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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광문자전(廣文者傳)
조선 후기에 박지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서광문전후 書廣文傳後〉와 함께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다. 저작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경 18세 무렵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서 그가 18세 때 병을 얻어 밤이면 문하의 옛 청지기들을 불러 여염의 기이한 일들을 즐겨 듣곤 하였는데, 대개 광문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광문자전〉을 쓰게 된 동기에 관하여 작자는 그 서문에서 “광문은 궁한 걸인으로서 그 명성이 실상보다 훨씬 더 컸다. 즉, 실제 모습(실상)은 더럽고 추하여 보잘것없었지만, 그의 성품과 행적으로 나타난 모습(명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세상에서 명성 얻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형벌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도둑질로 명성을 훔치고, 돈으로 산 가짜 명성을 가지고 다툴 일인가.”라 하여, 당시 양반을 사고 판 어지러운 세태를 꾸짖었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문은 종로 네거리를 다니며 구걸하는 걸인이었다. 여러 걸인들이 그를 추대하여 두목으로 삼아 소굴을 지키게 하였다. 어느 겨울밤 걸인 하나가 병이 들어 앓다가 갑자기 죽게 된다. 그러자 이를 광문이 죽인 것으로 의심하여 쫓아낸다. 그는 마을에 들어가 숨으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되어 도둑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의 말이 너무나 순박하여 풀려난다. 그는 주인에게 거적 한닢을 얻어 수표교(水標橋) 밑으로 가서 숨어 있다가, 걸인들이 버리는 동료걸인의 시체를 가지고 있던 거적으로 잘 싸서 서문 밖에 장사지내 준다.
전에 숨으러 들어갔던 집주인이 계속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 그는 광문으로부터 그동안의 내력을 듣고는 가상히 여겨 광문을 어떤 약방에 추천하여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어느날 약방에서 돈이 없어져 광문이 또 다시 의심받게 된다. 며칠 뒤에 약방 주인의 처이질이 가져간 사실이 드러나 광문의 무고함이 밝혀진다.
주인은 광문이 의심을 받고도 별로 변명함이 없음을 가상히 여겨 크게 사과한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에게 널리 광문의 사람됨을 퍼뜨려 장안사람 모두가 광문과 그 주인을 칭송하게 된다.
광문은 남의 보증서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보증하면 전당하는 물건이 없어도 많은 돈을 빌 수 있게 된다. 광문은 얼굴이 추하고 말은 남을 잘 감동시키지 못하였다. 입은 크고 망석중이놀이를 잘 하였으며, 철괴춤을 곧잘 추었다. 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을 놀릴 때는 “네 형이 광문이지.”라고 할 정도였다.
길을 가다 남이 싸움하는 것을 보고 그도 웃옷을 벗고 덤벼들어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땅에 금을 그어 시비를 가리는 것같이 하면, 싸우던 사람도 그만 웃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광문은 마흔이 되어서도 머리를 땋고 있었다. 사람들이 장가들기를 권하면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는 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므로 얼굴이 추해서 장가들 수 없다고 말하였다. 집을 지으라 권하면 부모처자도 없는데 집은 지어 무엇하느냐고 하였다.
장안의 명기들도 광문이 기리지 않으면 값이 없었다. 전일 장안의 명기 운심(雲心)이가 우림아(羽林兒)·별감·부마도위(駙馬都尉)의 겸인들이 모여 술상을 벌인 자리에서 가무(歌舞)하라는 영을 듣지 않다가, 광문이 자리에 들어와 우스운 짓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도 따라 칼춤을 추게 되었다. 이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즐기며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자전〉에서 박지원 여항인(閭巷人)의 기이한 일을 끌어와서 풍교(風敎)에 쓰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정 있고 정직하고 소탈한 새로운 인간상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작가가 살고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사실주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광문자전〉의 소원관계(遡源關係)는 허균의 〈장생전 蔣生傳〉과 어느 면에서 상통한다. 판소리계 소설인 〈무숙이타령〉, 일명 ‘왈짜타령’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한편, 이유원(李裕元)의 ≪춘명일사 春明逸事≫에 나오는 〈장도령전〉과도 통하여 당시 이런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燕巖集
<<참고문헌>>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광반와유고(廣胖窩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홍이장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홍이장(洪以槳)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914년 방손인 경하(景夏)·온(溫) 등이 편집, 간행했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송낙헌(宋洛憲)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최병심(崔秉心)·옥(鈺)·온·경하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13수, 소 1편, 제문 1편, 뇌문(誄文) 2편, 서(序) 1편, 녹(錄) 1편, 권2는 부록으로 반상일기(返喪日記) 1편, 제문 11편, 만사 94수, 서(書) 3편, 제현시(諸賢詩) 7수, 기 1편, 사실략(事實略) 1편, 행장 1편, 축문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강개한 선비의 정신이 나타나 있으며 품격이 높다. 〈견분 遣憤〉·〈실제 失題〉·〈술회 述懷〉 등은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울분이 폭발되어 사물에 대한 비평과 사회와 정부에 대하여 아쉬운 심정을 읊은 것이며, 〈왕림사 王臨寺〉·〈유변산 遊邊山〉·〈관풍루 觀風樓〉 등은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겨서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한 글이다.
〈논변최창대구무잉청우춘양선생종사성무소 論辨崔昌大構誣仍請尤春兩先生從祀聖廡疏〉는 송시열(宋時烈)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그의 무고함을 역설하고 신원을 청한 상소문이다.
〈동정록 東征錄〉은 1722년(경종 2) 8월 20일부터 9월 15일까지 황강(黃江)에서 있었던 권상하의 제사에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것으로, 은진·청주·음성·황강·화양동·속리산 등을 지나면서 보고 들었던 풍물·경치 등을 담은 기행문이다.
이 밖에 그가 단천(端川)에서 죽자 그 시신을 운반하여 장사지낼 때까지의 사연과 경로를 기록한 〈반상일기〉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산유고(匡山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백민수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백민수(白旻洙)의 시문집. 2권 1책. 석인본. 1979년 그의 손자인 남근(南根)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원모(柳源模)의 서문과 권말에 손자 남근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28수, 서(書) 25편, 권2에 소 3편, 책(策) 1편, 서(序) 1편, 기 2편, 제문 3편, 상량문 2편, 잡저 1편, 부록으로 가장 1편, 행장 1편, 묘표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시어가 중후하고 학자풍의 시상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근차하서선생인자운 謹次河西先生人字韻〉은 세상에 사람다운 사람이 적어짐을 탄식한 내용이다. 서(書) 가운데 조병덕(趙秉悳)에게 보낸 여러 차례의 서는 자기의 선조 백인걸(白仁傑)을 봉안한 봉산서원(蓬山書院)의 행사와 운영에 대해 상의한 내용이며, 그외에는 모두 학우간에 안부와 학문에 대해 선현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의 견해를 전한 것이다.
소 가운데 〈청원승무소 請願陞廡疏〉는 이항(李恒)·유희춘(柳希春)·노진(盧禛)·기대승(奇大升)·박순(朴淳) 등 호남출신 5현(五賢)과 백인걸을 승무(陞廡)해 달라는 소로서 그들의 연원·학공(學功)을 들어서 상소한 것이다.
책의 〈역도 易道〉는 천지만물이 역상(易象)에 따라서 변화하며 존립한다는 내용으로 경국(經國)·치민의 도리도 또한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광서집(廣棲集)
조선 말기의 학자 이유성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이유성(李有星)의 시문집. 3권 1책. 목활자본. 1935년 그의 손자 광흠(光欽)이 편집, 간행했는데, 권두에 노상직(盧相稷)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조영규(趙暎奎)와 종증손 정호(正浩)의 발문이 있다.
권1·2는 시 65수, 서(書) 4편, 잡저 2편, 서(序) 1편, 기 1편, 상량문 1편, 축문 1편, 애사 1편, 제문 8편, 권3은 부록으로 시 2수, 만사 40수, 제문 12편, 발 1편, 가장 1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체로 평이하며,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효감천 孝感泉〉·〈학산정원망 鶴山亭遠望〉 등은 조상의 업적을 생각하며 감회에 젖어 있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영백설 詠白雪〉·〈초월 初月〉·〈은하 銀河〉 등도 시제가 지닌 서정성을 잘 살리고 있다.
〈여정안보원길 與鄭安甫元吉〉·〈안덕명상준서 安德明相俊書〉 · 〈답이상천서 答李相天書〉 등은 대개 학문의 목표와 방도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내용으로, 성학(聖學)에 관한 지향과 소신을 피력한 것이 많다.
잡저의 〈지취우정신뢰 識聚友亭迅雷〉는 취우정에 갔다가 갑자기 소나기와 벼락을 만나 어두움 속에서 고통을 당한 친구들을 구한 사연과, 벼락은 인간의 잘못을 징계하는 하늘의 벌로서 삼가는 사람에게는 해를 주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을 말하고 있다.
서(序)의 〈보인회서 輔仁會序〉는 쇠퇴해가는 학문을 부흥하고 학자를 양성하고자, 이상두·문욱순·이공직(李孔直) 등과 함께 조금씩 출자해서 장학기금을 마련한다는 보인회의 설립취지와 관리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광서기 廣棲記〉는 자호(自號)에 대해 풀이한 것으로, 앞으로 호연지기를 키워 나가겠다는 신념을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 〈덕산재상량문 德山齋上樑文〉은 그의 조상을 추모하는 전각을 지으면서 쓴 상량문이며, 〈산음사개기축문 山陰祠開基祝文〉은 사당을 지으면서 토지신에게 무사할 것을 기원한 축문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광석유고(廣石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김태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김태현(金台鉉)의 시문집. 3권 1책. 필사본. 권1에 시 141수, 권2에 서(書) 4편, 소 6편, 서(序) 1편, 묘갈명 1편, 권3에 행록 2편, 행장 1편, 제문 7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유장환(兪章煥)의 수연운(壽宴韻)을 비롯하여 이면우(李勉祐)·김우경(金友敬) 등과 주고받은 것이 많으며,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삼아 읊은 내용들이다. 서(書) 중 재종숙에게 보낸 답서는 당시 정도(正道)가 사라져가고 여러 가지 잡론이 일어나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소는 대부분이 사직소이다. 편말에 〈제소설편말 題小說篇末〉과 〈서언책후 書諺冊後〉가 있는데, 〈서언책후〉는 우리 나라 단군과 중국 당나라 및 요나라의 기원운(紀元運)을 비교, 논술하고, 또한 우리 나라 조선 태조와 명나라 태조의 창업운을 방운(邦運)에 결부시켜 비교, 서술한 것이다. 규장각·장서각도서에 있다.
광암유집(廣巖遺集)
조선 말기의 학자 여석보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여석보(呂錫輔)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938년 그의 손자인 영달(永達)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연구(柳淵龜)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탁영(李鐸英)과 손자인 영달·영범(永範)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08수, 서(書) 20편, 책(策) 1편, 권2에 서(序) 1편, 제문 10편, 부록에 유거차운(幽居次韻) 18수, 만사 21수, 제문 7편,행장·묘지명·묘갈명·기(記)·상량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시는 대개 산수·자연을 소재로 읊은 것이 많고, 공부하는 중에 학문적인 감회와 희열을 읊은 것도 있다. 서(書) 중 〈답이사행 答李士行〉은 예설에 관한 문답으로 연사(練祀)를 지낼 때 상복의 변제(變制)하는 절차에 관하여 답한 내용이다.
책 중 ‘문민지소욕천필종지운운(問民之所欲天必從之云云)’은 ≪서경≫ 중 〈태서 泰誓〉 상편의 내용에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紂)를 정벌하기에 앞서 여러 제후들에게 “하늘은 백성을 가엾게 여기고, 백성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따른다(天矜于民 民之所欲 天必從之).”고 한 말을 인용하여, 민의에 따르는 정치를 할 것을 강조하며 시폐의 척결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자식과 같이 여기고 인의에 의한 도덕정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천집(廣川集)
조선 후기의 학자 조성윤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조성윤(趙性胤)의 시문집. 3권 2책. 목활자본. 1864년(고종 1)경 아들 태규(台奎)와 제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영(張錫英)의 서문과 권말에 조성혁(趙性赫)·이병주(李秉株)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76수, 권2에 서(書) 17편, 서(序) 3편, 기 3편, 명 4편, 잠 1편, 찬 1편, 잡저 3편, 유사 2편, 제문 6편, 권3은 부록으로 만·제문·가장·행장·행록·묘지명·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야영 夜咏〉·〈우음 偶吟〉·〈설야회인 雪夜懷人〉 등의 시는 은일적 감회와 고독을 잘 표현하였다.
〈관등 觀燈〉·〈해인사견염불승희제 海印寺見念佛僧戱題〉 등은 불교적 소재를 해학적 기분으로 다루고 있어 풍속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밖에 여행시가 몇 수 있는데, 그 중 〈숙기산재 宿基山齋〉는 나그네의 여수를 잘 묘사하였다.
서(書)에는 대개 간단한 안부편지가 많은데, 그 중 이영기(李永基)에게 보낸 〈답이자언 答李子彦〉은 비간(比干)·기자(箕子)·백이(伯夷)·숙제(叔齊) 등 현자에 대한 인물평으로 유교철학의 ‘인(仁)’을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한루기(廣寒樓記)
조선 후기에 수산이 지은 〈춘항전〉 이본
조선 후기에 수산(水山:필명, 본명 미상)이 지은 〈춘항전〉 이본. 1책(62장). 한문필사본. ‘수산광한루기’라고도 한다. 필사연도는 미상이다.
동명의 필사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롯하여 몇 종류가 있고, 활자본으로는 남원군청에서 간행한(1924·1927) 것이 개인소장 및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으로 전하고 있다. 〈광한루기〉의 여러 이본들의 편차와 내용은 거의 같으며 다만 다소의 출입이 있다.
남원군청간행본의 체재는 권두에 운림초객(雲林樵客)의 광한루기서(廣寒樓記敍), 소엄주인(小广主人)의 광한루기후서(廣寒樓記後敍)·독광한루기법(讀廣寒樓記法), 이동한(李東漢)의 광한루기발간사, 백정기(白定基)의 중간광한루기서(重刊廣寒樓記敍), 8회로 나뉜 본문, 그리고 책 끝에 광한루기소인(廣寒樓記小引)·부록 등이 붙어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62장의 필사본은 광한루기에 대한 운림초객의 서일(敍一)과 소엄주인의 서이(敍二) 및 독법(讀法)·시(詩)·인(引) 등이 책머리에 보이고, 이어서 8회에 걸친 본문이 각각 2자의 제목과 16자의 서술적 부제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본문 진행의 전후에 평자의 설명과 느낌의 기록 및 본문 행간에 비평사항이 삽입되어 있다.
이 필사본의 내용은 기타본과 큰 차이점이 없다. 내용 구성은 제1회 심춘(尋春), 제2회 탐향(探香), 제3회 응정(凝情), 제4회 석별(惜別), 제5회 거령(拒令), 제6회 수절(守節), 제7회 봉명(奉命), 제8회 천약(踐約)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시대적 배경이 고려 공민왕시대의 홍건적란(紅巾賊亂)으로 설정되어 있고 주요 인물은 〈춘향전〉의 이도령이 도린(桃隣 혹은 花卿)으로, 방자는 금한(金漢 혹은 김한)으로 되어 있으나, 월매와 춘향은 그대로이고, 다만 향단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볼 때 이 작품의 제목은 중국의 ≪서상기 西廂記≫에서 영향받아 나온 것임이 인정된다.
특히 본문의 내용 중 대화 부분에 중국의 백화체(白話體)가 사용된 점으로 보아 ≪서상기≫ 및 기타 중국 백화소설과의 영향관계가 다소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자 문제도 중국어와 고문이 모두 일정 수준에 오른 역관 계층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校註春香傳(趙潤濟, 乙酉文化社, 1957)
<<참고문헌>>春香傳硏究(金東旭,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6)
<<참고문헌>>對校春香傳(閔濟, 同和出版公社, 1976)
<<참고문헌>>水山廣寒樓記 資料解題(蘇在英, 崇實語文 4, 1987)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영의 실기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영(李榮)의 실기. 3권 1책. 목활자본. 1902년 그의 외손 곽종철(郭鍾澈)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이상두(李相斗)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권1에 세계(世系) 1편, 연보 1편, 시 3수, 권2·3은 부록으로 사연록(賜宴錄)·달구지(達丘誌)·행록·묘지·묘갈명·유적·행적후(行蹟後)·통문·정장(呈狀)·문(文)·녹(錄)·기·시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병중유감 病中有感〉과 만시(輓詩) 2수로 되어 있는데, 만시에는 그가 북병사가 되어 출발하려고 할 때 부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정한을 애절하게 표현한 것이 있다.
부록 중 〈사연록〉은 1551년(명종 6) 왕의 특명에 의해 염근(廉謹)한 조신들을 선발하여 궐내에서 연회를 베풀고 시상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홍섬(洪暹)·윤현(尹鉉)·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이준경(李浚慶)과 함께 당시 회령부사였던 그도 참석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기타 왕으로부터 포상받은 내력과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기 위해 발의한 통문 등이 있어 그의 행적과 인품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괴담유고(槐潭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배상열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배상열(裵相說)의 시문집. 6권 3책. 목판본. 형인 상현(相賢)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으나 간행연도는 미상이다. 권두에 1799년(정조 23)에 쓴 조술도(趙述道)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한동(金翰東)이 쓴 ≪괴담유고≫의 지(誌)와 1808년(순조 8)에 황용한(黃龍漢)이 쓴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2편, 서(書) 10편, 서(序) 2편, 기 2편, 명 1편, 잡저 3편, 권2∼5에 잡저 10편, 권6에 부록으로 저자의 행장·묘표·묘지·제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書)에는 〈상대산이선생서 上大山李先生書〉 등 10편이 있다.
권2의 〈독서차록 讀書箚錄〉은 사서 등 경서의 내용을 해설하고 보충, 설명한 글이다. 권3의 〈도학육도 道學六圖〉는 이기혼융(理氣渾融)·이오분합(二五分合)·천지만물조화·심해만화(心該萬化)·인사물리(人事物理)·위학용공(爲學用功)의 6개 도표로 천명(天命)의 근원과 인사(人事)의 도덕 및 수양방법을 밝힌 내용이다.
이는 역을 근거로 하여 상수학(象數學)의 입장에서 규명한 저자의 대표적 글이다. 권4의 〈역설제도 易說諸圖〉는 복희팔괘(伏羲八卦) 및 문왕후천도(文王後天圖) 등 16개의 도표를 그린 것이고, 〈추대연수 推大衍數〉는 ≪주역≫을 도수(度數)로 설명한 것이다.
권5의 〈기삼백해 朞三百解〉는 천체주위지도(天體周圍之圖) 등 수십 개의 도표를 그려서 연월일시의 분도수(分圖數)를 설명한 것이다. 권6은 부록으로, 행장은 김진동(金鎭東)이 쓴 것이고, 묘표는 1795년 유장원(柳長遠)이 지은 것이며, 묘지는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괴당문집(槐堂文集)
조선 중기의 의병 이만승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의병 이만승(李曼勝)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851년(철종 2)에 처음 간행되고, 그뒤 1941년 10세손 태식(泰植) 등에 의하여 중간되었다. 권두에 하겸진(河謙鎭)의 중간서(重刊序)가 있고, 권말에 유치명(柳致明)의 구간서(舊刊序), 유치호(柳致皜)의 구간발(舊刊跋), 장석영(張錫英)과 10세손 태식의 중간발문 등이 있다.
권1은 부 1편, 시 13수, 소(疏) 1편, 서(書) 6편, 잡저 2편, 제문 3편, 고문(告文) 1편, 권2는 부록으로 지구신장(知舊贐章)·지구왕복서(知舊往復書)·만사·제문·묘갈명·묘지명·병자창의록(丙子倡義錄)·제의려성책후(題義旅成冊後)·정본읍장(呈本邑狀)·정순영장(呈巡營狀)·척록(摭錄) 등으로 되어 있다.
소 1편은 〈응지진언소 應旨進言疏〉로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지어올린 것이다. 내용은 수군덕(修君德)·보민암(保民嵒)·진군자퇴소인(進君子退小人)·입삼공(立三公)·종간여류(從諫如流)·육경구임책성(六卿久任責成)·방백연수구임책성(方伯連帥久任責成) 등 7개항에 걸쳐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 인재 발굴과 인격 중시를 강조하고 있다.
서(書)는 병자호란 때 의령(宜寧)의 의병장으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호소사(號召使)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또한 두 아들에게 준 〈유이자서 遺二子書〉는 1640년(인조 18) 자녀들에게 노비와 전답을 분급한 글인데, 당시 상속제도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잡저의 〈묘상유찬 猫相乳贊〉과 〈계불명설 鷄不鳴說〉은 모두 문학적 수상(隨想)이다. 부록 중 〈병자창의록〉에는 병자호란 때 경상도 9개 읍에서 일어난 의병수와 의병장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병장은 의령의 이만승, 고령의 이현룡(李見龍), 영일의 정영준(鄭英俊), 하양 채임(蔡栠), 청하 이간(李旰), 경산 어용해(魚湧海), 신녕 조한필(曺漢弼), 장기의 이성장(李成樟), 단성 윤승(尹昇) 등으로 되어 있다. 병자호란의 전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괴수유고(怪叟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오면수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오면수(吳冕洙)의 시문집. 7권 3책. 석인본. 1969년 그의 현손(玄孫 : 손자의 손자) 종진(宗鎭)과 족인(族人 : 먼 친척뻘 되는 사람) 철환(喆煥)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이 없고, 권말에 종진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부 1편, 시 400여수, 권2에 책(策) 2편, 논 3편, 변 1편, 서(書) 45편, 문목(問目), 권3에 잡저 13편, 서(序) 6편, 기 5편, 설 4편, 혼서(婚書) 1편, 문(文) 3편, 축문 1편, 제문 4편, 행장 2편, 권4에 괴옹집성(怪翁集成)·잡지(雜識), 권5·6에 만록(晩錄) 상·하, 권7은 부록으로 서(序)·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의 〈사불우부 士不遇賦〉는 훌륭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세상에 등용되기 어려운 지식인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다.
시에는 〈강중암화 江中巖花〉·〈정전촉규화 庭前蜀葵花〉·〈운수팔경 雲水八景〉 등의 서정시와 교훈적 성격이 짙은 〈자견 自遣〉·〈자계 自誡〉 등을 비롯하여, 역사적 인물들을 소재로 취한 〈예양 豫讓〉·〈항우 項羽〉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재를 다룬 시들이 고루 실려 있다.
책으로는 그가 철종 때 어명으로 국가재정의 기반인 삼정의 문란에 대해 정연한 논지를 전개해 지었으나 올리지 않은 〈어제삼정책 御製三政策〉과, 이도재(李道在)가 고을에 수령으로 재직하면서 교육풍토의 쇄신을 위해 그에게 요청해 교육의 이념과 취지 등에 대해 서술한 〈대흥학지방 對興學之方〉이 있다.
논에는 치밀한 구성과 폭넓은 비유체로 쓴 〈참론 僭論〉·〈예양국사지보론 豫讓國士之報論〉·〈범증론 范增論〉 등과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을 논한 〈논이공원성서 論二公原性書〉·〈여인논성 與人論性〉 등이 실려 있다.
변으로 〈변허미수예론 辨許眉叟禮論〉과 서(書)로 기정진(奇正鎭)·홍순목(洪淳穆)·이승경(李承敬)·이도재 등과 주고받은 편지도 훌륭한 글로 돋보인다.
잡저에는 그가 평생동안 세속적인 출세에 초연하게 처하면서 연마한 학문적인 연구성과가 집약된 〈왕패문답 王覇問答〉·〈체용문답 體用問答〉·〈예의 禮疑〉·〈석무변 釋無辨〉 등과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견문잡록 見聞雜錄〉·〈분론대개 分論大槪〉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잡저에는 임진·정유년의 두 왜란의 전투상황과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약력을 발췌해 기록한 것으로, 전란사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잡지〉·〈고사〉 등과 조선 개국 때부터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만록〉 등이 실려 있다.
이외에도 〈잡설〉·〈서진자경통감속편후 書陳子經通鑑續編後〉·〈독왕형공문 讀王荊公文〉·〈국조허조소찬오례의향음주례절차 國朝許稠所撰五禮儀鄕飮酒禮節次〉·〈인통사단설 仁統四端說〉 등을 비롯해 자료적인 측면에서 귀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