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67) 의종 6
- 왕이 신하의 손에 죽다.
살아남은 문신들은 숨을 죽이고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하였으나 그래도 임금을 모시던 궁내 환관 몇명이 무신들의 반란에 대한 저항을 해보았으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맙니다.
내시와 환관 10여명이 정중부 일당을 치려고 모의를 꾸미다가 잡혀 죽는 작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정중부는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유배 보내고 의종의 동생을 새 임금(명종)으로 추대하니 무신들의 잔인한 쿠데타는 완벽하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자겸이나 묘청의 반란 때보다도 더 무지막지한 살육이 자행되었으며, 특히 서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문신들은 모두 찾아내 일방적으로 죽여 버렸는데, 죽은 벼슬아치의 수로 따지면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습니다.
사실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문벌 귀족이 워낙 강한 데다 정변 자체가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힘있는 문신에게 들붙어서 이익을 챙겼던 일부 무신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자 예상 밖으로 군인들이 잘 움직여 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신에 대한 차별이 워낙 심하다 보니, 군인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장교들이 많았고, 대부분 농민출신인 병사들은 상관 무신들 보다 문벌 귀족들에게 더 큰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묘청의 서경천도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한 문벌 귀족들은 그전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그들은 땅을 늘리고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백성들의 등에 빨대를 꼽아놓고 착취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탓에 고통을 짊어진 민중에게 무신의 난은 개혁을 이룰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병사들이 문벌 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을 선 것입니다.
이 무렵 고통으로 얼룩진 민중의 목소리를 군인들이 대신 냈다고나 할까요?
결국 무신의 난이라기보다는 모든 고려군인의 난이었던 셈입니다.
왕의 주변을 맴돌며 비위를 맞추고 온갖 아첨을 일삼던 그 수많은 신하들이나 환관, 내시들,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그 누구 한사람도 왕을 보호하겠다고 나서거나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의종을 쫓아내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皓)를 데려다가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명목상의 왕에 불과할 뿐 모든 권력은 무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백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우간의 김보당이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1173년 이었습니다. 그는 정중부 이의방 등을 몰아내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모의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순석과 유인준을 시켜 의종을 계림으로 옮겨오게 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북계의 군대를 풀어 이를 진압토록 하였는데, 이의민과 박존위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김보당이 이끄는 반군세력을 완전히 진압하여 버립니다.
난을 평정한 이의민은 동년 10월 경신일에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에서 의종에게 술을 권하고는 의종을 죽여 버립니다.
그것도 산 사람을 잔인하게 등뼈를 꺾어서. 그리고는 왕의 시체를 연못에 던져 버립니다.
권좌에서 쫓겨난 임금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기 마련이지만, 의종의 죽음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전례를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려왕조실록(68) 명종 1
- 무신정권이 세운 임금.
명종(明宗)의 이름은 왕호(王晧), 자는 지단(之旦), 원래 이름은 왕흔(王昕)입니다.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선왕 의종(毅宗)의 친동생으로 1131년 인종9년 10월 경진일에 태어났습니다. 의종 2년에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었으며, 1170년 9월 기묘일 거사가 성공했음을 확신한 정중부가 의종을 폐위시키고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의종의 동생 왕흔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말이 요청이지 실은 통보나 다름없는--- )합니다. 당시 왕흔은 40세로 세상사를 잘 판단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약간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무신들에 의해 선택되어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식을 갖게 됩니다.
명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수문전(修文殿)에 나아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고(李高)를 대장군위위경(大將軍衛尉卿)으로,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전중감(殿中監)으로 임명하는 등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고 반란의 주체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관직을 내려주었습니다. 뿐만이 아니고, 문관직과 무관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일파가 바라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였습니다.
형이자 선왕인 의종은 도참(圖讖)을 믿고 동생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전첨 최여해가 신기한 꿈을 꾸었다며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최여해가 들려준 꿈 내용이 명종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였습니다. 최여해가 꿈에서 명종에게 홀(忽, 신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을 주니 명종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용상으로 올라앉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명종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이었지요.
“아예 다시는 말을 말아라. 이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차대한 일이니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무튼 신기하게도 최여해의 꿈이 맞아 떨어져 명종은 왕이 됩니다. 훗날 이의민을 극구 개경으로 입성토록 청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무신의 핵심들은 명종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똑똑한 왕을 세우면 귀찮아지니까.
돌이켜보면 인종과 의종은 문벌 귀족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바가 있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무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또한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 왕이다 보니, 드넓은 궁궐에서 일없이 홀로 용상이나 지키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전왕들은 왕권을 찾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하거나 문신들에게 과시라도 할 수 있었다지만, 명종은 그저 숨죽이며 무신들의 눈치나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삶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의종을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그들이고 보면, 도대체 어떤 구실을 가지고 자기 목숨을 거두어 가려는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하루하루였습니다.
이렇게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명종이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의 초상을 벽에 붙여놓고 벽상공신으로 삼아 눈치를 살피는 동안, 나라의 모든 크고 작은문제들은 무신들이 설치한 중방(重房)에서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 단맛에 흠뻑 취해버린 그들은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욕심이 그들의 틈을 벌어지게 만들었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셈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