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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Che’ Guevara: The Economics of Revolution(2009)
헬렌 야페 지음, 류현 옮김, 실천문학 2012.
의식과 인센티브
공산주의적 도덕 가치가 부재한 사회주의 경제는 관심 없다. 우리는 빈곤과 싸우고 있지만 소외와도 싸우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물질적 이해, 즉 ‘개인의 사리사욕’과 인간의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하는 이윤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현실economic facts과 이것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기울였다. 만일 공산주의가 의식의 현실을 경시한다면 공산주의는 분배 방식으로는 작동할지 몰라도 혁명적 도덕 가치를 발산하지는 못할 것이다. −체 게바라
효울성과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주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사용할지 말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에 가치법칙 및 자본주의적 범주들의 작동 여부에 대한 논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게바라는 도덕적 인센티브와 집단의식을 강조했는데, 이 때문에 이 연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관념론자라 낙인찍었다.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운동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 역시 새로운 척도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시간에 기초한 균등 교환이 분배의 척도였다. 경제생활의 많은 영역들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보장할지, 생산성은 어떻게 높일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은 어떻게 극복할지,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와 소비수단에 대한 투자는 어떤 식으로 균형을 유지할지 많은 과제를 낳았다. 게바라는 이런 문제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둔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도덕적 인센티브는 이런 의식과 사회적 의무로서 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 개념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쿠바 태생의 사회학자 페르난도 에르난데스 에레디아는 “의식conciencia은 인간과 환경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즉, 의식적 행동, 목적의식 그리고 조직화된 주관적 요소의 지배가 바로 그런 방식이다”라고 설명한다. 게바라에게 의식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은 나쁜 측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수단이자 혁명 과업의 결과에 따라 스스로 재생산하는 현실적이고 점증하는 힘이었다. “체는 의식의 잠재력을 찾아내 응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이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134-135
혁명 투쟁기의 대중 동원과 혁명 정부 초기의 민중 참여 경험이 혁명, 사회 변혁, 나아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게바라의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게바라는 (정치 영역에서) 대중의 의식적인 동원이 경제 영역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하나의 객관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1961년 4월에 일어난 피그만 침공과 1962년 10월에 일어난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군사 방어에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 외 노동, 자발적 노동, 혁신, 생산, 생산성이 증가했고, 반대로 관료주의와 결근은 줄어들었다. 게바라는 “오히려 극단적 위기 국면에서 도덕적 인센티브가 작동하기 쉽다. 도덕적 인센티브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발전시켜 새로운 가치 범주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135
게바라의 아이디어는 생산양식이 인간의 의식과 사회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마르크스에 기초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적 또는 심리적 표현을 ‘소외와 적대alienation and antagonism’로 묘사했다. 공산주의는 이와 반대로 사회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완전히 발전한 존재로서 인간상을 제시한다. 게바라는 마르크스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해방 문제를 강조한 ‘철학자’로 언급한다.135-136
“사적 소유와 인간의 자기소외의 건설적 지양으로서, 따라서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 본질의 실질적 전유로서 공산주의; 결국 공산주의는 인간이 사회적(즉, 인간적인)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복귀는 의식적인 것이 되고, 앞선 발전 단계가 축적한 물질적 부를 토대로 달성된다. 완전히 발전한 자연주의로서 이런 공산주의는 휴머니즘과 같다. 왜냐하면 완전히 발전한 인간주의는 자연주의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진정한 해결이다. 다시 말해, 존재와 본질, 객관화와 자기 확신, 자유와 필연,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해결이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고, 이를 푸는 것이 의식이다.”136
게바라가 보기에 공산주의에서 ‘완전히 발전한 인간주의’를 막는 분명한 걸림돌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확립된 노동의 상품화, 즉 가치법칙의 작동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에 이런 사회적 관계가 바뀌어야 하고, 노동이 상품이 되기를 중단해야 하며, 인간은 생산 과정에 대해 사회적 또는 집단적 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136
“이를 문화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이 새로운 조건을 획득해야 한다. 인간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사회적 의무 수행을 위해 몫을 분담하는 시스템을 수립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판매해야 하는 육체적 필요에 구애받지 않고 생산에 참여할 때 완전한 인간 조건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기초해, 한편으로는 노동에 사회적 의무라는 새로운 범주를 부여하고 노동을 인간에게 더 큰 자유를 선사할 기술 개발과 연결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발적 노동과 연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136-137
게바라는 중앙계획경제와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쿠바의 생산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면 자칫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자본주의적 의식이 재생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본주의가 남겨놓은 낡은 무기들(경제적 세포로서 상품, 수익성, 자본주의 발전의 지렛대로서 개인의 물질적 이해 등)로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망상을 쫓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중략)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방식에 길들여진 경제적 토대가 의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137
자율재정시스템 지지자들은 경제적 합리성이 자동적으로 사회적 합리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게바라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가 두 가지 목표, 즉 생산과 의삭 사이의 조화에 기초한 경제관리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과 의식이 똑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물적 토대와 함께 새로운 인간이 창조되어야 한다.”137
가치법칙, 노동 생산성, 생산 인센티브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할 때, 대논쟁에서 자본주의적 범주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논자들이 인센티브를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 선행해 작동하는 가치법칙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스탈린이나 쿠바 내 친소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게바라는 잠정적으로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치법칙을 제거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인간과 자연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부 자율재정시스템 지지자들은 물질적 풍요를 달성해야 가치법칙과 그것이 인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대로 게바라는 가치법칙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행기 동안 도덕적 인센티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 모든 대논쟁 참가자들이 물질적 인센티브를 도덕적 인센티브로 서서히 바꿔나가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차이가 있다면 속도였다.138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논쟁에서 게바라와 가장 날선 논쟁을 벌였던 로드리게스는 20년이 지난 뒤에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인센티브 개념에서는 나와 체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가장 이견이 컸던 것은 정도의 문제였다 (중략)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속도 문제에서도 우리 둘은 의견이 달랐다.”
대논쟁의 양쪽 당사자 모두 도덕적 인센티브가 사회주의 의식을 반영하고 생산한다는 데, 그리고 물질적 인센티브가 물자 부족과 저발전 상태에서 필수적이라는 데 동의했다. 예를 들어, 자율재정시스템 지지자로 국립농업개혁원의 물가재정 책임자였던 호아낀 인판테가 이렇게 주장했다.
“기업은 공산주의로 가는 각 길목마다 인센티브 본연의 목적에 기초해 도덕적 인센티브와 물질적 인센티브를 적절한 비율로 도입해야 한다. 공산주의로 나아갈수록 도덕적 인센티브가 증가하는 만큼 물질적 인센티브는 줄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적 인센티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 기간 동안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적절히 사용하기만 하면 생산물의 질을 높이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138-139
하지만 인판테는 논문 말미에서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생산의 질과 양에 대한 인센티브를 시작으로 물질적 인센티브의 길을 거리낌 없이 따라가야 한다.”
게바라는 생산력 저발전과 쿠마 인민의 의식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 인센티브를 기본적인 동기부여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운 물질적 인센티브가 그 자체로 경제적 범주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 생산관계에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논리를 부과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장치는 그 자체로서 범주가 되고, 이어 자신의 힘을 인간관계들에 부과한다 (중략) ‘소비재consumer goods’ 이것은 다른 시스템(AFS) 지지자들에게는 의식의 모토이자 그것의 물적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직접적인 물질적 인센티브와 의식은 용어상 모순이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짤막한 설명으로 말을 끝맺었다.
“만일 물질적 인센티브가 의식 발전과 모순이라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생산 증대를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힘이라면, 의식 발전을 선호하는 것이 결국은 생산을 저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비교적 관점에서, 비록 아무도 정확한 계산은 하지 않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는 의식 발전이 물질적 인센티브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단시간에 생산 증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가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발전이 전반적으로 공산주의로 나아가도록 입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이 고통스러운 필요이기를 멈추고 유쾌한 임무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주장은 주관론에 경도된 것으로 앞으로 의식 발전이 생산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마땅히 제재 조치를 가해야 한다. 반대로 의식 발전이 생산력 발전을 심각하게 막는다는 것이 입증되면 친숙한 길로 돌아가기 위해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139-140
친숙한 길이란 자본주의적 범주를 사용하는 자율재정시스템이었다. 위에서 내가 강조한 문장은 게바라의 의식과 인센티브 개념이 지향하는 곳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두 개념이 논의되고 있는 패러다임을 한정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결론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이론 논쟁들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발 전략 및 정책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3~1965년에 쿠바에서 일어난 대논쟁도 같은 경우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분야에 나름대로 기여했다. 두 명의 외국인 참가자들과 달리 쿠바의 대논쟁 참가자들은 대중의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경제를 조직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관리 및 기술 메커니즘을 찾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했다. 게바라에게 사회주의 이행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가치법칙을 없애는 것이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쿠바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법칙은 쿠바 인민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부담을 줬고, 이는 그들의 사회적⋅역사적 역할 인식에 그대로 묻어났다. 게바라가 가치법칙 근절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그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바라가 소비에트 정치경제학이 이런 과제를 무시했다고 비판한, 또 사회주의 건설에서 주관적 요인을 배제했다고 경고한 최초의 인물도 아니었고, 또 그 혼자만도 아니었다. 주관적 요인이란 의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쿠바 인민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혁명 과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게바라는 서로 대립하는 마르크스주의 두 학파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이전의 논자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한쪽에는 소비에트 이론가들, 또는 에른스트 놀테가 사회주의 진영 출신의 ‘국가state’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 부른 학파가 있다. 이 학파는 ‘자신들의 국가와 정부에 대해 비판적 거리두기critical distance가 부족하다.’ 다른 한쪽에는 이 학파를 비판하는 서구 또는 ‘자유free’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가장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비판적 거리 두기 형식’을 취했다. 게바라가 소비에트시스템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가 이론적으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가까웠지 않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자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적 거리두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게바라의 분석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졌고, 그 자신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는 쿠바 정부의 강인한 의지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141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만 주어진 조건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게바라는 이론이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폴란드 태생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인 K. S. 카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당신은 우리가 쿠바를 지식인들의 연구 대상쯤으로, 파리의 카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최근 문학 동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듯 우리보고 쿠바를 그런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시나요? 쿠바는 미국 해군에 포위당한 채 혁명의 한복판을 걷고 있습니다. 쿠바는 자신을 방위하면서 미래를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서둘러 교육시키려고 하는 것은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급히 움직여야 하고, 또 이 문제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경제봉쇄, 전복, 사보타지, 심리 전쟁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이 언급은, 한편으로는 소련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블록의 편람들을 참고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캐롤에게 거세게 항의해야 하는 게바라의 자가당착을 보여준다. 게바라는 ‘추천할 만한 다른 대안들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봤고, ”쿠바 혁명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기를,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사회적 원리social philosophies의 주인이 될지 교리doctrines의 주인이 될지 선택권을 주기 원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s’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비판이 (정책 입안보다는) 지적 실천의 형식을 취했던 ‘자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게바라는 가치법칙을 근절하고 인간을 발전의 중심에 두고자 한 대안적 경제관리시스템을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을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그는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주의에서 부족한 ‘인간성’을 비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게바라는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이나 비판은 쉽습니다 (중략) 어려운 것은 행동하는 것, 열정을 다하는 것, 해결하는 것, 의지와 이해를 조정하는 것, 그리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굳건한 의지입니다.”143
게바라는 소비에트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의 이론과 양립하는 정책들을 고안하지 않고, 대신 역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들의 경험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췄다고 불평했다. 그는 그런 타협적 실용주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비하기 위해 생산력과 사회주의 의식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시스템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사회주의 구상은 사회경제적 정의를 바탕에 두었던 중남미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에도 영향을 받았다. 발전이론가인 켄 콜이 이렇게 말했다. “체 게바라는 그 누구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호세 마르티의 통찰과 마르크스의 이론에 깊이 빠져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잠재력을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해방할 수 있다고 하는 혁명논리를 그대로 실천했다.”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