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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륙사
동북아의 역사가 세계사였다는 기록들
쭝궈사에 빈번히 쓰이는 ‘북로남왜(北虜南倭)’ 역사 용어가 있다. 다 아시겠지만 이는 북녘 북(北) 오랭캐 로(虜), 남녘 남(南) 왜적 왜(倭)가 더해진 용어로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를 뜻하며, 이들 ‘북로남왜’가 명나라 때 동아시아대륙의 남과 북에 외환을 안겨줬음에 기인하여 생성된 용어이다.
그런데 역사 기록에 이 ‘북로남왜’가 조선의 남과 북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또 왜구는 현재의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일본열도에 있어야 하는데, 왜 동아시아대륙의 남쪽에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모순들을 아래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국(日本國) 사자(使者) 12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5권
왜인(倭人) 정대량(井大良) 등 3명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문종 9권
기남보국(紀南寶國)의 객인(客人)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왜놈[倭奴]의 별종(別種)이었다. - 태종 11권
자바국[爪蛙國] 아열(亞列) 진언상(陳彦祥)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쳤으니, 유구(琉球)의 별종(別種)이었다. - 태조 23권
유구 국왕(琉球國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전(箋)을 받들고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王世子)에게 예물을 바쳤다. - 정종 6권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乃)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 태조 3권
실록의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의 조공국들인데, 이에 일본과 왜구는 물론 자바(말레이시아?), 유구(대만? 오키나와?), 섬라(태국?) 등도 포함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의 세력권이 동아시아 전체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는 ‘북로남왜’의 남쪽의 왜라 하면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말했던 것이며, 왜구가 동아시아대륙의 남쪽에 있었다면 당시의 일본 역시 동북아시아 지역의 열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열도가 일본 혹은 왜구였다면 이들은 ‘남왜’가 아닌 ‘동왜’로 불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방의 왜구들은 명나라와 조선에 동시에 조공하였나?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천하에 천자는 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올량합 만호(兀良哈萬戶) 낭보아한(浪甫兒罕)과 대호군(大護軍) 낭이승거(浪伊升巨) 등 1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야인 부만호(野人副萬戶) 가을헌(加乙軒)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알타리 만호(斡朶里萬戶) 동망내(童亡乃) 등 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 단종 12권
여진(女眞)의 지휘(指揮) 권아룡(權阿龍)과 부사정(副司正) 김자라로(金者羅老) 등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세조 6권
‘북로’ 즉 북쪽의 오랑캐 역시 조선에 조공했다는 기록들이다. 이들 역시 조선과 명에 동시에 조공하였을까? 아니다. 명이 만약 천자국이고 조선이 제후국이었다면 조선은 조공을 받을 권리가 없다. 조공은 천자국에게 행했던 명분이었기 때문에 제후국과 번국의 의무이지, 권리가 아니다.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당연히 천자국에게 정벌 당하게 된다. 그러하니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이 천자국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곽연성(郭連城)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인(野人)과 왜인(倭人)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藩籬)이고, 모두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王)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武力)을 사용기도 하고, 혹은 성식(聲息)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은 폐단 때문에 그들의 내부(來附)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즉위(卽位)한 이후에 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서 내부(來附)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모두 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 아니다.(중략) 흑룡강(黑龍江)·속평강(速平江)의 올적합(兀狄哈)과 화라온(火剌溫)·건주위(建州衛) 올량합(兀良哈)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 등 심처야인(深處野人)과 삼위달자(三衛撻子)가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그 종인(從人)을 줄여서 후대(厚待)하여 올려 보내라. - 세조 8권
위 사료에는 조선은 북쪽의 야인 북적과 남쪽의 왜인 남만을 모두 통치하는 천자국임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아래에서 계속 보면 조선이 천자국이며 명의 역사는 짝퉁임이 보다 선명해지는데,
오도리(吾都里) 천호(千戶)·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건주위(建州衛) 백호(百戶) 각각 1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27권
건주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건주위란 무엇인가? 보편적 사관대로 해석했을 때 건주위란 명대에 만주 길림 지역에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명나라가 설치했던 지방행정 단위라 한다. 그런데 그 건주위에서 왜 조선에 조공을 한단 말인가? 조선이 명이란 말인가?
이렇듯 ‘북로남왜’라는 것은 대륙에 있던 조선의 남과 북에 위치한 오랑캐와 왜구를 일렀던 것이며, 현재의 명사(明史)는 짝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전체가 근세조선의 세력권이었다면 세계사적 흐름에서 비추어 볼 때 조선의 위치는 어디 정도가 되었을까? 아래의 사료에서 그 천하제일의 지위에 있었던 조선이 확인된다.
정덕(正德 : 명 나라 11대 임금 무종(武宗)의 연호, 1505~1521) 이전에 포도아(葡萄牙)의 가노(嘉奴)라는 사람이 품청(稟請)하고 배 5척으로 동쪽으로 행하여 빙 돌아서 서쪽에 이르러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갔다. 돌아가는 날에 임금이 은으로 주조한 소지구(小地球)를 하사하였는데, 그 위에 각자하여 이르기를‘처음 지구를 돌아보고 돌아간 사람이 가노이다.’하였다. 지금은 바닷길이 더욱 익숙하여 서양의 선박이 동으로부터 서로 가거나 서쪽에서 동으로 돌아 지구를 돌기도 하는데, 8~9개월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으니, 모두 앞사람들이 발명한 공이다. - 추측록 6권
16세기 포르투갈(포도아)인 가노가 조선임금에게 의견을 여쭙고 청하여 지구 항해를 했으며, 조선임금이 그에게 소지구를 하사하며 치하했다는 기록이다. 이는 당시 조선임금이 세계를 관할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아래의 조선관원과 영국인과의 대화가 기록된 사료에서도 조선의 세계사적 최고 지위를 알 수가 있는데,
“너희들은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 거주하는가?”
“우리나라 이름은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하고, 난돈(蘭墩 런던)과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이웃 나라에 소영국(小英國)이 있어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인가?”
“있지 않습니다. 세 나라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황상(皇上) 한 분이 주관하기 때문에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나라의 이름은 무엇 무엇인가?”
“영국, 애란국(愛蘭國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 스코틀랜드)입니다.”
“황상 한 분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 영국 임금입니다.”
“너희 나라에서도 대청(大淸)을 아는가?”
“북경(北京)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서로 통상하며 또한 가져다 바치는 것이 있는가?”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청에 가 교역하는데, 두 나라가 고루 크고 세력이 같으므로 진공(進貢)하지 않습니다.”
“군신(君臣)의 분별이 없는가?”
“흠차(欽差)가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단 아래에서 고두례(叩頭禮)를 행하지 않습니다.” - 연원직지 1권
순조 32년(1832년)에 기록된 위의 대화에서 영국인은 영국과 청은 교역을 할 뿐 조공(진공)은 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영국과 청의 대등한 위치를 설명했는데, 그러한 영국이 조선에 대해서는,
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이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치계하였다. 수본에 아뢰기를, “영길리국(英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국 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 - 정조 38권
위의 기록처럼 조선에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위의 기록들은 조선과 청 중 힘의 우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있은 사료일 텐데, 그렇다면 그 청은 어디에 있었을까? 정말 오늘날의 동북3성에서 일어난 쭝궈의 선대 국가였을까? 연원직지의 조선관원과 영국인의 대화 기록을 이어서 보면,
“영국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되며, 우리나라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북경과의 거리는 약 7만 리인데, 수로(水路) 4만 리에 육로 3만 리이며, 귀국과의 거리는 수로로 7만 리입니다.”
“너희 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
“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프랑스), 둘은 품송(品松 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 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 오스트리아)입니다.” - 연원직지 1권
위의 기록에서 영국에서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4만 리이며 영국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7만 리라 하였는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청의 북경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3만 리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쭝궈대륙의 청과 한반도의 조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쭝궈의 북경에서 한반도까지의 수로는 길게 잡아도 3천 리 정도가 될까 말까인데, 3만 리라니?
영국에서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4만 리, 청의 북경에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수로로 3만 리. 청의 북경과 조선의 거리는, 영국과 청의 북경까지의 거리와 엇비슷할 정도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니 당시 조선이 한반도로만 한정된다고 하더라도 청은 동아시아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이 동아시아대륙 전체에 걸쳐 있었으니 그 청나라는 어느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라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청과 그 이전 몽고의 원 모두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이를 아래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 문견잡기 이 기록을 보면 몽고인은 오늘날의 몽고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은’ 색목인(백인종)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청인은 몽고인과 아주 다르게 생겼으니 황색인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청나라에서는 청인은 몽고인을 아주 하대했었던 기록을 보면, 청나라는 청인(황인종)과 몽고인(색목인 백인종)이 공존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보편적 사관에 대입해 볼 때 청이 일어났다는 동북3성 지역이나 쭝궈대륙에는 백인종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청은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나라가 아니다. 오늘날 황인종과 백인종이 공존하는 지역은 투르키스탄 즉 중앙아시아가 있을 뿐이다. 아래에서 계속 보면,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48부(部)의 왕이 해마다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나라 풍속이 귀천이 없이 다 누런 옷을 입는데 황제의 의복 빛깔과 같다. 건륭(乾隆)이 황화요(黃花謠)를 듣고부터는 더욱 견제하고 있다 한다. - 삼전고 2권
몽고가 달단이라는 기록이다. 몽고가 색목인이므로 달단도 색목인이다. 달단은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남부 볼가강 부근에 타타르스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지역은 투르키스탄을 접하고 있다.
몽고(蒙古)는 곧 원(元) 나라의 유종(遺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타타르)이다. 동쪽은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북은 장성(長城) 밖을 따라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이르는 사이가 모두 그들의 소굴이다. 우리들의 역로(歷路)로 말하면 산해관 이동은 몽고 지방이 가장 가까운데 큰길에서 먼 것이 50리에 불과하다. 청인(淸人)에게 복속(服屬)한 것이 모두 46부(部)인데, 청인이 처음 일어나자 그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와서 붙은 것이었다. 청 나라에서는 특별히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여 이들을 영솔하는데 상서(尙書)와 좌우시랑(左右侍郞)을 두기를 한결같이 육부(六部)의 제도와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청인과 몽고인으로 충당하여 출척(黜陟)ㆍ상벌(賞罰)ㆍ조회(朝會)ㆍ왕래(往來)에 관한 일을 맡기고 각각 그 땅을 지키게 한다. 세시(歲時)에는 직사(職事)를 맡은 대가로 말[馬]를 바친다. 청리사(淸吏司)에 속한 것 넷이 있는데, 그것은 곧 훈구(勳舊)ㆍ빈객(賓客)ㆍ유원(柔遠)ㆍ이형(理刑) 등으로서 각각 해당 낭중(郞中)ㆍ원외(員外)ㆍ주사(主事)가 나누어 다스린다. - 문견잡기
위의 기록 역시 몽고는 달단이며, 청나라에는 청인과 몽고인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청나라는 황인종(청인)과 색목인(몽고인)이 공존한 나라였다. 그리고 몽고의 위치에 관한 부분에서, 동쪽은 흑룡강에서 서쪽은 바다에 이른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몽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몽고가 투르키스탄 지역이나 볼가강 지역 부근의 러시아 지역에 있었다면, 그 서쪽은 흑해나 발트해와 같은 바다에 이르렀을 것이다.
강희(康熙)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大鼻㺚子)는 흑룡강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에까지 북쪽이나 서쪽이 모두 몽고의 영토이며, 그 넓이는 중국의 몇 갑절이나 된다. 서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ㆍ서ㆍ남ㆍ북의 황제라고 부른다. 황태극(黃太極)과 청태극(靑太極)은 중국 서남쪽에 있으며, 액라사(厄羅斯)라는 것은 곧 대비(大鼻)이고, 객이객(喀爾喀)이라는 것은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 - 성호사설 1권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몽고는 15세기 이후 멸망했다고 하니 그 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건만, 위의 기록에 보면 몽고는 청의 강희 재위 말기인 18세기까지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강대해 강희가 아주 염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토 역시 흑룡강과 중국(청?)을 기준으로 그 서쪽과 북쪽, 서남쪽까지 매우 광대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흑룡강의 위치다. 위의 두 사료에서는 18세기 까지 존속한 몽고와 청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흑룡강이라고 말하고 있다. 몽고는 흑룡강의 서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청?)의 서남쪽을 지배했다고 하니 몽고는 흑룡강 동쪽의 영토를 취하지 못했으며, 청은 그 몽고를 염려했으니 청의 영토는 흑룡강 동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흑룡강은 동북3성 북쪽에 있으며 아무르강이라고도 이른다. 18세기 당시에 기록된 흑룡강이 오늘날의 흑룡강을 가리킨다면, 18세기의 몽고가 흑룡강을 경계로 그 서쪽 끝 바다까지와 중국(청?)의 서남쪽을 지배하였다고 하니, 18세기까지 아시아 전체가 몽고였는가?
또 그렇다만 반대로 청은 흑룡강의 동쪽과 동남쪽이 그 강역이라는 것인데, 청은 동북3성과 한반도만을 다스린 나라였는가? 아니다, 조선의 사서나 문집에서 말하는 흑룡강은 오늘날의 흑룡강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많은 모순들은 역사조작을 위해 지명이 이식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사료에서 보면 몽고의 부족 가운데 흑룡강 북쪽에 대비달자라는 부족이 있는데, 이들이 곧 액라사라고 한다. 액라사는 곧 악라사이며 아라사라고도 한다. 이들이 오늘날의 러시아다. 그런데 이 액라사가 몽고의 한 부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몽고의 후예란 말인가? 아래에서 다른 기록들을 한번 비교하며 살펴보자.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인들은 극히 두려워하여 방수(防守)하기를 극히 엄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갑군(甲軍)이 반드시 따라다니나 오히려 제재하지 못한다. - 문견잡기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관소는 옥하관(玉河館)의 곁에 있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 높은 코에 천성이 사나워서 흔히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건륭(乾隆) 때 그중의 몇 사람을 찢어 죽이게 하였더니, 그 뒤부터 자못 두려워하여 규칙을 지킨다고 한다. 청인은 그들을 천하게 여겨 개돼지로 대우한다. 그 나라에서 나는 석경(石鏡)이 가장 좋다. - 계산기정 5권
위의 여러 기록들을 놓고 비교해 봐도 악라사는 몽고의 별종 중 하나이며, 푸른 눈에 붉은 수염, 높은 코와 검은 얼굴의 색목인(백인종) 혹은 서역인(서아시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고는 달단이며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의 색목인이며, 몽고의 별종인 악라사 역시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기른 색목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흑룡강을 경계로 그 서쪽과 북쪽에는 색목인이 살았으며, 그 동쪽인 청나라에는 청인(황인종)과 색목인이 섞여 산 것이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 유관잡록
위 기록으로 역사에서 말한 흑룡강의 위치가 오늘날의 흑룡강이 아님을 알 수가 있는데, 흑룡강의 북쪽에 위치한 악라사가 중국(청? 조선?)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흑룡강의 위치를 고려하면 매우 모순된 기록이 된다.
보편적 사관대로라면 동북3성 지역은 청의 강역에 속하며 흑룡강 역시 동북3성 부근에 있기에, 흑룡강의 북쪽에 위치한 악라사는 청과 2만 리나 떨어져 있기는커녕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악라사가 현재의 흑룡강 북쪽 훨씬 바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2만 리가 터무니없는 것은, 오늘날의 흑룡강에서 북극까지도 2만 리가 채 못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흑룡강은 역사에서 말한 그 흑룡강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역사 속의 진짜 흑룡강은 어디일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실제의 흑룡강은 러시아의 볼가강이 그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위 사료에서 ‘혹룡강의 북쪽에 있는 악라사가 중국에서 2만 리나 된다’는 기록에서의 중국은 청나라가 아닌 조선의 중국(중앙조정)을 말한 것이기에, 섬서성의 장안에서 흑룡강(볼가강?)까지의 거리가 대략 2만 리는 되는 이치이다.
흑룡강의 위치를 볼가강으로 비정하면 몽고와 청, 조선의 위치와 강역이 대략 그려진다. 몽고는 흑룡강(볼가강?)의 서쪽과 북쪽, 청의 서남쪽과 동북쪽이 그 주요 강역이라고 했으니, 전통적인 러시아 지역이 된다.
청은 흑룡강(볼가강?) 동쪽과 동남쪽이 그 주요 강역이니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투르키스탄 지역이 된다. 또 그 청의 서남쪽도 몽고의 강역이라고 했으니 서아시아 지역의 일부 역시 몽고 강역이었을 것이다.
위 사료들에서 말한 몽고의 동쪽 경계는 흑룡강이며 서쪽은 바다에 이른다고 한 기록도, 볼가강이 실제의 흑룡강이었다면 저러한 기록과 지리가 서로 잘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흑룡강을 경계로 세력을 형성했던 몽고(달단)의 후예 타타르스탄이 볼가강에 존속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역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한 부족인 악라사가 세력이 강성해져 몽고를 재통일하며 러시아라 칭하고, 기존의 몽고를 작은 나라로 봉해버린 것이 러시아연방 내 타타르스탄일 확률이 높다. 오늘날의 보편적 사관에서 쓰여진 러시아사에도 러시아인이 달단(타타르)인을 학살한 것이 언급되고 있다.
볼가강(흑룡강?) 서쪽과 북쪽은 오늘날에도 색목인이 거주하며, 투르키스탄 지역에는 황인종과 색목인이 공존하거나 혼혈지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의 사서나 문집에서 말한 기록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연원직지에서 영국인이 말한 영국에서 청까지 수로 4만 리, 영국에서 조선까지 수로 7만 리라는 황당해 보이는 기록은, 투르키스탄에 있던 청에서 동아시아대륙에 있던 조선까지 수로로 3만 리를 의미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근세에는 아시아에 3개의 강대한 나라가 있었으니, 서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의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청, 동아시아의 조선이 그들이며, 해적 두목 영국이 조공하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이었으니,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의 중심은 조선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제대로 아시고 독립운동하시는가요?” - 장개석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아베 노부유키
이들의 발언에는 이처럼 무서운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리라.
끝으로 이익의 성호사설의 일부를 보면,
중고시대에 북적(北狄)에는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북호(北胡)의 종락(種落 같은 종족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잡다하여, 하(夏) 나라 때에는 훈육(獯鬻), 주(周) 나라 때에는 험윤(玁狁),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에는 흉노, 당(唐) 나라 때에는 돌궐(突厥), 송(宋) 나라 때에는 거란이라 하였다.
한 나라 때부터 흉노가 강성하였고, 흉노가 미약해지자 오환이 일어났는데, 한말(漢末)에는 선비가 오환을 멸하였다. 후위(後魏) 때에는 유유(蠕蠕)가 강성하였고, 유유가 멸망하자 돌궐이 일어났는데, 이정(李靖)이 돌궐을 멸하였다. 오대(五代)와 송 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그 작은 별부를 몽고(蒙古)라 하였는데, 뒤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에 들어와서 임금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설이 《통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흉노 이외에 다시 동호ㆍ거란ㆍ오환 등이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동호의 후예인데, 어찌 거란을 흉노라고 지적해서야 되겠는가?원(元) 나라 이후로는 몽고가 가장 강성하여 북막(北漠)을 겸병(兼倂)하였으므로 사적(沙磧 사막)에서 요동 지경까지를 모두 몽고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 가운데에도 저(氐 전연(前燕))는 바로 서융(西戎)이고, 갈(羯 후조(後趙))은 바로 흉노의 별부이다. - 성호사설 11권 동호, 오환, 거란, 선비가 몽고의 조상으로, 이들은 모두 색목인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