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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東九陵)>
태조 이성계를 역사가 아닌 현실의 인물로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역사도 귀천의 거리도 한꺼번에 넘어설 수 있는 곳, 동구릉을 건원릉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 동구릉 얼개
주소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인창동)
전화 : 031) 563-2909
입장료 : 대인 1,000원, 65세이상 24세이하 무료, 구리시민 50% 감면
휴무 : 월요일
* 방문일 : 2021.2.9.
2. 동구릉(東九陵) 소개
동구릉(東九陵)은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실의 최대 규모의 왕릉군으로 왕릉의 정수를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능’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穆陵),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綏陵),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 등 조선조 아홉 기의 릉(陵)에 17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왕릉의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첫 번째 공간은 입구 근처의 홍살문을 하나 지나고, 이어 재실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는 진입공간으로 인간의 공간이다. 이어 각 릉의 영역을 표시하는 홍살문을 지나면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 된다. 그 뒤로는 능침이 있는 능침공간, 성역이다. 능침공간은 능침을 중심에 두고 제일 뒤편에 둥글게 쳐진 곡장으로 안팎의 영역을 구분한다. 곡장 안의 능침 앞과 양옆에는 각종 석물들이 도열해 있다. 보통 제향공간까지만 개방되고, 능침공간은 특별한 날에만 개방한다.
*홍살문
각각의 능에 홍살문이 있지만, 능으로 가는 길목에서 별도의 홍살문을 만난다. 이곳부터 왕릉의 영역임을 알리는 것이다. 2개의 기둥에 지붕이 없이 19개의 살만 박혀있고, 가운데는 홍살 2개가 3 태극을 지나면서 꼬여서 위에는 3개가 되어있다. 태극 위의 3개의 살은 삼지창인데,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붉은색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붉은색은 악귀를 내쫒는다는 의미도 있다. 동지에 집안에 팥죽을 뿌리고, 마을제사에 동네 입구에 황토를 뿌리는 것도 다 같은 연유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하여 홍살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홍살은 9개, 11개, 13개가 있는데 이 중 완성된 수인 9개의 살이 가장 많다.
3. 건원릉(健元陵) 소개
* 건원릉 전경
1) 건원릉 구조
왕릉 전체와 외부를 구분짓는 금천교와 입구 홍살문을 지나 수릉과 현릉을 지나면 건원릉에 이른다. 릉에 들어서면 9개의 살창으로 이루어진 홍살문이 능내외를 구분짓는다. 홍살문 아래 박석(薄石)이 깔린 두 개의 길 참도(參道)는 정자각을 향한다.
약간 높은 왼쪽 길은 향로(香路)이고,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약간 낮은 동쪽 오른쪽의 길은 어로(御路)이며, 제향을 드리러 가는 왕의 길이다. 두 길을 합쳐 향어로라고도 한다. 참도는 향어로를 이르는 말로 정로(正路)라고도 한다. 참도는 정자각 앞에서 동쪽으로 꺾이고, 다시 바르게 갔다가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 방향으로 놓여 있다.
참도가 시작되는 동쪽에는 네모난 판위(板位)가 있다. 이곳은 왕이 능에 도착하였음을 고하는 알릉례(謁陵禮)와 능을 떠날 때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는 배위(拜位)이다. 이 배위에서 왕이 사배를 하는 것으로 제례는 시작된다.
참도 좌우에는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공간인 수복방(守僕房)과 제수를 준비하는 수라간이 자리하고, 정자각 앞에는 소전대가 자리하고 북동쪽에는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비각 안에는 태종대에 세운 건원릉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2단의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받침돌은 거북이 모양이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장방형의 몸돌을 얹고, 몸돌 위에는 용모양의 머릿돌이 위치했다.
2) 이성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여, 9월 9일 이곳 건원릉에서 국장(國葬)을 마쳤다. 조선 개국 이후 왕좌 7년 상왕 2년 태상왕 8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태조는 창덕궁 별전인 수창궁(壽昌宮)에서 생을 마쳤다.
태조는 함경도 일대의 4대조 릉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또 경처(京妻)인 강씨 부인의 릉인 정릉(貞陵) 옆에 묻히고자 능터까지 정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태종이 이곳 건원릉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3) 정자각(보물 제1741호)
정자각은 건물 모양이 ‘丁’ 자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실제로 정자각은 ‘一’ 자 모양의 제향을 모시는 정전과 ‘丨’ 자 모양의, 수행한 향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하여 하나의 건물이 되었다. 배위청의 기둥이 디디고 있는 곳은 월대이다. 정자각의 지붕에는 잡상이 배치되어 있다. 잡상을 다른 말로 ‘어처구니’라고도 한다는데, 그것은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4) 능침
능침 공간의 핵심은 봉분이다.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을 강조하였다. 기본 양식은 고려의 왕릉인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고, 석물 조형은 남송 말기의 형식을 도입하였다.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이 약간의 변화를 주었고, 봉분 주위에 곡장을 두는 양식은 조선시대에 추가되었다. 또한 석호와 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도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변하였다.
건원릉의 원찰로 개경사(開慶寺)를 지어 태종(太宗) 8년(1408)에 개경사로 명명하고 조계종에 예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5) 명당 건원릉
건원릉(健元陵)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건원릉의 용맥(龍脈·산줄기)을 살펴보자. 이 용맥은 백두대간의 첫머리인 백두산에서 발원해 이북 땅 철령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져 한양에서 수락산과 불암산을 거쳐 검암산으로 이어진다. 검암산으로 들어온 용맥은 왼쪽으로 흘러가며 좌우로 펼쳐지고, 그 중앙에서 나온 하나의 산줄기가 엎드렸다 솟구치며 생기를 모아 하현궁(下玄宮·임금의 관이 놓이는 자리)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형상풍수의 관점에서도 명당이다. 능이 있는 구역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해와 달이 끌어안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일월상포형(日月相抱形)이고, 반대로 능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장군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으로 보인다. (전원해의 풍수와 명당⑷건원릉, 농민신문, 2014-02-24)
태조는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하륜(河崙)에게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는데, 검암산 아래 좌청룡 우백호가 너른 들판을 감싸 안고, 그 가운데로 왕숙천(王宿川)이 흐르는 이곳 명당(明堂)을 택하게 되었다.
검암산(劍岩山)은 구릉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劍(검)'자가 '칼'을 의미하므로 불길하다 하여 아홉의 왕릉을 모신 후로 구릉산(九陵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6)억새 사초(沙草)
(1) 건원릉은 억새(청완ㆍ 靑薍)로 덮여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다. 억새의 은빛 꽃과 긴 대가 우거져 덮여 있는 모습은 자칫 봉두난발(蓬頭亂髮)처럼 보이기도 하고, 벌초를 오래 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다. 잔디가 아닌 억새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2) 억새 사초 전설 :
① 이성계가 함경도 함흥의 억새밭에서 싸움에 이긴 것을 기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다 억새를 입혀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②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왜적들로부터 태조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억새를 심게 되었다.
③ 태조는 말년에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제례 등의 문제로 그럴 수 없었다. 태조의 마음까지 거스를 수 없어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를 덮는 것으로 대신했다.
④ 억새는 당시 함흥에서부터 한양까지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릴레이식으로 날랐다고 전해진다.
(3) 조선왕조실록 기록
인조 7년 기사(1629)3월 19일(을해)
07-03-19[01] 홍서봉이 건원릉의 사초에 대해 아뢰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 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실록에는 태조가 사초로 억새를 쓰라고 유언을 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4) 억새 사초관리
① 평소에는 능침에 올라가 볼 수 없지만, 1년에 두 번, 봄 한식의 ‘청완 예초의(刈草儀)’ 때와 가을 억새 절정기에 개방한다. 2020년에는 10월 27일부터 11월 15일까지 건원릉(健元陵) 능침을 개방했다.
억새 예초(풀 베기)제에는 조선 왕릉의 세계유산 등재 이듬해인 2010년부터 전통 계승을 위해 시민을 참여시켜 왔다. 그러나 2020년에는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시민 참여를 제한하고, 억새 예초 다음의 고유제(告由祭ㆍ일의 사유를 고하는 제사)와 음복례(飮福禮)를 생략했다.
② 청완예초의(靑薍乂草儀)
이 의식은 2009년 6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후,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2010년에 제의를 복원했으며, 매년 한식에 억새를 베는 예초(刈草) 의식과 이를 태조에게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왔다. 일반에게 보여주는 공개행사는 2014년부터 시작됐다.
예초를 알리는 국궁사배와 능침을 돌아보는 봉심을 한다. 봉심을 마친 후 예초꾼들이 봉분 위로 올라가 억새를 두 시간 정도 베는 것으로 의식을 마친다. 건원릉 봉분의 억새풀은 2008년 씨를 받아 모종을 내 동구릉 내 양묘장에서 키우고 있으며, 억새풀이 부족할 때 이를 떼와 보식(補植)을 한다.
7)건원릉 조성
1408년 5월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왕릉 조성을 위해 풍수지리에 밝은 대신들과 지관들을 불러 한양 주변 80리 안에 최고의 명당을 찾도록 명했다. 총책임을 맡은 영의정 하륜(河崙)이 김인귀에게 양주 검암산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추천하자 태종이 승낙하고 선공감 박자청(朴子靑, 1357~1423)에게 산릉을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역군 6천 명이 동원되어 7월 하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9월 9일에 발인했는데, 이때부터 건원릉(健元陵)으로 불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때 능을 관리하는 개경사라는 원찰도 지었다. 건원릉 주변에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릉을 표본으로 삼았다. 건원릉은 이후 조선 왕릉의 표준이 된다. 조선왕릉은 유교와 풍수·도교·전통사상 등 한국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조선이 멸망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후손들이 제례를 치르는 것은 세계에서 다른 사례를 찾기 어렵다.
*건원릉 조성에 관란 연려실기술의 기록
무학이 잡았다는 설과, 최산이란 부자가 올렸다는 설을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2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산릉(山陵)붙임 장사의 제도
태조(太祖)가 만세후(萬世後 죽은 뒤)에 묻힐 자리를 무학(無學)에게 물으니, 무학이 한 자리를 가려 주며 아뢰기를, “대대로 이곳에 장사하여도 좋습니다.” 하였는데, 바로 건원릉(健元陵)이 이곳이다. 일설에는 “정로위(定虜衛) 최산(崔山)이란 자가 대대로 이 땅에 살면서 대단한 부귀를 누렸는데 그 집자리를 태조에게 바치며 아뢰기를, ‘신이 약간 지리술(地理術)을 아옵는데, 이곳은 마땅히 임금의 인산(因山) 터가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받고 곧 좋은 집을 다시 지어 주었는데, 지금 그 근처에 최장군(崔將軍)의 묘석(墓石)이 있다. ……” 한다. 《오산설림(五山說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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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8) 건원릉 건축가 박자청(朴子靑·1357~1423)
건원릉 조성의 감독을 맡았던 박자청은 이에 앞서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조성했고 조선왕릉의 기본틀을 마련한 건축과 토목의 전문가다. 태조에게 발탁된 박자청은 세종대까지 3대에 걸쳐 조선왕조의 중요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지휘하여 만들었다.
박자청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왕릉을 만든 스승 김사행의 뒤를 이은 고려와 조선을 잇는 건축가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1393년에 입직 군사로 궁문을 파수하다가 태조의 아우 의안대군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얻어 맞으면서도 문을 굳게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태조가 박자청을 호군으로 특진시켰다.
박자청은 최하층 사졸에서 출발하여 1품의 최상층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도 이름이 높다. 그가 67세로 죽었을 때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중지시키며 애도를 표했다.
9) 정자각 제의
10) 비각
*동구릉 입구의 소개물
4. 동구릉 외금천교
: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동구릉 앞 도로 확장으로 해체된 외금천교를 당시의 자재를 사용하여 이곳에 재현하였다.
5. 재실
홍살문을 지나면 우측에 왕릉을 관리하는 재실이 있다. 당시 재실에는 종 9품 참봉과 함께 다수의 인원이 상주하였다. ‘팔십(칠십)에 능참봉’이라는 속담이 있다. 별거 아닌 벼슬을 80이 다되어서야 맡게 되었다는 일종의 폄하 의도가 담겨 있다. 이때 능참봉은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실제 재실과 왕릉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직접 왕을 만날 수도 있는 상당한 지위이기 때문이다.
*능참봉
조선왕릉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단일왕조 왕가의 무덤 모두가 온전하게 남은 데다 유교철학과 풍수사상이 담긴 탁월한 조형미를 인정받아 40기 모두 세계유산이 됐다. 조선왕조 500년 긴 세월 동안 왕릉을 보존해 온 것은 능참봉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도 능참봉 출신인데, 능참봉은 조선시대 최하위직 관료인 종9품으로 오늘날 9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예조에 속했으나 임금의 능을 모시는 일선의 실무자로서 실제 직책보다 높은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참봉인 황윤석이 쓴 일기형식의 《이재난고(頤齋亂藁》를 비롯한 기록을 통해 당시 능참봉의 업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종3품인 능참봉은 부사와도 거리낌 없이 왕능관리 문제를 논했으며, 고유제 때 지방관을 헌관으로 직접 차출하는 일도 예사였다. ‘나이 70에 능참봉을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 번’이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 능참봉은 역할도 매우 다양했다. 원칙적으로 2인이 매월 보름씩 2교대로 재실(齋室)에 기거하며 근무했는데 왕과 왕비의 제례를 관장하고 능을 살피는 봉심(奉審), 능역 내의 수목관리 및 투작(偸斫: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의 감시를 주로 담당했으며 능지 또한 제작했다. 정자각, 비각이나 석물을 개수하는 일에 감독을 맡기도 했고 수복(守僕:능침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사람)과 수호군을 살피는 방호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였다. 이러한 직무특성 때문에 그들은 유학적 지식과 건축, 토목, 조경 등 기술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한 직무능력을 갖춰야만 했다.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채용의 형식으로 능참봉을 임용했다는《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데다가 왕릉수호라는 상징적 권한 때문에 당대 최고 선호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경국대전》〈봉심규정(奉審規定)〉을 통해 능역관리를 체계적으로 수행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조선 최고의 왕릉 관리 전문가로서 조선왕릉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오늘까지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능참봉이 있었음을 기억할 만하다. 오늘날에는 조선왕릉관리소를 중심으로 동부·서부·중부 등 3개 지구의 14개 권역에서 문화재청 직원들이 능참봉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이원호 글 옮김)
6. 수릉
7. 관람후
동구릉 외의 여러 조선왕릉을 봐왔지만, 신라왕릉이나 백제왕릉과 달리 봉분이 작은 것이 눈에 띄는 그런 정도였다. 특별한 감식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선왕릉끼리의 차별성은 별로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동구릉, 그중에서도 태조 건원릉을 보고 완전 생각이 바뀌었다.
죽어 함경도로 가지 못하는 이성계의 유언에 따라 억새를 심었다는 봉분이 단초였다. 고운 잔디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억센 억새를 봉두머리처럼 이고 있는 이성계가 처음으로 나와 같은 예사사람으로 다가와서다. 멀게만 느껴지는 왕과 왕릉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보통사람으로 다가오는 지독한 충격이었다.
왕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보통사람이 되어 다시 조선왕릉을 보니 참으로 많은 것이 보였다. 우선 전부터 한눈에 파악되었던 봉분의 크기와 그 의미였다. 중국 황릉보다 작은 것은 물론이고 신라왕릉, 백제왕릉보다 작았다. 보통사람이라는 생각을 능침(봉분)의 크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왕의 권위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을 터, 권위는 봉분이 아닌 강(岡, 혹은 사초(沙草地))을 통해 표현하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철학과 권위를 함께 표현하는 이중구조가 조선왕릉 구조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강(岡)’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언덕은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구릉을 이용하여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흙의 기운 생기를 받는다. 능침 주변으로 두른 곡장 밖에는 조선의 가장 보편적인 나무 소나무를 심는다.
권위와 백성과 자연을 다같이 존중하면서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람을 존중하고 그 사람이 사는 현세를 존중한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부장품이 없다. 그러니 도굴 염려도 없고, 무덤을 화려하게 꾸밀 필요도 없다. 덕분에 심지어 임진왜란 때에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언제나 백성과 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무덤 변화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철학의 변화이다. 불교에서 유교로 정치 철학을 바꾼 조선은 더이상 내세를 신봉하지 않았다. 내세를 믿어야 사후 세계에서도 화려한 권위를 누리고, 다시 세상에 돌아올 준비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부장품으로 사후세계를 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봉분의 크기가 작아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부장품이 필요없어 봉분이 클 필요가 없고, 권위를 사후에 누릴 수도 없으니 봉분이 클 이유가 없다. 거기다 조선왕조만큼 왕이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간 경우도 흔치 않은 거 같다.
왕은 백성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시라도 감선(減膳,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친히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일)을 하며, 어려움에 동참하고 책임을 지려 했다. 몸을 낮추어 백성에게 다가간 군주는 화려하지 않으나 품위가 있었고,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권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존경의 권위를 얻었다.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왕조는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 그리고 폐위된 두 왕의 묘를 합하여 44기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 이 모든 왕릉은 왕후의 봉분도 왕의 것과 크기가 같다. 명십삼릉 죽어서도 왕비 둘을 부장품처럼 지하궁전에 함께 두는 모습과 다르다. 왕비가 둘이었어도 각각 왕과 같은 크기의 릉을 만들었다. 합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도의 왕릉을 조성하면 왕이든 왕비든 선조 왕이든 후손 왕이든 모두 같은 크기의 능침을 만들었다. 죽으면 모두 같아진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어느 왕도 자기 왕릉을 크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전례가 없다.
많은 황제가 황위에 있을 때 몇 십년 동안을 무덤 조성에 노력했던 중국과는 매우 다르다. 청나라 황실의 묘소군인 허베이성 탕산 청동릉에 가면 아득하다. 입구에서 첫 번째 능침까지는 석상이 세워진 신도 5.5키로를 걸어야 한다. 그 길을 걸어 서태후의 능을 보고 나니 아득하고 기가 빠져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다른 능은 참관을 포기했다. 햇빛 내리쬐던 그날의 그 아득함이 20년이 넘은 지금도 엊그제같이 생생하다. 거대하고 인위적인 황릉의 그 아득한 거리가 바로 보통사람과의 거리였다.
이것은 일본도 비슷하다. 일본 도쿄 북부 도치기현의 닛코에 있는 도조궁(東照宮)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를 모신 신사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도조궁의 화려함과 조선왕릉의 수수한 품격의 거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칼을 두 개씩이나 차고 다니며 아무 데서나 빼드는 무사의 공포 아래, 항상 엎드려 고개를 숙여야 했던 평민의 조신한 모습은 지금도 친절한 미소와 사근한 어투로 남았다. 조선 왕은 공포의 군림이 아니라 감선으로 백성의 자리로 내려와 대등해진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설파 조동일 선생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세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왕이 예사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인정해서 나타난 역사의 대전환이다. 같은 전환이 중국이나 일본의 왕릉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해외여행 비교문화)
이성계의 억새 무덤은 나와 같은 눈높이의 보통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수였다. 그도 나처럼 바람이 불면 고향 생각이 나는구나.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거둔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조촐한 전주 오목대 만찬에 끼었다면, 흔쾌하게 한 잔 권하며 옆집 아저씨에게 하듯 축하를 드렸을 것만 같다. 무학대사가 머물던 순창 만일사를 가다 드신 고추장을 아직도 잊지 못하신다면, 순창고추장 한 숟갈 넣고 비빈 전주비빔밥으로 한 소반 차려드렸을 것만 같다. 그렇게 다른 세계 만들어준 덕분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은(謝恩)을 표했을 것만 같다. 덕분에 이만큼 살고 있어 감사하다고.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 고전 전적 자료
조동일, 해외여행 비교문화, 보고사, 2018
문화재청 자료
정진해, 유언으로 남긴 고향의 억새풀 ‘건원릉(建元陵)’, (한국NGO신문 2019/12/17)
세계 최대의 왕릉군(王陵群), 동구릉(東九陵) 둘러보기, 2019년 9월 서울학교, 프레시안, 2019.07.24.
기타 관련 신문자료 및 각종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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