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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랜튼 목사와 시병원 |
나는(스크랜튼) 1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로부터 우리의 선교활동을 역사적으로 개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 작업은 선교본부의 활동에 국한된 것이다. 여성해외선교회의 활동은 그쪽에서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는 것은 마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셋 반 지파가 가나안의 대부분 영토를 차지하기위해 요단당 지역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개시하기에 앞서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10년 전 즉 1884년 늦가을에 우리의 선교는 실질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상황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해 말에 의사(M.D.)인 스크랜튼 목사가 임명되고 하루 뒤에 아펜젤러 목사가 임명되었다. 또한 여성해외선교회(W.F.M.S.)도 여성이 거의 철저한 은둔 생활하는 이 나라에서 여성활동의 문을 열기위해 스크랜튼 의사의 어머니인 매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여사를 임명했다.
12년 전에(1882) 우리 교회의 한국 상륙이 일본에서, 거기에 있던 우리 형제들에 의해 거론되어 우리 선교부에 타진되었다. 1883년에는 그 사업을 위한 자금요청이 있었다. 볼티모어의 가우쳐 목사(John F. Goucher)가 앞장섰고, 그 일을위해 2,000달러를 기증함으로써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총 선교위원회의 사기를 물질로 돋우었다.
1. 1884년
1884년에 그 자금의 일부는 당시 일본 선교부의 감리사였던 맥클레이 목사(Rev. Dr. R.S. Maclay)가 한국을 방문하는데 쓰였다. 그의 방문과 거기에 대한 보고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는 미국 공사관에서 푸트 공사(Minister General Lucian R. Foote)의 영접을 받았다. 푸트 공사는 자기의 직책을 이용해 힘자라는 데까지 맥클래이 박사의 조사 작업을 도왔다. 맥클레이 박사는 국왕에게 보고하는 보고서를 준비하였는데 거기에는 특별히 학교와 의료사업에 대한 계획안이 들어 있었다.
국왕은 맥클레이 박사가 개신교인이라는 데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며 정중하고 긍정적인 회답을 하였다. 방문 당시 그와 같은 선의의 개방의지를 확인하자 맥클레이 박사는 우리 교회에-그 말 그대로 인용하면-“궁극 목표가 복음화임을 숨기지 말되 교육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고 권면하였다.
맥클레이 박사가 한국에서 조사를 하고 있을 동안 모국 교회는 그 사업을 위해 보낼 적당한 선교사들을 물색하였고 나중에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예상되는 생활의 변화에 잘 적응하기 위해 구할 수 있는 한국 관계 서적들을 열심히 모았다. 필자도 상상을 하며 초가집에서 생활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골생활 때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초가집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교활동이 여러모로 매우 순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외부세력에 대해 폭넓게 개방하고 있었다. 진보는 당시의 시대적 명령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회수가 군단크기였다. -이 군단이란 용어는 오늘날 문자적인 의미는 상실하고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다.
1884년 12월 4일 필자가 해외의 타민족에게 영광스런 평화의 복음을 전할 권한을 부여벋은 후 뉴욕에서 준비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피를 흘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우리가 오늘 되돌아 보는 10년 동안 소위 급속한 개화를 후퇴시켰다.
1885년 4월 내가 한국으로 가기위해 일본에 있는 기선에 승선했을 때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 목사(Rev. H.N. Loomis)가 만일 세관을 통과할 수 있다면 한국으로 갖고 들어가라고 조그만 책 꾸러미를 주었다. 만일 세관통과에 실패하면 그 크기와 가치가 얼마 안 되니 갑판에 놔두거나 바다에 던져버리라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도 성서공회로부터 비슷한 부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1885년에 우리는 한국에 상륙했다. 그때의 사람은 흔히 장로교 선교부의 “감리교 설교자”라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Rev. H.G. Underwood), 아펜젤러 목사와 그의 아내, 스크랜튼 의사와 그의 아내 및 아기 그리고 스크랜튼 여사(Mrs. M.F. Scranton)이었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갑시다”, “조심 합시다”, “서두르지 맙시다”라는 등의 소리를 들었으나 이런 소리는 188년의 소위 영아소동 이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변명은 하지 않고 “뭔가 되겠지”하는 정신으로 일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중에 온 선교사들은 오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다가도 도착즉시 이러한 정신을 갖게 되었다.
1885년이 저물기 전에 의사에게는 환자들이 생겼고, 자기 집에 임시 시약소도 차렸다. 왕은 우리의 거주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학교를 열려고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감사를 표했다.
2. 1885-1886년
1885년과 1886년은 대지 구입과 장차 외국인들이 거주할 대략적인 장소를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설계사이며 건축가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어학도로서 완벽한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을 분담하여 종사함으로써 미흡하지만 거의 모두가 사전편찬의 일을했다. 그 사전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우리의 선교사업은 의사(스크랜튼)가 한국에 도착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그 해에는 큰 비가 왔다-가 지나가 9월 10일에 자기 집에서 의료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날부터 이듬해 6월까지 522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1886년 봄, 정동에 교회부지를 구입하여 개조하였고 6월 15일에는 병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입원환자는 이 지역 특유의 병에 걸린 환자로 열이 나며 헛소리를 하였다. 서대문 근처 성벽 밑에 버려져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 데리고 왔다. 그녀에게는 네 살 난 딸이 있었다. 지난해에 죽은 파더를 우리 모두 기억한다. 그녀의 딸은 아직 학교에서 별단이(Peltan)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인 교사가 건네주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디가 아프면 언제든지 빈병을 들고 10시에 와서 미국인 의사를 만나시오”. 이글은 비밀리에 뒷문에 붙여졌다. 더 이상 바랄게 무엇이겠나? 그해에 콜레라가 돌았다. 처음으로 동방의 무시무시한 적을 만나 서양인이 공포에 떨었다. 이웃사람들이 찾아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달라고 했다. 10년 후 비슷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들은 "하늘을 받드시오. 우리도 그렇게 하겠소. 당신들이나 우니나 하늘을 받드는 것은 매 한 가지 아니겠소?라고 10년 전과 비슥한 요청을 하였다. 나는 "10년이나 지냈는데 이웃을 그토록 변화시키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자책했다.
다른 입원환자들을 위해 학교의 첫 학생들을 병실에 있게 했다. 그들을 우해 병실에는 중국어 성서와 언문으로 된 마가복음, 로스의 신약성서를 놓아두었다. 시간과 장소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성급한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편지로 더 자세히 말하겠다.
우리 학교는 이 해에 문을 열었다. 토지-현재의 부지-가 구입되었고 가을에는 기숙사와 교실이 마련되었다. 1888-89을 다룬 카탈로그의 서문을 인용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배재학당을 조직하기 위한 첫 번째 움직임이 1885년 가을에 있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미국 교육제도의 요체들을 취하여 설립하고자 하는 목적과 방법이 왕께 보고되었고, 한국의 왕은 호의적인 태도로 그것을 승인했다. 하루 뒤 한국의 외무대신인 김윤식이 와서 더욱 깊어진 왕의 호의를 표하고 교패와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매우 좋은 이름이다.
1886년 6월에 아펜젤러는 예비학교를 개교했다. 출석한 젊은이는 7명이었다. 이 7명의 학생들은 얼마 후 정부가 요직으로 데려가 공무를 보게 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예비학교는 학문의 전당으로 성장했고 1년 후에 우리는 대학 수준의 학교 설립을 공표하고자 했다. 나라의 곳곳에서 학생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곧 더 크고 편안한 건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외극 스타일의 안락한 새 건물이 도시 서부에 세워졌다. 1887년 11월 1일에 학교가 새 건물로 이주했고, 옛 학교건물은 기숙사로 바뀌었다. 배재학당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서양과학과 문학을 가르치되 그것과 본토의 교육제도의 기본양태를 하나로 묶어 교육하는 것이다.
콜레라가 성행하였지만 모든 선교활동이 양호한 가운데 한 해가 마감되었다. 우리는 안전하게 거처했으며 양 분야의 사업이 잘 진행되었고 교회명부에는 한 명의 학습인(Probationer)이 생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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