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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집에 도착한 영우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정겨웠다. 봉당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철나무며, 빨랫줄에 걸려있는 이불홑청, 청소를 하기 위해 어릴 적 영우가 몸을 넣었던 커다란 뒤주도 반가웠다. 마치 먼 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아련한 느낌이 영우의 온몸을 휘돌았다. 안방에서
아버지 바짓단을 수선하려고 재봉틀을 돌리던 엄마가 인기척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안방 문 열리는 소리에 영우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안도의 기쁨과 죄송스러움이 영우의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켰다. 엄마도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온 영우를 보며 안도하는 표정이다. 영우가 모기만한
소리로 잘못을 빌었다.
“미안해 엄마”
엄마가 영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어쩌려고 그러고 다녀 이것아, 어디 나가서 죽었는지 알았잖아”
언제나처럼 엄마는 아무리 화가 나도 표정에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냥 화를
않낸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른다. 어지간한 일은 속으로 삯이며 자식들 스스로 알아서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 일거다. 말썽 많은 자식들을 여럿 키우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거나 원래 엄마의 성품이 그렇거나 아니면 두 가지가 섞여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일게 분명하다.
“내가 죽긴 왜 죽어”
영우는 마루 끝에 서서 한심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서 안기며 울었다. 더 이상 야단을 치거나 추궁하지 않는 엄마가 고맙기도 했지만 품에 안기는 순간 포근한 엄마의 체취가 영우의 코를 자극하며 온몸으로 전달 됐다. 그래서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엄마와의 대면은 그렇게 넘어갔다.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 한 달 전 집 떠날 때 쓰던 집기부터 연필통, 곱게 개어놓은 이불, 급하게 갈아입고 아무렇게나 벗어서 걸어 놓은 옷가지, 책상에 반쯤 읽다 엎어놓은 소설책, 손 때 묻은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들이 그대로이다. 그것들이 영우를 반기는 듯 안정감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저녁 늦게 들어오신 아버지는 말씀은 별로 없으신 채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영우를 쳐다보았다. 난생처음 아버지의 화난 얼굴을 마주했다. 영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죽지 않고 살아와서 다행이구나”
영우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 하러 죽지 않고 살아왔느냐는 뜻인지
정말 살아와서 다행이라는 뜻인지,,, 더 이상 추궁없이 돌아서는 아버지의 옆모습에서 영우가 온전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안도의 표정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영우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부모님의 성화도 있었지만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의지도 한몫했다. 그렇게 책과 씨름하며 보내는 몇 일째, 어느 순간부터 책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병휘오빠 생각만 머리에 맴돌뿐, 굳게 다짐하며 공부 좀 해 보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도 도무지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러다보니 책하고는 점점 멀리하게 되고 잡념만 쌓이면서 대학입시는 거의 물 건너간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실력으론 대학합격이 어려울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대문 앞에 걸려 있는 우편함을 습관적으로 뒤져 보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그럴 때마다 번번히 실망하기 일쑤지만 그래도 기대를 갖고 살펴본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나고 드디어 병휘오빠한테서 편지가 왔다. 얼른 꺼내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온 영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다. 보고 싶다는 그리움의 편지였다. 편지를 읽는 영우의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곰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무심했던 곰인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곰인형을 품에 안으며 횡계에서의 추억을 되새겨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들의 소리가 들리고 비에 젖은 초가집 지붕의 지푸라기 냄새, 병휘오빠 퇴근시간만 기다리며 느꼈던 쓸쓸한 저녁노을, 어디서 시작 됬는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시골냄새와 가을꽃 향기가 어우러져 이따금씩 코끝을 스치던
기억, 그런 장면들이 질서 없이 영우의 주변을 맴돌다 스치고 지나간다. 횡계의
밤에 보았던 무수히 많은 별무리를 떠올려 보려고 앞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쳐다
보았다.
“여기 하늘엔 별 하나 없네”
실망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천의 하늘은 맑지도 않을뿐
더러 주변에 전등불빛 때문에 별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걸 영우도 알고 있었지만 횡계에서의 추억을 아련히 그려보고 싶어져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 다 본거였다.
어느덧 9월을 넘기고 만물이 풍성한 추석도 지나 10월도 초순을 넘기고 있었다.
일찍 벼베기를 마친 가을의 들판에는 탈곡기 돌아가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아직 벼베기를 끝내지 못한 논에서는 막바지 벼베기를 하느라 분주한 농부들의 모습이 익숙하게 눈에 들어왔다. 농부들이 일 년의 농사를 마무리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대학은 포기할 생각이냐며 꾸짖는데, 영우는 재수해서 대학을 가려는 생각을 이미 포기한 상태다. 그녀가 자신의 지난 시간을 곰곰이 되집어보니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영우의 하루일과는 엄마의 집안일을 돕거나 기껏해야 소설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한가로운 오후 한때 병휘오빠에게 보낼 편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하는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영우의 마음이 전달됐는지 병휘오빠의 전화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병휘오빠는 영우의 울먹임을 알았는지 ‘영우야 영우야’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응! 오빠”
“그래 영우야”
병휘는 영우의 목소리만 한번 듣고는 영우가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집에는 잘 들어갔느냐 부모님께 야단은 안 맞았느냐 등등 영우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번 편지에서 못다 한 말들을 다 했다. 아마 편지로 묻기엔 불편한 말들을 전화로 하는 거 같았다. 영우는 큰 문제 없었고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병휘가 다행이라고 하며 병휘 자신도 잘 지내고 있으니 만날 때까지 잘 지내라는
안부만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영우는 잠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군부대 전화기를 이용하려니 사사로운 대화를 길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이
갔다. 군부대 근무 중인 병휘와 전화통화를 편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일테고 어쩌면 병휘오빠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지만 영우의 마음속 간절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목적 없는 시간만 지루하게 흐르고 있던 어느 날 나라에 깜짝 놀랄 뉴스가 전국을 강타했다. 대통령이 시해를 당해서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군사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뒤집어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영우도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놀랐다. 어린 나이의 영우지만 은근히 나라걱정이 들었다. 한편으론 영우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개의치 않다가 문득 병휘오빠가 떠올랐다. ‘현역 군인 신분인 병휘오빠는 필시 여파가 있을 텐데,,,’
요사이 답답함과 그리움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도 않고 어느 것 하나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병휘오빠를 만나러 갔거나 병휘오빠가 휴가를 나왔어야 하는데 나라가 큰 환란에 빠지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이 돼 버렸다. 그저 나라가 안정을 찾아서
평화롭고 자유로워질 때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고 해도 바뀌었다.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어느덧 새해명절이 다가왔다. 영우는 고립된 산골마을에서 혼자 지내며 외로워할 병휘오빠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너무 보고 싶기도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영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조용한 음악을 벗 삼아 마음을 달래거나 편지로 안부를 묻는 게 전부였다. 엊그제 군부대 전화로 안부를 전해오기는 했지만 병휘오빠가 하숙하는 집에는 전화도 없고 영우가 아무 때나 부대로 전화를 하기는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영우는 하루하루를 병휘오빠의 전화만 기다리다 지쳐서 자신이 직접 병휘오빠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을 하면은 눈이 먼다고 했던가. 영우는 눈만 먼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배우고 살아오면서 삶의 지표로 삼았던 모든 것을 망각한 채 판단의 기준을 병휘오빠
한 사람 위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잡다한 고민거리는 영우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설 명절이 지나고 집안에 작은 행사를 모두 치른 며칠 뒤 부모님께는 적당히 둘러대고 두둑이 비상금도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녀는 다시 용산터미널에서 횡계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지난번 병휘오빠 하고 같이 갈 때 하고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지난번엔 두려움, 걱정, 궁금함, 설렘, 이런 여러 가지 번뇌가 복합적으로 비벼져서 뭐가 뭔지 정리가 안 됐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병휘오빠를 보러 간다는 일념뿐, 그 외 다른 잡다한
번민은 전혀 없다. 그래봤자 5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마치 어른이 다 된냥 당당하고 용기도 부쩍 생긴 것 같고 뭐든지 스스로 개척하고 설계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 스스로도 놀랐다.
버스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영우생각에는 더디게만 느껴진다. 병휘오빠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연신 손목에 찬 시계만 쳐다보면서 보채지만 시계바늘은 영우의 마음을 모르는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닭은 그녀는 창밖의 풍경에 마음을 달래는 수
밖에 없다.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도 결국은 지나고 영우를 싣고 달려온 버스가
횡계 터미널에 도착했다.
영우는 미리 엿보고 왔던 시간들이 끊어짐 없이 이어질 거라는 믿음을 안고 이곳에 다시 온 거다. 터미널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낯익은 얼굴을 만날까 봐 모자를 꾹 눌러쓰고 걸었다. 사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어차피 다 알게 될 것을,,, 거리는 코스모스가 사라지고 계절이 바뀐 것 말고는 지난가을 광경 그대로다. 찬바람을 마주하며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이 저만치 하숙집 대문이 보였다.
반가움과 설레임이 밀려왔다. 하숙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영우의 심장이 쿵쿵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다. 현관문 앞에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아주머니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 대답이 없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보니 멀리 가신 것 같지는 않은데,,,’ 혼자 상상하며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안의 상태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불이 두툼한 걸로 바뀐 거다. 지난가을 떠나기 전까지 얇은 이불을 덮고 잤었는데 겨울을 지나면서 두꺼운 거로 바꾸어주신 모양이다. 방바닥에 손을 대 보았더니 온기가 있었다.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불을 덮었다. 포근함이 온몸으로 퍼지며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온 것처럼 편안했다. 손을 뻗어 부엌문을 열어 보았다. 연탄불을 때고 있는지 온기가 느껴졌고, 두꺼비집 위에는 중간 크기의 주전자에 물이 가득 담긴 채 올려져 있었다. 병휘오빠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퇴근해서 들어오는 병휘오빠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부엌으로 갔다. 쌀을
씻어서 연탄불위에 올려놓고 밥이 익는 동안 반찬거리를 사려고 식료품 가게로
갔다.
범수아저씨를 보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다행히 범수아저씨는 안 계셨다. 대신 그 집의 딸 순희 씨를 보았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순희 씨하고 두 손을 마주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마음이 급한 영우가 긴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며 잡았던 손을 놓고 아직은 덜 숙성된
황태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급하게 황태국을 끓이고 찬장에 있는 반찬을 꺼내고
상을 차리는데 밖에서 돌아온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저예요 아주머니 죄송해요”
“어! 누구라고, 근데 어떻게 다시 온 거야. 아주 살려고 왔어?”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냐. 색시가 그렇게 떠나고 병휘총각이 얼마나 외로워 했는 줄 알아?”
어느 날 홀연히 떠난 영우의 매정함을 탓하면서도 다시 돌아와 밥상을 차리고 있는 영우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는지 아주머니가 옆에서 도와주셨다. 이제 병휘오빠가 퇴근해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병휘오빠를 기다리기로 하고 뜰로 나갔다. 공연히 담장 밖이 궁금해져서 장독대위로 올라섰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아래 마을의 골목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여전히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용두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중학교 올라갈 나이가 돼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옷을 입은 예쁜 여자아이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까치발을 들고 내려다보았다.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남자아이하고 구석진 담벼락 뒤에 숨어 있다. ‘얘야 꼭꼭 숨어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고만고만하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의
지붕위로 올려다보았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렴풋이 어린 시절 영상이 떠올랐다.
그때도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저녁 무렵이었던 거 같다. 동무들과
한참 술래잡기에 빠져서 해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술래한테 절대 들키지
않을 깊숙한 곳에 광희하고 둘이서 몸을 숨겼다. 이렇게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한 것이 자랑스러워서 광희하고 손을 꼭 잡고 숨을 죽이며 숨어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엄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나가려다 순간 멈췄다. 그리곤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의
부름을 거역한 거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났다. 하지만 애써 찾은 비밀공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혼자 남아있을 광희한테 미안할 것 같았다. 영우의 작은 손에
긴장의 땀이 맺히는 중에도 그만 놀고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영우가 나타나지 않자, 엄마는 자식들 이름을 전부 부르고 계셨다.
“갈마야, 갈영아, 영숙아, 영우야”
‘엄마는 자식들 이름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가 보다 내 이름은 영우인데,,,’
한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두 아이들은 어느 순간 주위가 너무 조용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술래잡기를
하고 놀던 동무들이 저녁을 먹으러 전부 집에 돌아간 모양이다. 그때 어린 영우는 배신감과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옆에 있던 광희가 영우를 달래며 영우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자기도 울고 싶었을 텐데, 어렸어도 남자라고,,,’
퇴근해서 돌아온 병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꿈에도 그리며 보고 싶어 했던 영우가 정성스레 차린 밥상을 앞에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병휘를 보며 덩달아 좋아서 “저 표정 좀 보소”하며
병휘를 놀려 댄다. 재회의 기쁨을 누리며 두 사람은 신혼의 달콤함을 미리 경험하듯 저녁밥을 먹고 있다.
설거지까지 모두 마친 영우가 오랜만에 병휘오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오빠”
“나도”
“무슨 말이 그래”
원래 병휘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말이 짧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사랑의 언어를 듣고 싶었다.
“얼만큼 보고 싶었는데”
“하늘만큼 땅만큼”
“뭐야! 아이 정말”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탓하며 병휘가 더욱 영우를
감싸 안았다. 영우는 서서히 호흡이 가빠진다고 느꼈다. 이윽고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고 천지가 진동했다. 형용할 수 없는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잔잔한 호수의 평온함처럼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방안에는 사랑의 감내와 포근한 땀내가 가득했다.
몸을 일으킨 병휘가 수건을 가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영우의 몸을 닦아 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말 없이 창문밖 밤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