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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적 자유주의
문성훈 지음, 사월의책 2022
서문: 왜 사회적 자유주의인가?
나는 이 책에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이지만, 인간의 자유를 인간의 사회성에 기초한 자유, 즉 사회적 자유로 본다는 점에서 사회적 자유주의이다. 여기서 사회성이란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특성으로서 이를 통해 서로 다른 개인들이 일체감을 형성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협력을 수행하면서 결국 각자의 한계를 극복한다. 따라서 사회적 자유란 개인의 자유라는 면에서 외적 강제나 내적 장애 없는 자아실현을 의미하면서도 타인과의 일체감과 상보성을 통해 실현되는 ‘협력적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자유주의는 인간의 사회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보존본능과 이로 인한 자기중심적 욕구에 기초한 개인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 자기중심적 자유주의였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모순적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개인적 자유는 외부로부터 아무런 방해 없는 욕구 충족을 의미하지만, 타인과의 대립과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 실현은 타인의 자유 실현을 침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 자유주의는 개인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도 항상 이를 제한해야 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지금까지의 자유주의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제한적 자유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한된 자유 역시 경쟁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경쟁의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지듯 결국 자기중심적 자유주의는 소수의 자유와 대다수의 부자유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결과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은 재산, 권력, 명예를 독점하며 자신의 목표와 선호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우월감에 빠져 자신보다 뒤처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반대로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생존 위기는 물론 열등감에 허덕이며 삶의 의미마저 지키기 어렵게 된다. 이에 반해 사회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성에 기초한 자유는 일체감과 상보성을 통한 타인과의 협력을 전제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자유 실현은 타인의 자유 실현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자유 실현의 필수적 조건이 된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기중심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기중심적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정치이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사회적 자유주의 앞에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과거에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지칭된 자유주의의 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비록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사회적 자유’ 개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에,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용어상의 혼동이 생기지 않을 경우, “새로운”이란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히 경쟁 사회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사회적 영역이 경쟁으로 구조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사회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개인적 활동은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얻으면 남은 잃고, 내가 이기면 남은 패배하는 제로섬 방식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이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는 곧바로 내신 성적을 위한, 특목고에 가기 위한, 그리고 대학 진학을 위한 경쟁으로 탈바꿈하면서 나의 모든 노력은 타인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노력으로 변질된다. 이는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A+를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상대 평가 상황에서는 단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면, 취업을 위해 경쟁하고, 사업가가 되어도 경쟁하고, 자영업자가 되어도 경쟁하고, 생산자든 판매자든 소비자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단지 열심히 노력한다기보다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경쟁한다. 정치적 영역도 마찬가지다. 승자독식의 구조하에서 모든 정치인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후보보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경쟁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여가나 문화생활에서도 경쟁한다. 낚시가 취미인 사람은 단지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경쟁하고, 노래방에서조차 노래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높은 점수를 얻으려 경쟁한다. 당연히 모든 스포츠는 경기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갈리지만, 미술이나 음악 등 예술 분야에서도 등수를 매기는 대회가 넘쳐 난다. 이런 점은 한가하게 TV를 볼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은 흔히 시합과 경연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교육,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에 참여한다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행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경쟁으로 강조점이 이동한다. 더구나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지는 제로섬 상황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흔히 경쟁적 상황이 펼쳐진다. 남들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가족끼리도 친구끼리도 동료끼리도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살아야 할까? 물론 경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경쟁은 사람들에게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고, 그만큼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위해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승자는 우월감을 만끽하고 패자는 열등감에 시달리며,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경쟁이 소수의 자유와 대다수의 부자유를 낳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경쟁 일변도의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정치, 경제, 교육 등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 경쟁을 제한하거나 경쟁이 낳은 폐해를 최소화하려는 수많은 정치적 시도가 등장했다. 하지만 경쟁의 제한은 이것이 자유의 침해라는 비판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경쟁이 낳은 폐해를 최소화한다 하더라도 경쟁 관계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는 항상 사후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 결과 경쟁을 제한하려는 정치적 시도 자체가 오히려 제한된다든지, 경쟁의 폐해가 최소화될 수 있기에 오히려 경쟁이 정당화되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제는 경쟁의 제한이나 사후적 조치만이 아니라, 경쟁 영역 자체를 축소하면서 이를 협력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최근의 정치 상황을 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정치적 의제는 단연코 공정이다. 물론 공정이 쟁점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2010년에도 이명박 정부가 ‘공정사회’를 천명했다. 가장 불공정하고, 가장 기득권 친화적이었던 이명박 정부가 공정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공정이 쟁점이 된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공정이란 무엇일까? 어려운 철학적 논의를 거칠 필요도 없이 지금 말하는 공정이란 경쟁에서의 공정을 말하며, 대표적인 예로 대학 입학, 취업, 승진 경쟁에서의 공정을 말한다. 한국리서치에서 시행한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경쟁의 기준이 되어야 공정한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경쟁이 부모의 배경이나 연줄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팽배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개인의 능력 중 한국 사람들은 개인의 노력을 더 중시한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 국민은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공정한 사회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으면 다른 사람은 잃게 되는 제로섬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이 공정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사실 개인의 노력 정도는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이것만으로 경쟁에서의 승자와 패자를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의 노력 정도를 기준으로 대학 입학, 취업, 승진 경쟁에서 사람을 선발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개인의 능력이 경쟁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능력주의가 공정한 경쟁의 원칙으로 천명되곤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 것일까? 물론 경쟁을 통해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기업에서 사원을 채용하고 승진시킨다면 가장 우선적인 기준은 개인의 능력일 것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해 볼 때 능력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분명 어떤 사람은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없고, 개인 간의 능력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능력의 유무가 과연 본인의 책임일까? 개인의 능력이 본인이 노력한 결과라면 능력의 유무는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에는 본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가정환경, 유전적 특성, 그리고 운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요소들이 개인의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개인의 능력은 개인적 노력의 결과이고, 오직 능력만으로 경쟁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공정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불공정을 말할 때 특혜를 거론한다. ‘부모 찬스’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가 영향력을 발휘해서 자기 자식을 대학에 합격시키고, 회사에 취직시킨다면 이는 특혜이고, 따라서 불공정이다. 그러나 부정 청탁과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에서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크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교육 투자가 자식이 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를 결정하고, 이렇게 입학한 대학이 어느 회사에 채용되느냐를 결정한다면, 각종 경쟁에서 개인의 능력이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개인의 능력은 개인의 노력이라기보다 부모의 경제력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투자를 배제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녀 양육을 부모의 의무로 보는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사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국민이 아무리 공정경쟁을 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형성된 개인의 능력을 통한 경쟁이라면, 여기에는 원초적 불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능력을 기준으로 한 공정경쟁 주장은 불평등한 조건을 은폐하고 이를 미화하는 허위의식만을 확산할 뿐이다.
202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 품격을 지녀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 안에 들며, 이런 점에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에 선진국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선진국으로서의 품격이란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약자를 포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사회적 약자와 강자는 개인의 능력, 즉 경쟁력 차이 때문에 발생하며, 남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진 사회적 약자는 생활 수준이 열악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더 근본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왜 사회적 약자가 생기는 것일까? 당연히 이는 경쟁 때문이며, 경쟁이 격화하여 삶과 죽음을 건 무한경쟁 양상을 띠게 되면, 우리 사회 전체는 서열화 된다. 즉 전 국민을 1등부터 꼴찌까지 경쟁력의 강함과 약함, 강자냐 약자냐에 따라 등수를 매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좋은 학벌을 발판 삼아 대기업에 취직하여 고액연봉 생활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낮은 학벌에 비정규직을 전전하다가 실업자가 된다. 이렇게 경쟁력의 차이는 직업과 소득의 차이로 나타나고,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초래하지만,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 서열화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면, 능력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 낮은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자책하고 비하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거의 꼴찌에 해당한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 자신에 대한 만족도에 좌우된다면, 자존감 없이 열등감에 빠진 국민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약자를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쟁을 축소하고, 이를 협력적으로 재구조화하는 것은 어떨까?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경쟁 사회에서 협력 사회로 탈바꿈하는 것은 어떨까? 만약 이렇게 된다면 약자의 발생만이 아니라, 서열화로 인한 자존감 상실 또한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어떤 사회이든 협력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다. 경제적 영역만 보더라도 오늘날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생산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경제적 활동은 분업적 협력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모직 코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양치기에서 시작하여 양모 선별공, 염색공, 방적공, 직포공 등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이 필요하고, 모직 코트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상인, 해운업자가 필요하고, 해운업자가 운송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업자, 돛대 제조업자, 밧줄 제조업자가 필요하고, 또한 이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한 사회의 경제 활동 전체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자는 판매자가 있어야 생산하고, 판매자는 생산자가 없으면 판매할 수 없으며, 또한 판매자는 소비자를 필요로 하고 소비자는 판매자가 없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물자를 소비할 수 없다. 경제적 영역만이 협력적으로 구조화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협력은 필수적이다. 민주주의는 그 어원을 보더라도 인민의 자기 결정 원칙에 기초해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의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국민이란 단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나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개인, 집단, 계층을 포괄하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단일한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개별적 국민이 협력을 통해 통일체를 이루지 않는 한 사실 인민의 자기 결정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자기 결정으로 왜곡되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수많은 협력 관계를 형성하며 산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 힘을 합쳐 일체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의 역할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는 상보적 관계라면 모두 다 협력 관계인 것이다. 더구나 이런 협력은 단지 일을 할 때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연인 간의 사랑과 같이 일과 무관한 친밀성 영역에서조차 협력 관계가 필요하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역시 나를 사랑해야 하며, 상대방의 나에 대한 사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 이렇듯 협력 관계가 형성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수행하는 것이 곧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바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협력 관계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유 실현을 위한 조건이 된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외세에 의한 국권침탈은 물론 분단의 아픔까지 겪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 국민에게는 뿌리 깊은 열등감과 강대국 의존적 태도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무한경쟁이 만든 서열화까지 가중되면,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해도 우리 국민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자존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나가기는 어렵다. 선진국의 품격을 위해서는 단지 경제 대국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약자를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경쟁이 만든 서열화 속에서 열등감에 빠진 국민이 선진국으로서의 품격을 가질 수 있을까? 따라서 이런 점에서도 이제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자존감 있게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발상의 전환, 국민의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단지 경쟁을 제한하거나 경쟁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만을 대중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축소하고 우리 사회 자체를 협력적으로 재구조화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경쟁 사회에서 협력 사회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경쟁 사회에서 협력 사회로의 대전환이 시작될 수 있을까? 나는 경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제시된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떠올려 보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독일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으며, 대학입학 자격 고사만 합격하면 누구나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만,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일 대학이 극한 경쟁을 유발하는 한국의 서열화된 대학들보다 교육이나 연구에서 뒤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자만 국회의원이 되는 승자독식의 선거구제가 아니라, 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수를 배분하는 비례대표제가 확대된다면, 정치인들이 국민의 지지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 노력은 다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대적 경쟁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생산자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 판매가 이루어지면 생산자들은 좋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다른 생산자와 경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런 협동조합이 소비자 협동조합, 신용 협동조합, 노동자 협동조합 등으로 확대될 뿐만 아니라 이들 협동조합 간의 협력적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다면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져 온 경제적 활동 중 상당 부분이 협력적으로 재구조화될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만약 전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면, 사회구성원 간의 경쟁은 생존을 둘러싼 극한 경쟁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기 발전을 위한 우호적 경쟁으로 탈바꿈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협력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어렴풋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실마리에 불과하며, 교육,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영역을 협력적으로 재구조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화된 창의적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정책 개발을 향도할 정치이념이다. 정치이념이란 국가의 개별 정책들을 입안하는 데 규제적 역할을 하는 최종 목표이자 가치를 말한다. 이런 규제적 정치이념이 없다면, 국가는 어떤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게 된다. 물론 어떤 정치이념도 한 국가의 정체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 해당 국가가 추구할 정당한 정치 행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말하는 정치이념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을 실현하면서 협력 사회로의 전환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그런 정치이념이 바로 사회적 자유주의이며, 개인의 자기중심성과 경쟁이 아니라, 사회성과 상호협력에 기초한 사회적 자유주의가 실현된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21세기는 모든 국민이 자존의식을 갖고 사는 ‘국민 자존 시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향후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개념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작업은 총 네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나는 예비적 고찰에서 서론 격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헌법 입안자의 입장, 헌법 전체 구조, 헌법재판소의 판례 전통, 합법적 정당의 강령, 그리고 대한민국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통해 규명하면서 이를 실현할 정치이념으로 새로운 사회적 자유주의를 제시할 것이다. 이에 이어 제Ⅰ부에서는 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고전적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가 개인의 자기보존이라는 자기중심적 자유임을 규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 개념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자유와 대다수의 부자유를 귀결하고 말았음을 지적할 것이다. 제Ⅱ부에서는 이러한 전제하에 한편으로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대비되는 사회성이 무엇이며, 인간의 협력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 개념에 근거하여 해명할 것이다. 제Ⅲ 부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적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 체제로 구상한 대의제 민주주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원자론적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적 자유가 실현될 사회 체제로 협력적 민주주의, 사회적 경제, 유기체적 사회를 제시할 것이다. 분명 이러한 나의 작업이 비록 과감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체계화된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 오히려 나는 저술 작업이 다 끝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사회적 자유주의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방향을 깨달은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나의 제안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추구할 이념적 향방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기보다는 앞으로 토론해 볼 만한 새로운 주제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