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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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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ㆍ증병조판서) 3子 철경(哲經) |
(자헌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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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헌 |
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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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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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판서) (獨子) 예(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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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주부)고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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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생원)변 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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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반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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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윤소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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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금희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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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 |
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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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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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ㆍ증호조참판) (系子)長子 안세(安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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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子 근석 (庶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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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우의정) 정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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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 |
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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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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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ㆍ증좌승지) 長子 전(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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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주부) 次子 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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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감직장) 3子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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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유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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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권몽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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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반몽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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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김곤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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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김흠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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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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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 長子 윤박(潤珀)(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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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子 득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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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長子 이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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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獨子 창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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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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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 |
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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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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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長子 중남(仲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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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子 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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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윤 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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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사위 서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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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병조참판) (獨)흥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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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長子 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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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子 태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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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子 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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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박 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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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김학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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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김하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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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선대부 중남공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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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전(權詮)장군의 가게와 생애
권전(權詮, 1549~1598)의 자(字)는 중근(仲謹)이고, 호(號)는 병암(屛庵)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출신지는 안동이다.
안동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5대조는 횡성현감(橫城縣監) 증 이조참의(吏曹參議) 권거약(權居約)이다. 고조(高祖)는 좌군사용(左軍司勇) 증 호조참판(贈戶曹參判)으로 안동 우향계(友鄕契)의 맹주(盟主) 권자겸(權自謙)이며, 증조(曾祖)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 권철경(權哲經)인데 이때부터 안동 서후면 금계리(金溪里)에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부친 권자겸의 뒤를 이어 형(兄) 상장군(上將軍) 권철종(權哲從)과 함께 우향계를 계승하여 조직한 진솔회(眞率會) 회원이고 현재까지 6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이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조부는 마애(磨厓) 권예(權輗)이다. 그는 중종조(中宗朝)에 생원시와 같은 해 식년문과 급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관직을 시작으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예문관대교 겸 춘추기사관(藝文館待敎兼春秋記事官)으로 임금에게 그 부당함과 중종반정(中宗反正)도 그 방법이 옳지 못하였음을 직언하며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 반대에 적극 앞장서서 활동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고 1522년(중종 17)에 황감시(黃柑時)를 지어 장원(壯元)하여 별조궁(別造弓)을 받았다. 청요직을 두루 지내시고 우참찬ㆍ형조ㆍ호조ㆍ이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右參贊ㆍ刑曹ㆍ戶曹ㆍ吏曹判書兼世子左副賓客) 등을 역임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낙강정에 찾아와서 시를 헌정하고 명현(明賢)이라 하였다.
부친은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내고 아들 권전의 무훈(武勳)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된 권안세(權安世)이고, 모친은 부사과(副司果) 김언준(金彦濬)의 딸 정부인(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高弟)인 종자형(從姉兄)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주선으로 퇴계 이황에게 사사(師事)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이 생을 마감한 후에는 대고모부(大姑母夫)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
1582년(선조 15)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였다. 그 후 선전관(宣傳官) 등을 역임하고 함경북도 변방을 방위하는 일을 맡았다.
1591년(선조 24)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에 의해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영병장(領兵將)에 추대되어 중임(重任)을 맡았다. 그 후 축산포만호(丑山浦萬戶)가 되어 축산의 창녕전투(昌寧戰鬪)에 참전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영해(寧海)의 위정산(葦井山; 일명 용두산(龍頭山)) 골짜기에서 장졸(將卒) 200여 명을 이끌고 많은 왜군을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용궁(龍宮) 지역 의병을 이끌고 우두원(牛頭院)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敗戰)하였다.
1594년(선조 27) 1월 별시무과(別試武科)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정유재란 발발 전(前) 잠시 의병장 곽재우 의병진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발발 후인 4월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제수되었다. 그 후 류성룡(柳成龍)이 이순신에게 안동 출신 무장 권전을 수군만호로 천거하여 8월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휘하로 가서 적량만호(赤梁萬戶)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적량(현 남해군(南海郡) 창선면(昌善面) 진동리(鎭洞里)) 진영 해안(海岸)에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판옥선함장(板屋船艦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해남(海南)의 명량해협(鳴梁海峽)에서 신묘한 책략(策略)으로 왜적을 대파(大破)하고 남서(南西)의 제해권(制海權; 바다를 지배하는 권력)을 장악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이순신의 아장(亞將; 준장군)을 겸임하며 장군선(將軍船)에 올라 이순신을 보좌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50세의 나이로 이순신과 함께 역전동사하였다. 이때 시신은 수렴하지 못했다.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시신을 수렴하지 못해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1606년(선조 39) 안동의 유생(儒生)들이 논의하여 안동시 풍산읍(豊山邑) 계평리(桂坪里) 서쪽에 위치한 청성산(靑城山) 불당곡(佛堂谷) 선영(先塋) 아래에서 간좌(艮坐)에 의관으로 장사지내고 분황고유(焚黃告由)하였다.
▼ 가운데 권전(權詮)장군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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