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엄마 갱년기의 원인 / 박지수
우리할머니는 우리아버지를 첫째로 낳고 삼촌 세 명을 낳았다. 할머니는 딸을 낳지 못하여 우리엄마가 대신 장손녀인 나를 낳아서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내가 하루 종일 보체는 모습을 보고 그 때 갱년기였던 할머니가 몸이 약한 나를 낳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더러운 몸이라고 했다. 당시 엄마의 심정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리고 옛날 우리 집 위에 있었던 승강의원에 가서 혈압을 재보고 원장님이 엄마에게 만약 길에서 쓰러졌으면 사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듬해 12월 27일 엄마가 나에게 하나뿐인 남동생을 건강하게 낳았다. 나와 동생은 3살 터울이지만 쌍둥이처럼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구내염과 위염이 생겼다. 엄마는 체력을 보충하려고 가끔 영양제를 맞고 가족이 목포에 있는 갈비식당에 가서 갈비를 실컷 먹었다.
광주로 이사를 갔던 뇌병변 1급 장애인 유미언니의 엄마가 우리엄마에게 전라도 지체장애학생들의 배움터인 광주은혜학교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다닐 수 있는 그룹 홈도 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장애학생들과 어울려서 생활할 수 있다고 엄마에게 말을 했다. 11살 가을에 부모님과 은혜학교에 가서 초등부 1학년에 들어갔다. 그룹 홈의 명칭은 ‘꿈동산’인데 지방에 살고 있는 장애학생들을 위하여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입은 김갑주 삼촌이 기증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꿈동산’에 들어가 시설에서 생활했던 보모와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글라라 이모와 지체장애선배들과 반갑게 만났다. 지체장애선배들과 어울려서 행복하게 지냈다. 소변이 마려우면 보모에게 말하여 화장실로 데려다 주면 소변을 보았다. 글라라 이모에게는 일상생활(양치질과 옷을 갈아입기)을 배웠고 거실에 있었던 평행봉으로 걷기운동을 했다. 저학년일 때는 11시에 등교하여 색연필로 한글을 배웠고 재활운동시간에는 평행봉 걷기운동을 했다. 봉사자 삼촌들과 이모들도 그룹 홈에 오면 숙제를 도와주고 어린이대공원도 가끔 데리고 가서 바이킹과 회전 컵도 탔다. 이모가 대변을 언제 보았는지 물었다. 그리고 이모가 나에게 관장을 시켜서 대변을 보았다. 이모가 내 체질이 약하다고 하면서 보약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가끔 신부님이 그룹 홈에 와서 미사를 드리고 21시가 되면 보모, 글라라 이모 그리고 지체장애선배들과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매년 그룹 홈의 가족들과 연말파티를 했다. 이듬해 조장현이가 명칭은 ‘해바라기’인 다른 그룹 홈에서 ‘꿈동산’으로 옮겨오고 이영훈이는 은혜학교 초등부 1학년에 들어왔다. 그룹 홈에서 나는 장현이, 영훈이와 함께 숙제를 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깔끔하여 나, 장현이, 영훈이는 물수건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모가 물수건을 챙겨주었다. 그 해 가을에 이모가 보모, 선배들, 나 그리고 장현이와 영훈이에게 수녀가 되고 싶어 수녀원에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모가 수녀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진도에서 보모 한 사람이 왔다. 나는 받아쓰기를 하여 올백을 맞고 일기쓰기를 시작하면서 지선언니와 경애언니가 쓰던 방에 가서 함께 사용했다.
우리부모님은 꽃 장사를 했다. 무안중학교와 일로초등학교 졸업 장사를 하고 아버지가 나를 늦게 데리러 왔다. 그래서 보모 두 사람과 함께 돈가스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학교에 언어치료실이 생겨서 나는 월요일 그리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일찍 등교하여 언어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장현이와 찬미, 연진이는 3학년 국어 교과서로 수업을 받고 나와 지원이 그리고 은미와 은희는 3학년 특수 국어 교과서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재활치료 시간에 나는 보행기에서 워커로 교체했다. 장현이와 내 생일이 날짜가 비슷하여 보모들이 합동파티를 해 주었다. 당시에 제헌절은 공휴일이어서 봉사자 삼촌들과 이모들이 그룹 홈에 와서 함께 해수욕장에 가서 배를 타고 놀다 왔다. 그리고 보모의 여동생이 그룹 홈에 와서 가족이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그리고 내 대변을 보는 모습을 보았던 보모가 나에게 대변을 보았냐고 하면서 연말에 보모가 따뜻하게 입으라고 옷도 주었다. 그 해까진 행복하게 지냈다. 그리고 은혜학교 급식당번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교실에 우리엄마와 친구들의 엄마가 급식당번을 하고 엄마와 함께 하교했다. 엄마가 보모에게 우리 집에는 연필 깎기가 없다고 한 말을 들고 전기 연필 깎기를 주었다.
4학년 신학기에 보모가 나와 장현이에게 3월 3일 14시까지 도착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학기라 꽃 장사를 하다 보니 그룹 홈에 17시에 데려다 주었다. 21시 취침이니 조금 늦어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보모가 늦게 오려면 오지 말라고 하고 내가 식사를 할 때 진도에서 온 보모가 밥알을 방에 흘린 개수만큼 내 허벅지를 꼬집고 등교할 때 워커로 걸어가다 실수하면 보모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냈지만 하교하여 그룹 홈에서 실수를 하면 보모가 꼬집을 것 같아 가시방석이었다. 그래도 나는 여름방학까지 참고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우리부모님이 지어준 보약을 먹어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변비가 심했다. 6월 16일에 엄마가 보모에게 전화를 하여 언제 대변을 봤는지 물어보니 보모가 엄마에게 대변을 보지 못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인이 되어도 부모님이 언제까지 보살필 것이냐고 했다. 다음날 아버지가 광주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는 말을 엄마가 듣고 함께 올라 와서 엄마가 20시 40분에 그룹 홈에 도착했다.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관장을 시켜주어서 대변을 개운하게 보고 엄마가 화장실청소를 하는 도중에 보모가 그룹 홈에 와서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말을 했다. 보모가 엄마에게 나를 데리고 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가 보모에게 학교에 다니려고 위탁하였다고 하면서 정상인이 장애인에게 그 따위로 봉사 하냐고 하면서 싸웠다.
내가 약한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머니가 엄마에게 더러운 몸이라고 하고 내 건강문제로 보모와 의견차이로 대판 싸웠다. 2007년에 엄마가 갱년기가 와서 열이 심하게 올라 보약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목포 상동에 있는 삼성 산부인과에 가서 호르몬제를 처방받아 먹었다. 그런데 가슴에 섬유종이 생겨 제거시술을 받았다. 호르몬제를 먹지 못하니 몸에 열이 심하여 이불을 차고 자서 독감에 걸려 24일 저녁에 목포기독병원에 입원하고 27일에 퇴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26일 8시에 엄마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대변을 보다가 두통이 심하게 왔다고 했다. 의사가 엄마에게 시티(TC)와 자기공명촬영(MRI)을 하여 부모님에게 뇌출혈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엄마와 기차로 삼성서울병원으로 갔다. 뇌졸중센터 홍승철 의사가 부모님에게 뇌동맥류가 2개 있다고 했다.
2016년 11월 15일 23시에 엄마의 좌측 뇌동맥류가 터져서 뇌출혈을 일으켜 목포한국병원 신경외과 서보라 과장과 의사들에게 시술을 받았다. 그래서 엄마의 우측 어깨부터 발가락까지 마비가 와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엄마는 호전이 되도록 계속 운동을 한다. 작년에는 부신피질종양 절제수술을 받았다.
내가 엄마를 보면 과거에 나를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고 꽃 장사를 하면서 휴식 없이 힘들게 살았지만 현재는 아파서 쉬는 것을 보면 행복한 것 같다. 그런데 엄마가 몸이 약하여 일을 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번 주 제목은 몸인데 나는 우리엄마의 갱년기 원인을 할머니에게 당하고 보모와 싸워서 생긴 것 같아 적었다. 새로운 수강생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