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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㉔ - 3
제4장 인도 불교의 전개 – 불교 상가의 사회적 정착
제5절 안드라의 불교와 남인도의 불교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4. 샨가무 시대의 타밀 불교
1) 남인도의 불교 전래
인도 대륙의 최남단인 타밀 지방에 언제부터 불교가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전승에 의하면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의 개교를 위해 길을 가던 도중, 칸치푸람에 머물렀을 때 아쇼카광의 명을 받아 스투파를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뚜렷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늦어도 1세기에는 이 지방에 불교가 들어와 있음이 확실하며, 이 같은 사실은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즉 샨가무라 불리는 일군의 타밀 문학의 저자들 가운데는 에람포디야르나 상가바르나 같은 불교도의 이름이 나와 있다. 이러한 사실도 이 시대에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샨가무와 샨가무 시대
샨가무란 서기 1세기부터 3세기 동안을 중심으로 하여 번성한 타밀 고전 문학의 총칭이다. 이 시대에는 활발한 문학 활동이 전개되어 문법, 사화집(詞華集), 소시(小詩), 서사시 등의 장르에 걸친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이들 작품 속에 나타난 사회 상황은 그리이스와 로마의 자료에 나타난 사회상과 일치하고 있다. 이 문학에 의해 대표되는 시대는 역사적으로도 ‘샨가무 시대’로서 알려져 있다.
샨가무 문학은 치요라, 판디야, 첼라의 3왕국에 의해 분할 영유되었던 타밀 지방을 무대로 전개된다. 치요라는 카베리 강변의 우리이율을 수도로 하고 있었는데, 카베리파티남(푸하르)도 수도에 비견되는 유력한 도시였다. 판디야의 수도는 마두라이로서 바이하이 강변에 있다. 치요라는 반지를 수도로 삼고 있었다. 카르부르라고도 기록되는 이 도시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서해안에 위치한 지금의 쿠랑가누르 부근이라는 설과 내륙의 카루르라는 2가지 설이 있다.
쿠랑가누르는 「에튜트라해 안내기」에 춘디스 무지리스로 알려진 항구 도시로서 서인도의 서해안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한편 카베리파티남은 지금이 카마라인데, 현재는 한산한 어항에 불과하지만, 푸톨레마이오스도 ‘카베리스’라고 기록할 정도로 포두케(지금의 퐁두셀리 시 남쪽 변두리의 아리카메드)와 나란히 당시의 남인도 동해안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 도시의 하나였다. 이곳에는 로마인과 그리이스인의 거류지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처럼 세 왕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지방과 도시들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샨가무 문학 중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라바디하람」도 역시 푸하르, 마두라이, 반지의 세 도시를 무대로 전개되는 서사시이다.
치요라의 푸하르에 사는 코비람이라는 상인은 칸나키라는 아내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정숙한 아내였지만, 코비람은 미모를 자랑하는 마타비라는 여배우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아내를 버린다. 후에 코비람은 파산하여 매우 고생하게 되는데, 정숙한 아내 칸나키는 시종일관 남편을 돕는다. 코비람은 마지막 남은 칸나키의 발목 장식을 마두라이 시중에서 팔아 버리는데, 우연히도 판디야 왕비의 발목 장식이 도난당하게 된다. 코비람은 그것을 훔친 도둑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사하고 만다.
칸나기는 남편의 억울한 죄를 밝히고 자신의 유방을 잘라서 던진다. 그러자 마두라이 거리는 온통 불길에 휩싸여 타 버렸다. 이처럼 칸나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더할 나위 없는 정절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날에도 타밀인들이 이상적 여인상으로 경애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불교 서사시 「마니메하라이」
위의 「시라바디하람」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서사시 「마니메하라이」인데, 그 작자는 싯타라이 삿타누르라는 불교도이다. 코비람이 억울한 죄로 옥사하자, 여배우 마타비는 세속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 그녀와 코비람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마니메하라이인데, 이 이름은 마니메하라이 여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서사시는 마니메하라이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차츰 불교적인 세계관에 빠지더니 급기야는 비구니로 출가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술과 기적, 신통력이 전편을 감싸고 도는 가운데 불교적인 무상관과 인연 사상 등이 줄거리를 엮어 나간다. 다채로운 인간상은 제각기 과거세에서의 특정 인물이 환생한 것이라고 하여, 현세에 환생하는 윤회의 원인이 물리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신학적인 논의도 물론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서사시는 여러 지역에 세워져 있는 훌륭한 대승원, 불상, 비구들의 생활, 불좌에 대한 예배 등, 당시 타밀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불교의 갖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마니메하라이는 치요라의 왕을 움직여 교도소를 없애고 고아원이나 의료 시설 등으로 대치시키는데 이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불교 사상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인과 관계에 대한 중요성 부여이다. 북인도와 북서인도에서 제작된 아바다나 문학도 바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라바디하람」과 「마니메하라이」는 샨가무 문학이긴 하지만, 그 시대는 4~5세기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아바다나라는 방대한 설화문학도 서기 1~2세기에서 4~5세기에 걸치는 기간 동안에 성립되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북인도와 남인도의 두 곳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가진 불교 문학을 성립시켜서 세인의 찬탄과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불교가 인도에서 발전되며 정착되어 간 하나의 과정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타밀 불교의 성쇠
1) 타밀의 힌두화와 불교
샨가무 문학이 번창하던 서력 기원 이후의 수세기 동안, 타밀은 북인도로부터 흘러드는 새로운 힌두 문화의 물결을 흡수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컨대 인드라나 바루나 같은 베다 신화의 신들이 숭배되는가 하면 베다적인 제사도 자주 행해지고 있었다. 「마니메하라이」도 일 년에 한번 열리는 인드라 제사가 가까워진 거리의 떠들썩하게 붐비는 모습을 서술하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동시에 비쉬누, 쉬바, 크리쉬나, 파라라마 등 현대 인도에서까지도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힌두의 새로우 신들이 대두되어 점차로 타밀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바라문들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여 베다의 제사를 집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사성제도는 아직 북인도에서처럼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 샨가무 문학에서도 사성제도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으며, 이 제도가 완전한 형태로 정착한 것은 6세기의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케랄라의 나야르족에 있어서는 카스트∙바르나 제도의 확립이 8세기 때의 일이 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타밀은 전통적이고 부족적인 결합이 강하게 작용하던 사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북인도와 데칸 지방으로부터 불교가 사상과 종교 신앙의 새 물결을 타고 타밀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북인도나 데칸 지방과 마찬가지로 불교는 먼저 상공업자를 주체로 하는 상층 계급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불교 서사시 「마니메하라이」에는 그 전편을 통하여 불교를 신앙하는 상층 계급의 생활이 그려져 있다. 불교는 서방 및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에 의한 부유한 사회를 배경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2) 전성기의 타밀 불교
4~5세기 사이의 타밀은 정치적으로 볼 때 전혀 불투명한 시대이다. 치요라나 판디야의 추세도 확실치 않으며, 다만 카라부라라는 왕가가 지배권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이 왕조의 치적을 나타내 주는 문헌이나 유품은 극히 적기 때문에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에 팔라바 왕조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들을 가리켜 ‘사악한 수호자’라 하고, 또 브라흐마데야(바라문에 대한 보시로서 주어진 촌락과 토지)를 빼앗았다고 하는 기록도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반(反) 바라문적 색채가 짙은 왕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카라부라 왕가는 불교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스리랑카의 전승은 이 시대에 있어서의 칸치푸람과 나가파티남 등의 융성했던 불교의 모습을 전하고, 또 불교의 학승으로서 유명한 붓다닷타(4세기)가 칸치푸람의 정사에 거주하면서 팔리어 저작에 전념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대승불교도 이미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었으며, 특히 안드라 지방은 대승불교 운동의 거점으로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5세기경, 치요라 왕국의 상가미트라는 대승불교를 가지고 스리랑카로 건너가서 마하비하라파와 아바야기리파의 분립을 야기시켰다고 한다. 중국에 선(禪)을 전했다는 보디다르마(보리달마, 菩提達磨)도 6세기 초엽의 칸치푸람의 왕자였다고 한다. 또 불교 논리학에 정통한 학승으로 유명하며 바수반두(세친, 世親)의 제자가 된 디그나가(진나, 陳那)도 6세기 사람으로 칸치푸람의 교외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다르마팔라도 528년부터 560년까지 칸치푸람에 살았으며, 후에 날란다로 거취를 옮겨 그 학식을 칭송받게 된다. 그의 제자가 시라바드라인데, 그는 날란다에서 중국 승려 현장의 스승이 되었던 인물이다.
또 카베리파티남 일대에서는 4세기와 5세기에 속하는 다량의 청동불상과 청동보살상이 출토되고 있다. 결국 이 시대의 타밀은 스리랑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불교가 번영했으며, 특히 칸치푸람과 카베리파티남, 마두라이는 팔리어 경전 연구의 중심지였다. 팔리어는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남인도에서도 불교들 사이에 수용되어 불교를 담당해 온 언어였던 것이다.
타밀 지방에서 번영한 불교의 부파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상좌부 계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스투파는 없지만 여러 가지 문헌 자료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스투파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대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이 활발히 조성되어 예불의 대상이 되었으며, 각종의 의식도 거행되어 북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유신론적 경향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엽부터 남인도는 새로운 정치적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치요라는 거의 차취를 감추고 대신 판디야 왕가와 팔라바 왕가가 카라부라 왕조의 뒤를 이어 타밀을 분할하여, 데칸의 차르캬 왕조와 더불어 약 300년간 3국이 대립∙항쟁 시대를 계속해 나가게 된다.
차르캬 왕조는 프라케신 1세의 영도하에 6세기 중엽에 서부 데칸의 카단바 왕조의 지배를 벗어나 바다미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독립한 세력이다. 다음 대인 프라케신 2세는 구자라트에서 마르와 지방 및 칼링가 지방까지 그 판도를 넓혔는데, 특히 안드라 지방에는 아우인 비쉬누바르다나를 왕으로 파견하여 동(東) 차르캬 왕조의 기촐르 굳건히 다졌다. 그 중심지가 된 도시는 벵기이다.
팔라바 왕가는 카베리 강변의 옛 치요라의 영토를 그 지배하에 두었다. 나라싱하바르만 1세는 프라케신 2세 치하의 차르캬 영토를 침공하여 그 본거지인 바다미까지 군대를 진격시켰다. 또 그는 스리랑카의 왕위 계승권에도 관여하는 등, 그 무훈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중국 승려인 현장이 여기에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왕의 치세 때였다. 그는 칸치푸람에 위치하고 있는 백여 개의 사원에서 일만 명의 비구가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또 이곳이 드라비다국의 수도로서 스리랑카의 창구 역할을 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거리의 남쪽에는 대승원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나라싱하바르만 2세(재위 695~722년)는 마하바리프람에 해안 사원을 세운 왕으로 유명한데, 동시에 나가파티남(지금의 단조르)에 시나 사원을 세워서 무역차 와 있던 중국인 불교도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또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 나가파티남도 오랜 전통을 지닌 상업도시로서 동해안의 상업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도시도 역시 불교 센터의 하나로서 번영을 누려 왔다.
3) 바크티 신앙(박티 신앙)과 불교
7~8세기가 되면서부터 불교에 위협을 주는 시대가 시작된다. 북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는데, 특히 타밀에서는 힌두교 바크티 신앙의 흐름이 도도한 대하를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변모시켜 갔다. 그리하여 바크티 신앙의 흐름을 이어받은 비쉬누파의 아르바르나 쉬바파의 나야나르 등의 성자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음유시인(吟遊詩人)으로서 유행을 하며 시를 읊고 다녔다. 즉, 자기 자신을 신들에게 바치고 그 신들을 무한히 사랑함으로써 허무와 무상함을 이기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승원을 중심으로 하여 침체의 경향을 보이고 있던 불교에 커다란 자극과 타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승원의 깊숙한 장소에서 비구들은 학문적인 불교 연구에 전념하여 그 성과를 크게 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반 재가 불교도들은 올바른 계행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태도를 명심하고, 또 비구를 중개로 하여 보시에 의한 공덕을 쌓아서 천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본래의 생생하고 청신한 종교성이 점차 희박해져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강하게 불교를 의식하고 거기에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신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을 역설하는 바크티 운동의 출현은 남인도 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시키게 된다. 그리고 자이나교나 아지비카교도 이러한 반불교적인 힌두 바크티 파의 세력에 동조했다.
이 시대의 풍조를 설명해 주는 일화가 12세기의 「구루 파람파라(조사상승록, 祖師相承錄)」에 기재되어 있다. 8~9세기경, 비수누파 음유시인(아르바르)의 한 사람인 티르망가이는 쉬리랑가나의 랑가나타 사원을 부흥시키려고 뜻을 세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나가파티남의 대승원이 극히 부유함을 알고 그 승원의 황금 불상을 훔칠 결심을 한다. 그래서 ‘드비파안타라’(다른 섬 : 말레이 반도나 수마트라 섬인 것 같음)에 살고 있는 이 승원의 건축 기술자를 찾아내서 이 사원의 건축 비밀을 알아낸다. 그는 얻어낸 지식으로 사원에 숨어들어가서 목적한 불상을 훔쳐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바크티교도들의 불교에 대한 공격적 자세와 당시의 부유했던 불교 승원,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해 수호되고 비개방적인 성격을 지녔던 불교 교단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밀교도 행해지고 있었다. 밀교 내부에는 학문적인 분쟁뿐만 아니라 법의 계승이나 교단의 생활면에 얽힌 상당히 세속적인 분쟁도 있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구가 승원이나 거주지에서 추방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불교계의 내부에는 전통 속에 안주한 퇴폐적이고 타락적인 요소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4) 타밀 불교의 힌두화와 쇠망
학문적 견지에서 볼 때 힌두교에서는 샹카라를 비롯한 탁월한 철학자가 배출되어 그 철학 체계가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교측과 자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몇 가지의 문헌들은 이 논쟁에서 불교측이 패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특히 밀교를 중심으로 하여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 귀신, 수호신들이 불교에 흡수되어 불교의 ‘판테온’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교 ‘판테온’의 확립이란 뒤집어 말하면 당시의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힌두신들에 대한 숭배를 불교도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불교가 힌두교 신앙에 한 발 더 접근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여러 가지 힌두교와 유사한 의식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불교도는 힌두교도의 종교 생활을 전부 그대로 도입함으로써 시대의 추이에 적응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북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굽타 시대의 불교를 따로 설명할 예정이지만 이 같은 상황은 불교가 남인도에서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고 힌두교의 종교 세계 속에 흡수되는 한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13세기의 치요라 시대에는 인도네시아의 해상 세력이 쉬리 비자야 제국의 불교도들이 나가파티남에 거류지를 만들고 있었다. 11세기 초에는 이 왕조의 추다마니 바르만왕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정사를 이곳에 세웠고 라자라자 1세는 1개 촌락의 수입을 보시했다. 이 정사에서 1856년 이후 약 350점에 달하는 청동불상이 출토되어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 신앙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1476년 미얀바(버마)의 담마제디(담마체티)왕(재위 1472~1492)은 페구 거리의 서쪽 교외에 있는 자인가나잉그에 팔리어와 타라잉그어로 새겨진 칼랴니 비문을 남겼는데, 이것은 인도 불교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스리랑카를 방문한 미얀마의 비구 일행이 조난을 당하여 나가파티남에 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한 중국 왕의 명으로 지은 석굴에서 불상을 예배했다고 한다. 또 삼장에 통달한 아난다 장로가 칸치푸람에서 미얀마의 수도 파간에 초빙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기의 사실로서는 같은 칸치푸람의 승원인 무라소마 비하라의 장로 비구 아누룻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판디야 왕조 때의 학자 다르마키르티는 스리랑카의 왕 파라크라마 바후 2세(재위 1236~68년)에게 초빙되어 칸치푸람에서 스리랑카로 건너가서 스리랑카의 역사 편찬에 참여했다고 한다. 칸치푸람에서는 7~14세기의 불상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그런대로 불교는 그 명맥을 유지하하고 있었던 것 같다.
5) 카르나타카와 케랄라의 불교
불교는 카르나타카(마이소르)와 특히 그 북부 지방에도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바나바사의 비구들이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왕에 의하여 아누라다푸라에 대 스투파가 건립되었을 때, 그 의식에 초청되어 참가하였다. 바나바사는 오래 전에 아쇼카왕이 전법사를 보냈던 곳으로 락키타 장로가 파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서기 3세기경에 만들어진 나가르주나 콘다의 한 비문은 스리랑카의 비구가 나가르주나 콘다와 이바나바사에 와서 설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로써 이곳의 불교가 스리랑카의 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데칸 지방이나 타밀 지방에 비하면, 여기서는 불교가 그다지 성행했던 것 같지 않다. 유적도 두드러진 것이 적으며 겨우 비문 몇 개만이 이 지역 불교의 상황을 암시해 주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찬드라발리에서 출토된 338년이라는 기명(記銘)이 새겨진 칸나다어(語) 동판 명문은 이곳 국왕이 보살에 비유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세존의 전생으로서의 보살이,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감히 사람에 비견된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만 국왕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하여 대승불교의 영향 아래 보살이라는 용어를 빌어쓴 것뿐인 것이다. 같은 수법은 후대의 동남아시아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렴 9세기 이후,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국에서는 왕권이 종교와 결부되어, 왕은 힌두신이나 불타의 화신으로 간주되어 신왕(神王, 데바 라자) 내지 불왕(佛王, 붓다 라자)이라 불리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13세기 후반의 비자야 바후 4세(재위 1270~72년)가 불교를 비호하여 사람들로부터 ‘보살’이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훨씬 후대의 일이다.
국왕이 정사와 승가에 토지를 보시한 사례도 5~6세기에 걸쳐 몇 가지가 알려져 있다. 7세기의 현장은 콘카나프라에 백여 개의 가람과 만명이 넘는 승려가 있어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수백 개를 헤아리는 사당에서 서로 다른 교도들이 함께 거주하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는데 대해서는 뒤에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남(南) 카라나 군(郡)의 카드리 마을에는 카다리가 정사가 있는데, 여기서 1좌의 불상과 2좌의 보살상이 10세기 때의 비문과 함께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1좌는 여섯 개의 팔을 가진 삼면(三面) 관음상이다. 이 정사는 현재 쉬바 사원이 되어 있다.
11세기가 되어 1021년 차르캬 왕가의 자야싱하 3세의 페루로 비문은 왕의 누이 동생인 악카데비가 불교, 자이나교, 비쉬누파, 쉬바파의 병합된 의식을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비문도 많은 종교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혼합되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 일례로서 팔리가베 마을에서 출토된 시카르푸르 비문(1065년)에 의하면 차르캬의 루파닷타야 대신이 이 마을에 비하라를 건립하고 불상, 타라 보살, 관음 보살, 그리고 ‘붓다 신’의 숭배를 위하여 토지를 기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붓다 신’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불교가 힌두 사회에 흡수되어 매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다. 또한 1151년에 인각된 카이달라 춡토 명문은 쉬바, 비쉬누와 함께 수가타(선서, 善逝 : 불타를 가리킴)를 우주의 유일한 절대자의 별칭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힌두 신화 속에 불타가 포함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코리바트에서는 13세기의 산스크리트 비문을 가진 불상과 타라 보살상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이 지방에는 적어도 13세기까지 불교가 존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인도에서의 불교는, 북인도에서처럼 이슬람의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불교는 점차로 힌두화되어 힌두교의 세계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다.
▶ 다음에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이어집니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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