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 귀향, 어릴 때 기억 하나도 지워지지 않아>- 이0원(남, 82) 2021.3.16.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라는 시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오로시(烏鷺詩)>라고 이성원 씨는 말했다. 이직(李稷, 1362~1431)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시조이다. 그의 증조부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라는 시조를 지은 이조년(李兆年, 1268~1342)이다. 조상이 유명한 작가이면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다. 그의 조상이 우항리에 터를 잡은 때는 약 300년 전이다. 조상 중에 한 분이 강릉으로 귀양을 가다가 문막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곳에 묘를 쓰고 자식들이 살게 되었는데, 땅이 좁아 살 곳을 찾다가 우항에 정착하게 되었다. 8대조부터는 산소가 모두 우항에 있으니, 그때 우항에 들어왔을 것이다. 풍수를 보고 사람 살 곳이라 터를 정했다.
이0원 씨는 고향이 우항리이다. 젊었을 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많지 않았는데, 살다보니 점점 고향이 그리워져서 귀향을 하게 되었다. 고향에 와서 집도 새로 짓고 가꾸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이성원 씨가 어렸을 때 우항에는 약 30호 가량 되었다.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우항에 인구가 늘게 되었다.
이0원 씨는 11살 때 6.25한국전쟁을 만나서 충청도 괴산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터에서 횡성사람이라고 하면 깍쟁이라고 해서 밥을 주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나 피난 갔을 때 횡성사람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만큼 전쟁시절은 어려웠다. 이성원 씨는 전쟁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는데 어려서 겪은 탓인지 기억을 잘 하고 있었다.
어려서 원주로 유학을 가서 지내고, 도로공사에서 직장생활을 한 탓에 고향을 많이 떠나 있었다. 그래도 어느 누구보다도 고향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새말에 6.25한국전쟁 때 비행장이 있었던 사연, 전쟁 이야기, 마을제사, 곳집이야기 등 참 많은 고향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야기 다음에 마을이야기를 꺼낸 것은 마을제사이다. 농악대를 앞세워 마을을 돌면서 걸립을 해서 제사비용을 마련하고,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은 마을 잔치였다. 동네사람 모두 돼지고기로 배를 채우고 술도 한 잔씩 하는 날이었다. 마을의 상장례를 비롯해서 큰 행사는 유학계가 있어서 주관했다.
짚신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었다. 고무신이 제일 좋은 신발이었는데, 고무신이 아까워서 신발을 들고 맨발로 다녔다. 그래도 자기가 부지런하면 짚신을 삼아신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짚신을 삼는 게 어렸기 때문에 잘 안 되었다. 그러면 어른들이 잿간에 가서 신을 매달고 절을 하고 오라고 했다. 그러면 짚신이 잘 삼아 진다고 했다. 그래 아이들이 짚신이 안 되면 매일 잿간에 가서 절을 하고 왔다. 어른이 돼서 생각해 보니, 어른들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보라는 뜻이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동네 아이들이 다 나와서 달맞이를 했다. 밤새 망우리를 돌리면서 놀았다. 어머니들은 물을 장독대 위에 떠놓고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아이들 놀이는 마치 축제 같았다. 특히 하대리 아이들 하고 많이 싸웠다. 망우리를 돌려 던지고 돌을 던지는 석전이 있었다. 장남 삼아 하는 놀이이지만 우항리에는 사람이 많아서 이겼다.
세월이 벌써 많이 지났지만, 이0원 씨의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단오에 그네를 타고 놀았고 취떡을 먹었으며, 메일농사를 지으면 아까운 밭에 심는다고 욕을 먹었다. 그 당시는 밀을 많이 심어서 우천에서는 잔치국수를 메일로 만들지 않고 밀가루로 하였다.
이처럼 이0원 씨의 우항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