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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 마 9:1-8
5년전 대전의 한 도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승객 2명을 태우고 택시를 몰던 택시기사가, 급성 심장마비 증세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택시가 도로를 달리다가, 다른 차와 추돌하면서 겨우 멈춰 섰습니다. 당시 탑승했던 승객들은 트렁크 안에서 골프가방을 꺼내, 다른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공항버스 출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시민의 신고로, 잠시 후 119구급대가 도착했지만, 택시기사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최소한의 구호 조치를 했거나, 아니면 신고라도 빨리했다면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승객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사람들이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무책임한 승객을 처벌할 법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5년 지난 지금가지 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상황임에도 모른 체한다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법’입니다. 그 사건이 있었던 당시 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 법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53.8%,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법제화해서는 안된다는 반대 의견이 39.1%로 나타났습니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 법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탠퍼드 대학 정치학과의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혈연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 관계가, 가족 내의 신뢰 관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최근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1%로, 조사 대상 40개국 중 40위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은 각 국가별로 진행한 이번 조사에 일반 시민 2304명이 참여했습니다.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만약 당신이 곤경에 처했다면, 당신이 도움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사람의 비중은,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입니다.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좋은 친구의 모델입니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문턱에 서서, 내가 곤경에 빠져 도움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유명한 시가 떠오릅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둘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히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오늘 설교 제목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는, 함석헌 선생님이 말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묻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되어 주자는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사람을 갖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노력을 해도 그 사람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쉽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아, 나는 그 사람을 갖지 못했는데, 그럼 내가 인생을 잘못 살 건가, 하는 진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시를 다시 읽기로 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다시 읽어도 그 사람을 갖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더 잘 살아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내 남은 삶을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이 듭니다.
탤런트 김수미 씨가 2009년에 책을 냈습니다.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 안에 선배 탤런트 김혜자 씨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가 금전문제로 고통을 겪을 때를 이야기하면서였습니다. 그 잘난 남편은 돈 한 푼 구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돈 많은 친척도 모르는 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인들에게 몇 백 만원씩 꾸어 임시변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혜자 씨가 자기를 부르더니,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하니? 추접스럽게 몇 백 만원씩 꾸지 말고, 필요한 액수가 얼마나 되니?” 그러면서 자기 통장을 꺼내더니, “이게 내 전 재산이야. 나는 돈 쓸 일 없어. 다음 달에 아프리카에 가려고 했는데, 아프리카가 여기에 있네. 다 찾아서 해결해. 그리고 갚지 마. 혹시 돈이 넘쳐나면 그때 주든가.” 김수미 씨는 염치없이 통장잔고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 모든 은행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김혜자 씨와 자기가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는 그렇게 못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대신 김수미 씨는 이런 각오를 밝혔습니다. ‘언니가 아프리카에 간다고 하기에, 나는 언니가 혹시 납치되면, 내가 가서 포로교환하자고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나는 무조건 간다. 꼭 가고야 만다.’ 오늘 설교 제목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에서, 김혜자 씨는 김수미 씨에게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준 것입니다. 김수미 씨는 자신은 그 사람을 갖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고개를 떨궜는데 김혜자 씨가 그에게 그 사람이 돼준 것입니다. 김혜자 씨의 그런 엄청난 호의 앞에 김수미 씨는 자기 생명을 내놓겠다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세계적 갑부였던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을 하며 크게 후회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친구가 없는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좋은 친구를 얻는 일은 전적으로 자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예로부터 친구로 삼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는 五無를 들고 있습니다. 무정(無情), 무례(無禮), 무식(無識), 무도(無道), 무능(無能)한 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친구란? 논어의 ‘계씨편’에 공자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이 나옵니다. 먼저 유익한 세 친구 익자삼우(益者三友)는, 정직한 사람(우직), 신의가 있는 사람(우량), 견문이 많은 사람(우다문)입니다. 반면 해로운 세 친구 손자삼우(損者三友)는, 아첨하는 사람(우편벽), 줏대 없는 사람(우선유), 겉으로 친한 척하고 성의가 없는 사람(우편녕)이라고 하였습니다. 살면서 내가 益者三友만 찾지 말고, 내가 먼저 남에게 損者三友보다, 益者三友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수 최성수의 ‘동행’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가 참 좋습니다.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있는 날까지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있는 날까지’
이 노래를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잘 부릅니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람들을 향한 목마름이 완전히 해갈되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오늘 설교 제목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에서, 어떻게 그 사람의 친구의 되어줄 수 있습니까?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은 그와 같이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그와 따뜻한 동행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힘들 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힘들고, 자기보다 덜 아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는 다른 사람을 차갑게 대하면서, 따뜻한 동행이 다가오길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주님이 호수 건너편의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풍랑까지 헤치고 가서,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었는데, 감사는커녕 돼지떼를 손해보았다며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구했습니다. 돼지값 물어달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마을에 뭐 하러 계시겠습니까?
1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예수님은 다시 본 동네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본 동네란 가버나움을 가리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입니다. 하루는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든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꽉 차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계속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오는 사람을 바리게이트를 치고 막을 수도 없고, 안내하는 제자들만 죽을 지경입니다.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안내 위원이 죽을 지경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건너편 가다라 마을에서 군대귀신이 들렸던 사람을 고친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친구들입니다. 그들에게 또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가 누워 있습니다. 늘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중풍으로 꼼짝없이 침상에 누워 지내는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처음에 쓰러졌을 때는 금방 회복되리라 생각했지만, 그래서 자주 찾아갔고,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말을 했지만, 친구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건강한 친구들끼리만 어울려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렇다고 늘 아픈 친구 집에서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됐고, 그 길로 한 달음에 아픈 친구한테 갔습니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든지 숨이 턱밑까지 찼습니다. 누워 있는 친구는 무슨 난리라도 났는가 싶어,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한 친구가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친구야, 됐다.” 중풍병자는 다짜고짜 “됐다”는 친구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아니, 뭐가 됐는데?” “이제 너 살았어....” “아니, 무슨 일인데?... 야, 내가 언제 죽었니? 하긴 이게 죽은 거지... 산 거라고 할 수 있겠나?” “놀라지 마. 우리가 소문을 들었는데, 예수라는 분이 대단한 능력이 있대...못 고치는 병이 없대....” “그래? 그럼 내 병도 고칠 수 있는 거야?” “그야 물론이지...” “에이, 내 병이 지금 몇 년째인데...난 지금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무슨 말이야...예수라는 분이 나병환자도 고쳤대...나병을 고쳤다면 중풍병을 못 고치겠어....” “에이, 그게 정말이야?” “아니, 우리가 너한테 왜 거짓말 하겠어?” “그럼 나도 그분 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수고롭겠지만 나를 예수라는 분에게 데려다줄래?” “그럼, 우리가 그러려고 이렇게 급히 왔잖아.” “그래 너무 고맙다.” “무슨...우리는 친구잖아. 아니 친구 좋다는 게 뭔데...” “흐흐, 아무튼 내가 나으면 크게 한턱 쏠 게...”
같이 간 친구들은 서둘러 병든 친구를 들 것에 옮겼습니다. 친구들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했습니다. 들 것에 실려 있는 친구가 “좀 천천히 가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숨소리도 가빠지면서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가는 속도도 누워서 느껴질 정도로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병든 친구는 미안한 마음에 “너희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나으면 내 꼭 은혜를 갚을 게.” “야, 그런 소리하지 마. 우리가 그런 거 바라고 하는 줄 알아. 우리는 네가 나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어...” 드디어 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제법 큰 집이었는데, 집에 사람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집 저 안쪽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사람 혼자 들어가는 것도 힘들데, 더구나 병든 친구를 들 것에 싣고 들어가야 합니다.
병든 친구에게 잔뜩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나아서 함께 뛰어다닐 꿈을 꾸게 했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병든 자들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치유받기 위해 왔을 게 뻔합니다.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밤을 새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던 모습은 간 데 없고, 누워 퀭한 눈만 껌벅거리는 친구를 보니,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병든 친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아무래도 힘들겠지” 묻습니다. 친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해” 하고,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사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때 평소 엉뚱한 말을 잘하던 친구가 불쑥 한 마디 던졌습니다. “야, 우리 지붕에 올라가 천정에서 달아 내리면 되겠다.” 엉뚱한 친구의 말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아무튼 엉뚱한 소리를 잘해요...” “왜? 불가능할 것도 없지...” “그래,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누워 있는 친구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를 안심시키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책임을 질 거야” 했습니다.
친구들은 다시 바빠졌습니다. 친구를 들 것에 싣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뚫기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콘크리트 지붕을 생각하면 안 됩니. 큰 장비가 없어도 지붕을 뚫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멍을 작게 뚫을 수도 없었던 게 들 것을 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다들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지붕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잠시 후 지붕에 구멍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개의치 않았지만, 사람들이 잠시 웅성거렸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지붕 위에서 들 것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들 것에 사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천정에서 내려오는 들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천정에서 내려오는 들 것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무 소망없이 지내던 친구를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 소문을 들려주고, 그를 설득해 들 것에 싣고 현장에 왔지만, 큰 장애물을 만났고, 그럼에도 친구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친구를 들 것에 달아 내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친구들의 눈물겨운 행위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실행이 뒤따릅니다. 오죽 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 했겠습니까? 중풍병자의 친구들에게 행함이 없었다면,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실행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적 동의쯤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믿음은 철저히 생활입니다. 믿음은 생활 속에서 증명됩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 가정 생활 속에서, 직장 생활 속에서 증명됩니다.
오늘 말씀 보면서 또 한 번 느낍니다. 나 혼자 잘 믿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믿었어도, 주위에 친구가 없었다면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주위에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도와줄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내 사정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울어주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예수 소문을 들려줬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만나게 했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게 했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친구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습니까? 친구 잘 만난 줄 알아야 합니다. 혹 그 친구가 자기는 지금 절에 다닌다고 해도, 결코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받게 하고, 자기는 실족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 점을 두려워하여 깨어 있었습니다. 고전 9: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졌지만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들 것에 실려 예수님 앞에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사람의 중풍병이 죄 때문에 들렸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중풍병이 죄 때문에 들렸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앞에 두고 자신이 병을 치유하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병만 고쳐주셨다면 3~6절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3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반응 이상의 적극적인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부탁을 아뢰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참 보기 드문 서기관입니다. 여태껏 그런 서기관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서기관에게 완곡히 거절한 것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따랐을 거 같지 않습니다. 안정된 서기관의 자리에 비해, 예수님처럼 떠돌이로 생활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서기관입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고, 율법으로 예수님을 걸려들 게 만드는 서기관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서기관의 올무에 제대로 걸려들었습니다. 이 서기관은 한 건 한 셈입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를 치켜뜨며, 예수님께 속으로 대적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당시 죄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죄가 신성모독죄입니다.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렇게 반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서기관이 속에 반발심이 드는 게 당연했습니다.
4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이 그런 생각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서기관은 속으로 뜨끔 했을 것입니다. 나쁜 생각을 들켰을 때 왜 뜨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서기관은 애써 태연한 척,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5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작심 발언을 하셨습니다. 이런 식의 질문은 너무 뻔하여,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말로만 놓고 보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훨씬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그렇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에 다들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묻는 의도가 너무 뻔하기도 했지만, 대답하면 예수님의 의도에 말려들 수 있어서였습니다.
6절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아무 대답이 없자 예수님이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자신이 치유자 이상의 존재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건 유대교 지도자들의 벌집을 쑤셔놓을 만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못 마땅했는데 자초하여 걸려든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입장이 곤란한 사람이 누굴까요? 들 것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입니다. 일어나라고 하지도 않으니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병이 나았다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면, 분위기가 이상해집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복음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했던 침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성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저리나게 떨쳐 버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운명의 침상을 들고 가게 만듭니다. 복음은 우리 운명을 바꿉니다.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 태도가 바뀌는 순간은 곧 운명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곳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불안의 현장이 찬양의 현장으로, 불평의 현장이 감사의 현장으로, 근심의 현장이 기도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무기력과 패배의 현장이 능력과 승리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다하라 요네꼬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이 사람은 어떠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발도 없고 왼 손도 없이 달랑 오른손과 그에 딸린 세 개의 손가락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녀는 고3 때 기차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두 발과 왼손을 잃었고 오른손 중에 두 손가락이 잘려져 나갔습니다.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수면제를 모으며 자살을 준비하던 그녀는 병원에서 타하라 아키토시란 한 신학생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도지에서 고후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신학생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계획이 있으니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후 주님께서 그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을 불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절망하며 죽으려던 그녀는 오른손에 세 손가락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삶을 감사로 받게 되자 점차 그녀의 내면은 아름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청년, 곧 그녀에게 복음을 전했던 신학생과 결혼을 하게 되고 두 딸까지 낳게 됩니다.
그녀가 쓴 책 속에 “감자와의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음식을 준비하면서 감자 껍질을 벗기려는데 세 손가락으로 하려니 동그란 감자가 떼구루루 굴러가기만 하더랍니다. 필사적으로 감자를 따라 다녔지만, 마치 감자가 자신을 비웃듯 계속 손을 벗어났습니다. 극한 절망감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를 위해 감자 요리를 하게 도와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도마 위에 감자를 올려놓고 반을 툭 하고 자른 뒤에 그것을 세워 놓으니 감자가 도망가지 않더랍니다. 그 날의 식탁은 세 개의 손가락으로 껍질을 벗겨 만든 감자 요리 때문에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사실 삶의 행복은 큰데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때 그녀의 생이 끝났다면, 결코 산다는 것이 황홀한 것임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바뀐 것은 삶의 조건이 바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자와 전쟁을 벌여야 할 만큼 더 열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황홀하다고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운명의 침상에 매여 있던 그녀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침상을 들고 가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말자 바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아니 놀라는 정도를 넘어 두려워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중풍병자 그 사람의 네 친구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김형석 교수님이 TV 아침 대담 시간에 출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1920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102세입니다. 건강의 비결 중에 한 가지가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교수님 아직도 친구가 계세요?” 물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친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죽었으니까요. 자기 또래의 친구만을 찾으려면 어려울 것입니다. 90이 넘어가니까 나이가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친구를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이라고 충고합니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 더 행복한 사람은 믿음의 친구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가진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까지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친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아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헤아려 보고, 내가 그런 친구가 되어 주기를 소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친구로 동행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신 분임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땅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 할 때, 그때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 곁에서 함께 해 주시며, 영원까지 함께 동행하실 친구임을 믿게 하옵소서. 이런 예수님을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소개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정관념은 깨어져도 됩니다. / 마 9:9-17
미나리의 ‘미’는 물을 가리키는 우리나라 옛 말입니다. 미나리는 ‘물에서 자라는 나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미나리는 ‘water celery, water dropwort’인데, 문자 그대로 미나리의 95%는 수분(물)입니다. 미나리는 개울이나 구정물 같은데 살면서 물을 정화합니다. 미나리는 해독 해열 정화작용이 뛰어납니다. 그러니 혼탁한 풍토를 정화하고 면역 증진에도 좋은 야채입니다. 세계에서 미나리를 가장 즐겨 먹는 민족이 바로 한국인입니다. 식당에서 고기 구워 먹고 밥을 볶아 먹을 때나, 전골 매운탕 같은 요리에나, 비빔밥에 미나리가 빠지면 제 맛이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미나리(芹)에게서 ‘근채삼덕’(芹菜三德)을 배워왔습니다. 진흙탕에서도 때 묻지 않고 파랗게 사는 곧은 심지,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음지의 악조건을 이겨내는) 생명력, 가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강인한 결기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씨는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며,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지닌 평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나리는 세계인들에게 인종과 국가와 언어의 경계와 장벽을 넘어 서로를 좀 더 이해하자는 울림을 주었습니다.
하와이는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더운 섬입니다. 그 하와이 한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밍크코트를 파는 가게를 열겠다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온 세계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데, 그 중에는 틀림없이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도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여름에 겨울옷을 준비하고, 겨울에 여름옷을 장만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이윽고 그 밍크코트 가게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고정관념을 깨뜨려, 사업에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있는 UCLA대학에 의대교수가, 이제 머잖아 의학공부를 마치고 현장에 나가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있고, 어머니는 폐결핵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역시 부모님의 병으로 인해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환자이며, 이미 낳은 네 아이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유산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는 잠시 학생들을 주시하더니, 아주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베토벤은 그런 환경에서 1770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매독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환자요, 형들도 다 그 모양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을 했고,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간곡한 어투로 권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고 신중하게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란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신장이 167cm인 ‘호세 알투베’라는 야구 선수가 있습니다. 키가 작은 그를 받아주는 팀이 없어, 돈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선수로만 받아 달라는 읍소로, 휴스턴 애스트로스 팀에 우리 돈 1780만원에 계약을 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으로 계약하는 다른 선수에 비하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액수였습니다. 2011년 데뷔한 그는 2014년에 타격왕과 안타왕에 올랐고, 2015년은 홈런 15개를 쳤습니다. 그리고 올해 알투베의 아메리칸리그 타격 278리, 117득점, 83타점, 홈런도 31개나 쳤습니다. 모두가 알투베는 키가 작아 안 된다고 했지만,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남들보다 두 세배 더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1780만원에 프로 첫 계약을 했지만, 2018년에 2024년가지 매년 300억원에 계약하는 인간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데릭지터나 알렉스 로드리게스 같은 키 큰 선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라운드에 서면 모두가 평등하다. 키가 크거나 작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구를 하기에 나는 충분히 크다.” 다른 스포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만, 야구에 있어서도 키가 큰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깬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와 시험을 통과한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하신 일이 제자를 부르시는 거였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짤막한 생을 사셨습니다. 공생애만 놓고 보면 3년 남짓 사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그 어떤 사역보다 가장 애착을 가지고 집중했던 사역이, 바로 제자 양육과 훈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제자 양육과 훈련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랍비에게 제자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자기 삶과 사상을 계승해주는 제자가 없다면, 랍비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어떻게든지 좋은 제자를 얻으려고 힘썼습니다. 십수 년의 제자훈련을 하고 내린 목회자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본바탕이 좋아야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이 안 되고,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제자 훈련을 많이 받아도 좋은 제자가 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제자는 모집이 아닙니다. 지명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편애 논란이 일어납니다. 안 받으려고 해서 권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본인이 받겠다고 하면 막을 수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따르겠다는 하는 사람을, 다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막 3:13-15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여기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불러, 자기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로 부른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한 때 어부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현역 어부였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형제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 요한 형제는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당시 어부들이 배웠다고 한들, 뭐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초등학문을 배운 게 다였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도 정규 율법 교육을 받은 랍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자를 초등학문을 배운 게 전부인 사람을 불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서기관이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 8: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 같으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학물은 먹은 사람입니다. 서기관을 제자로 두면, 랍비로서 급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스승을 보고 제자를 판단할 수 있고, 제자를 통해 스승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기관이 제자로 있으면, 주님을 쉽게 보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따르겠다는 서기관의 요청을, 주님은 우회적으로 거부하셨습니다. 마 8: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첫 번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통해, 서기관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9절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주님이 또 한 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마태였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였습니다. 한 때 세리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세리 출신이 아닌, 현역 세리였던 것입니다.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세리에 비하면 어부는 양호한 편입니다. 아마 제자로서 부적격자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세리는 상위 1, 2번을 다툴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랍비도, 자기 제자로 세리만은 두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를 제자로 삼는 순간, 랍비로서 급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선택은 세리 마태였습니다. 일정한 수입도 없는 주님이, 세금 문제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당시 세리의 사회의 지위는, 창기와 같은 급이었습니다. 마태가 전직 세리였어도, 랍비로서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세리였다가, 지금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가면 누구나 마태 얼굴을 한 눈에 알아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냥 따라다니는 제자가 아닌, 70인 제자가 아닌, 열두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제자의 기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 마태를 부르신 주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제자로서 누구보다 훌륭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수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핵심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도마처럼 눈에 띄는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용했지만 묵묵히 주를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은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복음서를 직접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누구보다 큰일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세리였기에, 세리나 세리 출신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심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태는 누구에게도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느 날 자기를 찾아오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자기를 향해 따뜻한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같은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아준, 예수님이 눈물겹게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맘을 먹었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또 괜히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잠시 고민이 됐습니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단 말씀이나 드려보자 하고, 자신의 의향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아, 좋지...금강산도 식후경 아닌가...ㅎㅎ” 마태는 잠시 고민했던 것을 후회하며,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마태를 보고, 예수님도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에이, 고맙기는...내가 고맙지...어서 앞서게나...” 마태는 이 기쁜 소식을 자기 친구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했으니, 다들 오라고 했습니다. 마태가 방금 전까지 세리였기에, 돈을 많이 들여 식사를 잘 준비했습니다. 친구들까지 초청할 생각이었던지라, 거의 잔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세리들도 있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간에도 계속 왔습니다. 마태는 천하를 다 얻은 듯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예수님 일행을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했던 것입니다.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러나 그것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계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잔뜩 품었습니다. 자기들 눈에 예수님은 정상적인 랍비가 아닙니다. 자기들의 가르침과는 티 나게 달랐습니다. 그대로 뒀다가는, 자칫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정보기관을 통해 야당 인사를 감시하듯, 예루살렘에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도 아닌 세리 집으로 가셨는데, 그곳까지 따라왔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세리 집 안에는 못 들어오고, 제자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랍비가 되어 가지고, 세리 집에서 밥이나 얻어먹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자들입니다. 자칭이 아닌 실제로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에서 말한 부정한 것 안 먹고, 부정한 사람을 안 만납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은, 세리의 식사 초대에 응하여 맛있게 먹으며, 그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불러 따지고 싶지만, 세리들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없으니,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따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바리새인들 앞에 서면 기가 죽습니다. 자기들은 예수님이 하자는 대로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해도,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훗날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렇게 권합니다. 벧전 3: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면, 자신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럴 때 주의해야 하는데,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계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분명히 세리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에 들린 모든 말에 대꾸하시지 않지만,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참 명언입니다. 얼마나 시의적절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흠칫 놀라서 예수님을 쳐다봤습니다. 자기를 쳐다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한 마디 더하셨습니다.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의 앞부분은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는 말씀의 뒷부분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게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쳤겠습니까? 메시야가 의인을 부르러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메시야가 오면 죄인은 어떻게 됩니까?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고정관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을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왔다면, 세리들과 어울리면 안 됩니다. 그럼 바리새인들과 어울려야 합니까? 아니면 사두개인들과 어울려야 합니까? 대제사장들과 어울려야 합니까? 어울릴 사람이 없습니다.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엔 자신들이 세리들에 비해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눅 18:9 -10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음입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은 굳어버린 생각입니다. 경직된 사고입니다. 틀에 박힌 공식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지식이고 진리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정관념이 강해집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움을 중단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약 1: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않으면, 말씀을 자기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은혜는 받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은혜를 받습니다. 고정관념이라는 체로 걸러서, 자기 맘에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리새인의 이야기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얘기일 수 있습니다.
14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흔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을 거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남도 아니었고, 요한의 제자 중에 자신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그들이 찾아와 금식에 대한 문의를 했습니다. 금식에 대한 문의를 했다기보다 논쟁을 건 듯 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신앙에 있어 금식은 은혜에 이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도 40일 금식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금식 자체를 못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금식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은 태도에 대해서였습니다. 마 6:17-18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머리도 안 감고,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금식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금식도 안 하냐고 따져 묻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세리 마태의 집에서 포식한 것을 빗대서 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고정관념은 절대가치와 상대가치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깁니다. 금식은 절대가치입니까, 상대가치입니까? 금식 안 한다고 예수님 안 믿는 건가요? 금식 많이 한다고 예수님 잘 믿는 건가요? 아닙니다. 전혀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금식은 상대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절대가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1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그걸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금식도 때가 있습니다. 금식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야 합니다. 금식 날짜도 잘 잡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생각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상승곡선을 탈 때도 있고, 하향곡선을 탈 때도 있습니다. 상승곡선을 탈 때는 은혜를 누리면 됩니다.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향곡선을 탈 때는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금식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발버둥입니다. 하향곡선을 탈 때는 예수님이 부재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이 만능은 아닙니다. 금식은 상대가치이지 절대가치가 아닙니다. 금식하는 것으로, 신앙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금식하는 데 당신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하면 안 됩니다.
16-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기가 막힌 비유를 드셨습니다. 고정관념은 낡은 옷 같은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낡은 가죽 부대 같은 것입니다. 낡은 옷에 생베 조각 대어 붙이면 다 못씁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포도주를 넣으면 다 못씁니다. 낡은 옷은 버려야 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버려야 합니다. 낡은 옷 같은 고정관념을 보물처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낡은 가죽 부대 같은 고정관념을 보화처럼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고정관념은 깨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은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율법주의를 예수님과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은 곧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이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그런 ‘구시대의 교훈’을 깨끗이 버리고 오직 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새 옷’을 입고 ‘새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의 눈에는 아주 별난, 희한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렇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이처럼 누가 보아도 ‘아, 저 사람은 분명히 크리스천인가 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떤 ‘유별난 표’가 나야 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우리와 이렇게 다른가?’라는 항의나 비난을 받게 될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배운 제자라는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네델란드의 유명한 화가 ‘루벤스’가 어느 날 대작 하나를 막 완성한 후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그 루벤스의 새로운 그림을 보려고 사람들이 우르르 화실에 들어왔다가, 그만 누군가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그 그림에 손을 대어서 한 부분을 망쳐 놓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루벤스의 제자였던 ‘반 다이크’가 붓을 들고 나서서 그 부분을 새로 고쳐 놓았습니다. 루벤스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 고쳐진 부분을 들여다보자 사람들은 그가 뭐라고 말할까 하고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루벤스가 몸을 일으키면서 하는 말이 “내가 처음에 그렸던 것보다 더 잘 그렸군!”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반 다이크로서는 화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그 칭찬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자기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영예롭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는 그저 스승으로부터만 인정받을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진짜 제자는 세상 사람들이 제아무리 뭐라 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예수님께 인정받는 제자가 되기 위해 이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들은 ‘왜 예수쟁이들은 자기 인생 전부를 다 바쳐서 예수님만 따라간다고 할까?’라고 이상하게 여기지만, 참된 제자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부르시면 즉시 그렇게 응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죄인이라고 부르는가?’라고 비난하지만,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으로 죄인을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의인인 척하는 바리새인들보다 내적으로 갈등하면서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태를 먼저 찾아가셔서 복음의 일군 삼으셨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순종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기뻤든지 주님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마음을 영접하면 천국의 기쁨이 임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영적 희열이 우리의 영혼 깊이 자리합니다. 우리네 말에 호박에 줄을 그려 넣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흉내 낼 수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호박이 수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박만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호박은 호박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수박보다도 호박이 더 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기 처지에 맞게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가 지녀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달라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고 아울러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또한 잘 지켜나감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과 교회에 재현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을 탈피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오게 하옵소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예수를 만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복되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을 보시는 예수님 / 마 9:18-26
‘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의 저자 김성화 목사님은 경북대 수학과 졸업,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인생의 너무나 큰 허무를 느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남은 생을 도를 닦으면서 진리 가운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절간에 들어갑니다. 후에 대한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과 포교국장을 역임한 분입니다. 도를 닦다보니 불교계가 너무 썩었다고 느껴져서 불교를 개혁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순수한 불교대학을 세우려는 과정에서, 불교단체의 내분에 휘말리면서 억울하게 교도소에 수감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김해교도소에 수감이 되고 거기서 성경책을 읽게 됩니다.
그러다가 불교와 기독교의 놀라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다림이란 숲속을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같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외아들을 잃은 한 젊은 과부가 슬피 애통하며 석가모니에게 “부처님이시여, 내 외아들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자매여, 일어나 마을에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먹이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과부는 기뻐서 마을로 힘 있게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해질녘에 젊은 과부는 빈손으로 힘없이 돌아와서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이 없어서 한 톨의 쌀도 못 얻고 빈손으로 왔습니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때에 석가모니는 여인에게 “자매여, 생자필멸이라. 사람이 한 번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을 주려고 젊은 과부를 하루 종일 걷게 만들어 놓고, 허탈상태에서 기진맥진하였을 때 가장 인간적인 척하며, 얄미울 정도의 지혜를 짜내어 위로의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경을 보니까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애통한 장례 행렬을 보고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즉시 관속의 죽었던 자가 살아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삶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과 생명인 참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종교,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어머니가 있었답니다. 외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아들에게 늘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말고 조심하라고 가르쳐주었답니다. 누가 차를 타라고 하면 같이 타지 말고, 길거리에서 과자를 주어도 받지도 말라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잘 기르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보내고 무엇을 배웠는가 점검을 했답니다. 주일학교에 갔다 온 아들에게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들이 ‘오늘은 모세 할아버지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하여,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 군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는 놀래서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반문했답니다. 그러자 아이는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믿을걸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 초기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오래지 않아 불순종하여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대체자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곧바로 사무엘을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직 사울이 멀쩡하게 왕으로 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동선은 사울이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하나님께 불순종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새의 집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사무엘의 고유 영역인 만큼, 별 문제 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형식은 제사였지만, 실제로는 이새의 아들 중에서 사울의 뒤를 이을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이 쭉 서 있는데, 유독 사무엘의 눈에 들어오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아들씩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저만치서 엘리압이 오는데, 사무엘은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상 16:6절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다른 아들들은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내면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가 일단 장남입니다. 장남은 마음 쓰는 게 다르긴 합니다. 그렇담 외모인데, 일곱 아들 중에 가장 준수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지를 학습했습니다. 그 학습효과로 인해, 엘리압을 왕감으로 미리 점찍었습니다. 하나님한테 “이 사람 맞죠?” 하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막 기름병을 꺼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급히 막으셨습니다. 삼상 16: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분명히 사무엘이 보기에는 엘리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보다 중심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럼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신 것도,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만큼 더 커서가 아니라, 중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걸 놓쳤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외모를 무시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상 17:42절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다윗도 한 외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외모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기도 할 때는 상관없습니다. 속옷 바람으로 기도한들 문제될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외모를 신경 써야 합니다. 특히 주일예배의 자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분장이나 변장까지는 아니라도, 화장이나 치장 정도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시험에 안 듭니다.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중심이 무엇입니까? 중심(中心)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그 중에 4가지만 소개를 하면, 1)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 2) 기준이 되는 물체나 지점 3) 사물이나 일정한 장소의 가장 가운데가 되는 곳 4)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 그럼 하나님이 보신다는 중심은, 첫 번째나 네 번째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이나 행동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에게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가 무엇입니까? 역시 믿음 아닌가요?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이 믿음이 아니라면 큰일 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가 믿음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믿음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4:2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여러분의 일상이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여생이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단 앞 문단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9: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정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면 판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굳이 고정관념을 깨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1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관리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이 단순한 명예직이 아닌 관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회당은 재판이나 자녀를 위한 율법교육의 장소로,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곳으로, 지역공동체의 중심입니다. 유대인 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회당장이 유대 사회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회당에 문제가 없었고, 가정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지라, 매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보통 딸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외딸입니다. 무남독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당시에는 여러 명 씩 낳던 시절이었는데, 외동딸이니 자기 생명처럼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딸의 나이가 12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운 딸입니다. 자는 모습이 천사 같고, 먹는 모습이 공주 같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아빠” 하고 달려와 안깁니다. 그럼 피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행복의 기운이 넘칩니다. 예쁜 딸이 있어 회당장의 가정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딸이 앓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병명도 모릅니다. 며칠 앓다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자기의 전부인 무남독녀 외딸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집안에 있어도 집밖에 나가 있어도 아픈 딸이 눈에 밟힙니다. 회당장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덮였습니다. 회당 내에서도 걱정이 생겼습니다. 회당장이 저렇게 표정이 어두우니, 회당의 분위기도 밝지 못합니다. 회당장은 관심은 오직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아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봅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그가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예수님에 대해 얼핏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흘려들었습니다. 사실 자기와 무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절박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 최고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회당장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유대 사회에 미칠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예수님을 찾아가면 됩니다. 회당장은 관리입니다.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시 멈칫하다가,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 심지어 자기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그는 급히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절까지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는데,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을 때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방금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회당장은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자기가 조금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딸을 살릴 수 있었는데,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회당장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한테 매달렸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19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회당장은 혹시나 하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예수님을 앞서 갑니다. 회당장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자 예수님의 걸음은 더뎌졌습니다.
20절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그런데 예수님의 발걸음이 결정적으로 지체되는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진 것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질 수 있었나 싶습니다. 혈루증이면 하혈하는 병인데, 그 여인은 한 두 해도 아닌 열두 해 동안이나 이 병을 앓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막 5:26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 정도면 살아 있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병에 걸렸을 때, 많은 의사를 찾았을 정도면, 가진 게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만나는 의사마다 “자기한테 치료를 받으면 틀림없이 나을 거라”고 희망의 고문을 주었습니다. 순진하게 의사 말만 믿고, 가진 거 다 주었지만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병만 더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디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해도, 가진 게 없어서 못 갑니다. 매일 하혈을 하다 보니, 빈혈 증상이 잦았습니다. 누워있으면 죽을 거 같아서,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면, 어지럼증으로 인해 주저앉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이 있는 곳에 와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보통 다짐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명을 건 결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 여인은 매일 밤 잠 자리에 들 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한 번 만나보고 죽기로 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 악물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자기도 알 수 없는 힘이 어디서 나오긴 합니다.
21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자리를 잡고 예수님이 오기는 기다리는 동안 확신이 생겼습니다. 기다렸던 예수님이 지나가자, 죽을힘을 다해 예수님 뒤로 가서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회당장처럼 전면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출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성한 사람과 접촉하면, 성한 사람 역시 부정해집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문제가 있음에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몇몇 병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기도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문제를 자기 혼자 안고 끙끙 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문제에 눌려 죽으라고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사람은 문제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문제에 잘못 반응해서 죽습니다. 사람은 문제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에 대한 반응을 잘못 해서 망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문제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합니까? 믿음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앞에서 보이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같은 믿음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22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이 이 여인의 믿음에 완전히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감동하신 것은 딱 하나입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감동하신 게 무엇입니까? 마 8: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네 친구에게 감동하신 게 무엇입니까? 마 9: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믿음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감동하실 것도 다른 것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외의 무엇으로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주님께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일성수,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배 드림, 믿음의 표현입니다. 헌금, 믿음의 표현입니다. 십일조, 믿음의 표현입니다. 직분 감당, 믿음의 표현입니다. 봉사와 헌신,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은 어떻게든 무슨 방식으로든 표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이 복잡하게 다른 거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일분 일초가 급합니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끼어들어 지체되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깨끗하게 치유받았으니 마땅히 축하해 줄 일입니다. 그런데 축하가 나오지 않습니다. 회당장의 가슴은 시커먼 숯검정이 되었습니다. 회당장이 제자들에게 눈치를 줬습니다. 한 제자가 눈치를 채고, 예수님을 재촉했습니다. “예수님, 회당장 숨 넘어가요. 회당장 집에부터 먼저 가십시다.”
23절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 일행이 회당장 집에 도착하자, 장례 분위기가 났습니다. 슬픔을 북돋우기 위해 피리 부는 자들, 곡하는 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살만큼 살다간 사람의 장례와 달랐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회당장의 외딸입니다. 어차피 죽은 딸입니다. 차라리 회당장이 예수님을 안 찾아갔으면 나을 뻔 했습니다. 자존심을 구기고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딸 하나 살려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갔지만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떠드는 무리가 꼭 그런 자기를 흉보는 것 같았습니다. 회당장이 예견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집에 들어서자 맥이 탁 풀렸습니다. 회당장은 초점을 잃은 눈, 눈물 글썽거리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건 절망에 사로잡힌 눈빛이었습니다.
24절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님은 분위기를 돌려야 필요를 느꼈습니다. “물러가라.” 예수님은 장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장에게 ‘괜히 예수님한테 갔다왔다’고 흉보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천하의 예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을 거라는 믿음 없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아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입니까? 지금 회당장의 딸이 이미 숨이 멎은 채 죽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미지근하던 체온도 이제는 식어 싸늘해졌습니다. 그런데 잔다니, 아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것과 자는 것도 구분 못할 정도로 바보란 말입니까? 순간 술렁거렸습니다.
25-26절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님이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당장이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회당장이 무리에게 양해를 구하며, “잠시 물러가 있다가 부르면 들어오게나” 했습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 어쩌겠습니까? “아무래도 회당장이 딸 잃은 충격에 어떻게 된 거 아녀?” “아휴 그럴 만도 하지. 무남독녀 아닌가?” 그들은 중얼거리면서 잠시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제자 몇 사람만 데리고, 회당장의 딸이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서 죽은 딸의 손을 잡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딸이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깬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눈물범벅이 된 채 딸을 끌어안는 아빠를 향해 “아빠,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딸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물었습니다. “아빠, 이분들은 누구예요?” “바깥에서는 왜 저리 시끄러운 소리가 나요?” 회당장은 상기된 얼굴로 “그래 딸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네가 죽었다가 살아났어. 예수님이 너를 살려주셨어.”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넙죽 절을 했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 딸을 살려주신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얘야, 너는 뭐해. 너도 예수님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딸도 “예수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회당장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외쳐댔습니다. “우리 딸이 살아났다.” “우리 딸이 살아났어.” “예수님이 우리 딸을 살려주셨어.” 물러가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회당장이 제정신인 것을 확인하고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죽어 있던 딸이, 일어나 예수님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자기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를 않았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해외토픽 감이야!”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어.”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습니다. 원래 믿음 없는 사람들이 반응은 격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당장이 자기 삶에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아왔을까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자기 삶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아왔을까요? 정답 : 나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문제는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해줍니다. 문제는 숨겨진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줍니다. 주님은 문제를 허락하여,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곤 합니다. 그때 주님은 다른 것 안 보고, 오직 우리의 믿음만 보십니다. 주님께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지금 육신이 죽지 않았지만 혹시 영혼이 죽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열정이 죽어 있지 않습니까? 소명이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죽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손발이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을 향한 용서와 사랑의 감정은 죽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외치는 달리다굼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그래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 나와 일어서게 하옵소서. 예수님께 나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일터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게 하옵소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성도들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직분자로 죽어있지 말고, 그 직분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 앞에 나온 성도들이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3대 사역을 본받아 / 마 9:27-38
‘해바리기’라는 가수들을 아시지요? 멤버가 자주 바뀌었는데 그 중에 이광준 조성곤이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라는 노래로 힛트를 했습니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 분들이 이제 본격적인 CCM 가수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 단순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 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는 곳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전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존재들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 인생이 70-80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제 우리의 생명의 빛을 진리의 빛을, ‘아~ 영원히, 아~ 영원히, 변치 않을’ 레코드 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성도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비틀러는 이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②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입니다. ③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① ② ③ 세 부류의 사람이 있지만, ① 부류의 사람도 ② 부류의 사람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4차원적인 사람이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③ 부류의 사람을 동경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면, 마음은 편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으로 살면, 마음은 힘들어도 몸은 편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으로 살면, 몸과 마음 둘 다 힘들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힘든 대신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소수의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공을 위한 사람과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는 성공을 앞세웁니다. 성공했느냐를 먼저 따지지,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를 따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노벨물리상까지 수상했으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되려하기 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라.” 성공한 사람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실패한 사람이라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냐,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냐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되다보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만 놓고 보는 건 좀 그렇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독식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럼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일차적 목적이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성직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하긴 성직자들 중에도 성공을 추구하여, 모양새가 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어느 특정 직분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성공이 아닌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부지런히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 예수님을 깊이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명한 두 교수가 심오한 사상과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헨리라는 학생이 그러는데 자기가 자네의 제자라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동료 교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글쎄, 그 학생이 내가 하는 모든 강의를 따라다니며 듣고 있긴 하지. 그러나 나의 제자는 아닐세.” 교인이라고 다 제자는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제자일 수는 없습니다. 성도라고 다 제자다운 제자는 아닙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양육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오래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 이·취임식장에서, 당시 국회조찬기도회장이었던 유재건 장로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제 부친은 어머니와 결혼한 지 9일 만에 세상을 뜨셨고, 저를 임신하신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저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모친은 얼마 전에 92세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임종 직전 제게 살전 5:12-18절 말씀을 읽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잘 들으시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살전 5:12-18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머니는 ‘이것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말씀이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유언을 정리하면 ‘장로인 너는 목사님께 늘 순종하고, 모든 사람을 선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길 정도의 이런 어머니 영향 아래서, 좋은 제자가 안 나온다면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가 수평적인 전도를 통해 이웃을 제자로 삼을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혹 그게 안 돼도 이것만은 해내야 합니다. 그건 수직적인 전도를 통해 자녀를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자녀를 열심히 공부시켜 성공시키고, 출세시키면 뭐합니까? 그가 주의 몸된 교회를 떠나 예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산다면, 그 성공이 뭐며 그 출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낯으로 서겠습니까? 내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는데, 자녀도 제자 삼지 못했느냐는 책망을 받을 자신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회당장의 12살 된 외딸이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그 집으로 향하시던 중, 예수님의 겉옷 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진 혈루증 앓는 여인으로 인해, 다소 걸음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딸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고, 회당장은 크게 낙담이 되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런 눈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예수님 외에 그가 붙들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믿은 게 아니고, 믿지 않으면 안 되어 믿었습니다. 밀려오는 진한 슬픔을 억누른 채 집에 들어서자, 구슬픈 곡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비웃었습니다. 사실 죽은 것과 자는 것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어리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두 눈으로 회당장 딸의 죽음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내보냄을 받아 물러가면서도, 입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몇 명의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서,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27절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은 딸을 살려준 분에게 대접을 하는데,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한사코 떠나셨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맹인이라서 그랬는지, 예수님한테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 직후에 소식을 접했고, 예수님을 따라붙었습니다. 가족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중풍병자처럼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맹인으로 사는 것도 서러운데, 도움을 주는 사람마저 아무도 없으니, 너무 고통스런 삶입니다.
인생의 3중고, 곧 언어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를 가졌던 헬렌 켈러에게는,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도 말고 3일간만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3일 동안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첫째 날, 눈을 뜨는 순간, 나는 나를 평생 가르쳐 준 ‘셀레반’ 선생님을 먼저 찾아 볼 것입니다. 그의 인자한 모습, 끈질긴 집념, 사랑의 힘, 그의 성실함, 이 모든 성품들이 나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바라보면서,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여 두겠습니다. 그리고 산과 들을 산책하면서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의 모습, 아름다운 꽃의 색깔의 신비한 조화들을 마음껏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면, 서쪽 하늘로 가라앉는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둘째 날, 복잡한 거리에 나가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에 진열된 역사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그런 후에는 미술관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의 신비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셋째 날, 먼동이 트는 햇살과 함께 일어나,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또 거미줄처럼 줄지어 달려가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극장으로 가겠습니다. 그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가수들의 노래와 우아한 동작, 그리고 영화에서 상영되는 명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아름다운 불빛 속에 즐비하게 늘어진 상점 안에 진열된 예쁘고 아름다운 상품들을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나의 눈이 감겨질 때, 나는 하나님께 3일 동안의 귀중한 경험과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마무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는 맹인 두 사람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3일이 아닌 평생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눈이 안 보이지만, 대신 예민한 청각과 민감한 촉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어떤 경로로든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얼마 전에는 죽은 자까지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부터,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그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회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차지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기회는 엿보다가 붙잡는 사람의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 맹인이 그들 뿐이었겠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단지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모든 맹인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맹인이 앞 못 보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맹인이 ‘눈 한 번 떠봤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예수님께 부르짖은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분명히 기도해야 하는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기도의 자리에 빠지고,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속에서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렇다고 기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개인의 문제이자 동시에 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지른 사람은 두 맹인입니다. 두 사람은 맹인으로서,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많은 맹인 중에서, 유독 두 사람은 서로 맘이 맞았습니다. 눈을 뜨고 싶은 소원이 같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자는 것에 마음이 하나됐습니다. 혼자였으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같은 맹인이었지만, 두 사람이었기에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예수님한테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맹인이 맹인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지만 아닙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 문제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 붙들려서, 이것저것 다 놓으려고 합니다. 자기 문제에 집중하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오히려 남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할 때, 자기 문제의 덫에서 놓임 받을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문제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자기 문제가 전혀 없는, 팔자 핀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문제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자기 문제가 있지만, 교회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지역 문제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 문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는 자기 문제가 산더미 만했지만, 그렇게 기도하면 손바닥 만해집니다.
맹인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며 따라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못들은 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셨습니다. 그렇게 딱한 사정을 아뢰는데, 그 좋으신 예수님이 못들은 체 가던 길을 가셨다는 것은 어디지 모르게 어색합니다. 여리고의 맹인 같은 경우에는, 하도 소리쳐대니까 제자들이 뭐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릅니다. 그들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애초 가고자 했던 집으로 가셨습니다.
28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맹인들은 그곳까지 나아왔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몇 번이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멈춰 서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릴 법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하여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까지 따라들어갔습니다. 그때서야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참 예수님도, 아니 예수님이 그렇게 할 줄 믿지 않고서야, 그들이 그곳까지 따라왔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그들의 소원을 떠보신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들은 확신에 넘쳤습니다. 역시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들의 외모가 아닙니다. 그들의 건강상태가 아닙니다. 그들의 학력이나 경력이 아닙니다. ‘뜨거운 믿음이 있느냐? 불타는 소원이 있느냐?’ 이것만 보셨습니다. 그런 거라면 맹인들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29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을 기다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확인하셨는데, 망설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눈, 보이지 않았던 그 눈, 원망스럽기만 했던 그 눈을, 주님이 만지시며 선언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럼 그들의 믿음이 진짜였다는 말입니까, 가짜였다는 말입니까? 진짜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한 시간 기도했다고 칩시다. 기도가 끝났을 때 주님이 말씀하시길,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면, “아멘, 할렐루야” 할 자신 있습니까?
30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눈이 밝아진 두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둘이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예상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들에게 엄히 경고를 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31절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그러나 캄캄했던 눈이 밝아진 그들은, 그 놀라운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온 땅에 예수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엄히 경고를 해도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소문을 내고야 맙니다. 자기를 그렇게 변화시킨 예수 소문을 퍼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입을 다물어달라고 부탁을 해도, 이미 열린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이게 전도입니다.
전도는 결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식 자랑을 의무감으로 합니까? 할머니, 할하버지가 손주 자랑을 의무감으로 합니까? 손주 자랑은 돈 내고도 한다지 않습니까?
전도는 예수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전도는 목회자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최고의 제자는 전도 제자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예수 자랑, 교회 자랑, 목회자 자랑’ 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 제자입니다. 예수님께 올 때는 두 눈이 캄캄했던 두 사람이, 눈이 밝아져 돌아갔습니다. 이게 예배입니다. 세상에서 한 주간 살다보면, 하늘나라에 대해 캄캄해집니다. 예배 드리고 나면, 눈이 밝아져 하늘나라가 환히 보입니다. 교회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희미합니다. 설교를 듣고 나면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이 선명해집니다. 이런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2절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눈이 어두웠다가 보게 된 두 사람이 나가자, 이번에는 말 못하는 사람이 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피하려고 하니까, 그를 예수님한테 데려가려고 하면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누군가를 통해, 그가 예수님한테 나아오게 됐습니다. 고마운 누구가 없었다면, 그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는 계속 귀신 들려 있어야 하고, 말 못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고마운 누구가 가족일 수 있습니다. 친구일 수 있습니다. 인심 좋은 이웃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 고마운 누구를, 달리 ‘중보기도자, 전도자, 제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33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그가 말을 하게 됐습니다. 그가 말을 못한 것이 귀신이 들렸기 때문인데, 그에게서 귀신이 쫓겨났으니 말을 하게 된 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이 바빠서, 이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터치가 없었는지, 아님 복음서 기자가 생략했는지 몰라도, 귀신이 알아서 나갔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이름 앞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악한 영은 떠나가고,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걸 기대하기를 바랍니다.
34절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 믿고 잘 되는 것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겁도 없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정말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얼마나 말을 그럴듯하게 잘 갖다 붙이는지 모릅니다. 사아디 고레스탄은 ‘말이 있기에 사람은 짐승보다 낫다. 그러나 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짐승이 그대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짐승보다 나은 것이 말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이요, 그 말이 바른 말이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바른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덕이 되는 말, 은혜 되는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해서 내 속은 잠시 시원할지 몰라도, 교회에 덕이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몰라줘도, 주께서 적당한 때에 갚아주십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도 좋게 말하고, 그 사람 뒤에서도 좋게 말하려고 힘써냐 합니다. 지폐 양면이 액수가 같아야 합니다. 앞면은 5만원이 적혀 있는데, 뒷면은 5천원이 적혀있다면, 여러분은 그 지폐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앞뒤 말이 다른 사람은 신뢰를 받기 힘듭니다. 그럼 결정적일 때 아무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35절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대꾸를 무시하시고,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명 3대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배웠습니다. 제자훈련이 다른 게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가르치고 전파하며 치유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가르치는 것 못할 수 있습니다. 전파하는 것 시원찮을 수 있습니다. 치유기도 한 마디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훈련으로 됩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능통한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 눈에 그 무리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목자 없는 양보다 불쌍하고 고생하고 기진하는 양이 없습니다. 당시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랍비들이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이 제사장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 목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선한 목자가 아닌, 양을 고생시키는 목자, 양을 기진하게 만드는 목자로 보였습니다.
37-38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으로는 부족하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나도 우리 갈보리교회에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갈급한 자, 낙심한 자, 사명 있는 자, 충성된 자, 헌신된 자들을 보내주옵소서. 교회를 정하지 못한 자, 주위에 이사 온 자들을 보내주옵소서. 누가, 아삽, 헤만, 여두둔,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전문가들을 보내주옵소서. 디모데 같은 청년들을 보내주옵소서. 백부장 같은 군인들을 보내주소옵서. 다윗의 세 용사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옵소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30대 부부 일꾼을 보내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질병 속에서도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남을 돕는 자로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걸어가는 이 길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성도는 너무나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너무 너무 소중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 땅이 복을 받습니다. 생명을 받습니다. 빛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큼이나 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저희를 향하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셨던 마음을 저희 역시 갖게 하셔서,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저희들도 걷게 하시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저희 역시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정녕 주님을 대신하여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