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보는 동산觀漲臺의 유래
신풍리의 앞내前川는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교래, 대천동 구룡동城邑二里, 정의현성旌義縣城을 돌아 바다에 이르는 제주에서 가장 긴 내이다.
옛 문헌에는 개로천介路川 ․ 큰질내으로 표기 되었지만 교래리에서는 뒷내 또는 진숫내辰巽川 : 동남쪽으로 흐르는 내라는 뜻, 밑으로 내려오면 산내山川 : 한라산에서 오는 내라는 뜻, 신풍리에서는 앞내前川라 부르고, 글 짓는 이들은 화천花川이라 불렀다. 지금과 같이 정비되기 이전에는 철쭉이 만발하였기 때문에 ‘꽃 피는 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이는 꽃은 곳藪의 발음을 딴 것이라고도 한다.
비가 내려 물이 불었을 때는 물줄기 ․ 물굽이 ․ 물거품 ․ 물안개의 움직임이 절경을 이루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구경하였다. 내가 처음 쏟아지는 것을 ‘내 터진다’라 하는데, 내가 터질 때는 십리 밖까지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를 듣고 동네아이들은 내 터지는 것을 보려고 이곳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내 보는 동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문인들은 그 뜻을 따라 관창대觀漲臺라 불렀다.
지금은 크고 작은 기암괴석과 깊고 얕은 소沼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물이 원만히 흐르지만 옛날에는 물이 흘러오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을 감돌고, 소에 떨어지고, 두 갈래의 물줄기가 엉키다 풀리면서 흘렀기 때문에 웅장한 물줄기가 신기神氣를 느끼게 하여 이에 따른 전설이 많다.
〔전설 1〕
“내가 터질 때는 한라산 산신이 삼천병마를 거느리고 내려오기 때문에 함부로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도 안 된다. 물빛이 검은 때는 바다에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노한 산신이 내려오는 것이고, 물빛이 흰 때는 산신이 순력 나온 것이다. 물빛이 검게 내가 터지면 세상에 어지러운 일이 생기거나 도가리 큰 사름이 죽곡, 흰 물줄기로 터지면 풍년이 든다. 소태4․3 전해에도 검은 물이 흘렀다.”
대개 하루가 지나면 점점 내가 멈춤으로 내 터진 다음날에는 서로 연락이나 약속이 없어도 천동 3리川東三里 즉 신풍 ․ 삼달 ․ 난산, 천서 2리川西二里 즉, 가시 ․ 토산의 문인들은 모여 탁족濯足을 하며 시회詩會를 열어 송표회送瓢會나 아저兒猪추렴을 겸하기도 하였다.
시회가 시작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광무光武 연간으로 추측되며, 시회의 명칭은 화천시사花川詩社였다. 왜정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 유지되었다. 김귀팔金龜八 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시사의 집강執綱은 각 마을에서 돌려가며 맡았는데 임기는 3년이었다. 삼달리 강직원康鶴瑞인 듯, 난산리 김훈장 다음에 내가 집강을 맡았다가 가시리 완철 오유학吳完喆: 손자에게 넘겼는데 뒷해에 사태가 일어 가시리가 소탕되는 바람에 시고詩稿와 전래되는 좌목座目:名單을 모두 잃어버렸다.”
생활이 어려웠던 시대에도 문인들의 활동이 풍요로운 요즘보다 더 활발하였음을 말해주는 증언이다.
물질만을 앞세우고 정신을 뒤로 미루는 시대풍조를 바로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첫 걸음으로 마을에서 이 내를 읊은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선생의 친필을 찾아 묵적비墨蹟碑를 세움에 따라 성산읍장의 배려와 제주도의회 윤춘광 도의원의 문학을 아끼는 마음에다 성산포문학회 이승익 회장의 노고가 합쳐져 정자까지 세워져 풍광을 한층 더하게 되었다. 시골문학인들의 모임의 장이 될 것이다.
정자의 이름을 ‘창문이 베개가 되는 정자窓枕亭’이라 한 것은 원시의 제목 ‘창 앞에는 흐르는 물, 베개 가에는 책窓前流水枕邊書’에서 첫 글자를 뽑은 것이다. 창문이 베개가 되어야 방안에 쌓인 책에서 참 경지를 찾고, 창 밖에 흐르는 물에 속된 생각을 씻을 수 있다. 속된 생각을 씻어내어야 형체 밖의 보이지 않는 참형체眞形를 보게 된다. 옛사람 시구의 뜻이 그러함으로 이를 취하여 정자이름을 삼았다.
의청선생묵적비毅淸先生墨蹟碑
坐看水流臥看書 山中卜築一精廬
潺湲溪曲雨過後 吟詠詩懷月上初
黃卷開時眞計活 淸源來處世塵疏
野人志趣知人少 牕外枕邊樂有餘
묵적비 번역석
전면
창 앞엔 흐르는 물, 베갯머리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