출되려면 최소한 삼갑자의 적공(積功)이 필요하다.
그것이 일 장을 넘으려면 오갑자의 각고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회안무정 염백후는 대경하며 소리쳤다.
"회주(會主), 조심하십시오. 지금 놈이 펼치려는 검법은 창궁무벌 최고의 무공입니다!"
그러나 설화린의 표정은 전율스러울 만큼 무심했다.
아니 무심한 정도가 아니라 입가에 한 줄기 뜻모를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좋은 수법, 훌륭한 기도! 역시 그대는 정상(頂上)에 오를 만한 자다."
"간다!"
돌연 위지주천의 입에서 하늘의 일각을 쪼개는 듯한 벽력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검이 엄청난 검기를 폭사하며 설화린의 전신을 향해 번개치듯 날았다.
"창궁파천(蒼穹破天)--!"
파파팟!
창궁파천(蒼穹破天)!
그것은 창궁무벌 최고의 검공(劍功)이었다.
아직껏 그 이상의 무공은 없었다.
츠츠츠츳!
귀청을 찢는 파공음이 일었다.
위지주천의 수중에 들려진 검은 엄청난 압력을 발산하며 설화린을 강타해 갔다.
그 범위는 무려 방원 십장(十丈)!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야접, 넌 이제 끝장이다!)
위지주천은 확신했다.
그는 지금까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선공(先攻)을 해서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누구를 상대하든 간에 먼저 선수(先手)를 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원칙을 철저하게 시행해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설화린은 위지주천을 완전히 무시한 듯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만 미끄러지듯 느릿하게 신형을 이동하며
한 손으로 허공에 슬쩍 호선을 그렸을 뿐이었다.
전혀 무의미해 보이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설화린의 태도에 위지주천은 일말의 분노마저 느꼈다.
"건방진!"
번쩍!
한 줄기 예리한 섬광과 함께 위지주천의 검은 이미 설화린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절대(絶對)의 쾌검!
위지주천의 쾌검법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도대체가 그가 뻗어낸 쾌검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저 목표한 곳과 검의 최단거리를 아무런 변식도 없이 찔러오는 것이다.
파악--!
상황 그대로 위지주천의 검은 설화린의 목에 그대로 격중되는 듯했다.
촤-- 악!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곧이어 검 끝에 전해져오는 짜릿하고도 전율스런 쾌검을 위지주천은 연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애석하게도 위지주천의 꿈에 불과하였다.
"으악!"
비명은 오히려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무모할 정도로 단순하게 움직인 손,
위지주천으로 하여금 일말의 분노마저 느끼게 했던 그 손이
한순간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킬 줄은,
가슴이 불에 데인 듯 화끈한 통증을 느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상대방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찍어 온다고 위지주천이 느낀 순간
이미 그의 이마에는 뚜렷한 지인(指印)이 낙인(烙印)처럼 선렬하게 찍혀 있었다.
파악!
"크… 윽!"
위지주천은 자신의 이마와 가슴을 감싸쥐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토록 빠른 수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소에 그는 자신이 굉장히 신속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크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위지주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의혹과 불신의 표정을 지은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부릅떠진 그의 두 눈 속으로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설화린의 모습이 아프게 쏘아져 들어왔다.
"이제야 알았느냐? 네 꿈은 한낱 망상(妄想)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야! 난… 난 죽지 않아…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다… 도저히…"
설화린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믿어야 한다.
보아라. 그 명백한 증거로 넌 지금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설화린의 그 한 마디 말은
죽어가고 있는 위지주천을 무너지게 하는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내가… 죽는다고? 천하의… 위지주천이… 와악!"
쿵!
위지주천은 한 모금의 선혈을 왈칵 쏟아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제야 가슴과 이마에서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으… 저럴 수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무정삼후와 북해성궁의 궁도들은
그 가공할 광경에 전신이 얼어버릴 정도로 경악했다.
그들은 분명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설화린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다만,
설화린의 손이 허공에서 무수한 호선을 그리며 현란하게 움직였다는 사실과,
그 단순한 듯 보였던 손의 동작은
실상 수천 수만 개의 선(線)으로 이루어진 가공할 무공(武功)이었다는 것,
그리고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지극히 부드럽고 환상적이었다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
"……"
장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고 누구 하나 움직이지도 않았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그 움직임을 일시 멈춘 것과도 같은 침묵 속에
문득 한소리 탄성과 함께 북해궁주의 청아한 음성이 장내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야접… 역시 당신의 명성은 허전(虛傳)이 아니었군요.
과연, 중원(中原)의 무학(武學)은 위대(偉大)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