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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근성(根性)
인간의 언어는 다른 생물들의 그것과 달라서, 현재의 표현과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미지의 차원마저 넘본다. 시라는 언어양식은 그 첨병의 역할을 한다.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새로운 느낌, 새로운 의미, 새로운 시공을 향한다.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와 자극 속에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 기지(奇智, wit)를 동원된다. 기지는 일반에서 차이나거나 모순되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내면의 새로운 의미, 정서, 미학 등을 일깨우는 힘이다. 차이와 모순과 부정, 이 셋은 시적 기지의 결과이며 현대시의 생리적, 형태적 근본 성향(tendency)이다. 여기에 시적 윤리라는 덕목을 더하여 현대시 양식의 네 기둥이라 할 수도 있다.
1). 차이와 모순
현대인은 쉼 없이 자신의 욕망을 변경하고 있고, 시인은 그것을 언어로 조직화한다. 표현은 언제나 완전에 이르지 못하고 빗나가기만 한다. 시적 원망(願望)은 자동화된 기성의 언어에 갇히지 않는 경역에 있는 것이다. 시인은 복잡 미묘한 상황과 내면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더욱 개방적이고 탄력성 있는 기지를 발휘한다.
기지는 지력(知力)이나 창의력 등 정신능력으로서, 익살스럽거나 놀라운 쇼크를 주는 표현능력이다. 기지에 의한 놀라움은 말과 의미 사이의 예견치 못했던 연관성과 차이성이 작용한 결과이다.[M. H. 에이브람스, 『문학용어사전』]
일상회화에서는 말투와 표정만으로도 속뜻을 교환할 수 있지만, 문자언어로, 그것도 압축적인 언어로 속뜻을 표현하는 시에서는 그러한 현장적 기교들을 이용할 수 없다. 타자들의 내면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이면서도 적확한 언어,실제 담화에서의 얼굴표정이나 행위 이상의 탄력적인 언어전략이 요구된다. 그래서 관습적 예측, 표면적 의미에 차이나거나 그 모순을 내세우거나 부정함으로써 이면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근대이전의 시가 유사성을 중심으로 모방론적인 동일화를 겨냥하는 단순 비유 중심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시는 차이성을 중심으로 언어적 탄력을 얻으며 그로써 새로운 발견을 구현하는 것이다. 단 그 개방적 긴장의 목표는 해석 불가에 있지 않고 사회적 공유라는, 최소한의 윤리를 지향하는 데 있다.
일반의 인식과 예측에서 벗어나 다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모든 긴장의 언어를 고대 서구인들은 상징, 또는 비유라 불렀다. 그 중에서 언어 체계에 의한 비유는 아이러니, 또는 ‘문채적 비유’라 불렀다. 문채적 비유, 넓은 의미에서의 아이러니는 20세기에 와서 시적 기지에 의한 비유, 지적인 언어 전략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I. A. 리차즈, 클리언스 부룩스, R. P. 워렌 등 20세기의 대표적 문학연구자들은 인간다운 생각과 행위는 아이러니를 통하여 광범위하게, 진실 되게 다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아이러니를 상호 대조되는 충동을 붕괴시켜 균형에 이르게 하는, 수준 높은 언어양식으로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이러니는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작동되는 언어의 범위에 따라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구조적) 아이러니로 나누어지고, 성격에 따라서는, 이상적(理想的) 환상이 갑자기 파괴되는 낭만적 아이러니,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우주적 아이러니, 아이의 순진한 시점에 부조리한 현실을 대조함으로써 생성되는 순진성 아이러니, 겉으로는 칭찬하지만 실제로는 비난하는 냉소적 아이러니, 겉으로 무지를 가장하여 상대방의 허점을 짚어내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등등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도 역설(逆說), 반어법, 중의법(重義法), 과장진술, 낮춘 진술(축소), 패러디, 미화법, 곡언법 등등의 갈래들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역설(paradox)― 보편적 논리에는 모순되면서도그 이면의 어떤 진리 또는 진실을 드러내는 ‘역설’의 경우, 그 표면적 ‘모순성’이 아이러니현상에서의 ‘차이성’과 대비될 만하여, 아이러니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차이와 모순은 차이성 중심 비유의 전통적인 두 바퀴라 할 수 있다. 가령 ‘내 마음은 호수’란 비유만 하더라도, 일반의 인식에 대한 부정과 차이를 통해 모순된 표현을 내세워 이면의 숨은 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와 모순은 ‘부정’과 함께, 시적 영감에 대한 당위적인 언어 표현인 동시에, 현대시의 형태적 정신적 근성을 이루는 세 극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른바 차유의 특성이기도 하다.
우리 근대시의 고전이 된 「알 수 없어요」를 다시 보자.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 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다’고 부정하는(시치미를 떼는), 반어적 아이러니 또는 낮춘 진술(understatement)의 아이러니가 표현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화자의 속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의 수직(垂直)의 파문’, ‘오동잎 같은 발자취’,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같은 얼굴’, ‘꽃 없는 깊은 나무’며 ‘탑 위의 하늘같은 입김’, ‘작은 시냇물 같이 노래하는 이’, ‘바다를 밟는 아름다운 발꿈치’ ‘떨어지는 해를 단장하는 시’, ‘다시 기름이 되는 재’ 등등 확장은유를 이해하고, 시의 내외 상황과 연동함으로써 절대적 존재로서의 ‘님’이란 주지를 이해하게 된다. 또한 임의 모습인 오동잎은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파문을 일으킬 뿐 아니라(모순) 연꽃 같은 발꿈치로 끝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의 저녁노을을 단장한다는(과장진술ㆍ차이) 등 상식에서 벗어나는, 차이와 모순의 표현들이 ‘절대적 존재를 향한 동경과 구도적 정진’이란 주제를 형상화 함을 알 수 있다.
현대시의 차이와 모순의 축은 아이러니와 역설을 구축할 뿐 아니라, 기상(寄想)과 위트에 의한, 차이 나고 불합리한 여타 언어 전략을 생성한다. 새로운 비유, 비현실적 환상, 언어유희와 문법 파괴, 장르패러디 등등을 통해, 온갖 차이와 모순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전봉건, 「피아노」
여성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는 정황을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감각화 하고 있다. 피아노소리가 물고기가 되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떼를 지어 빛(소리)의 꼬리를 물 듯 화음을 이루는, 일반 상식과의 차이, 또는 모순된 표현으로 미적 진실을 기술하고 있다. 기지 또는, 기상(寄想)에 의한 차유들이다. 마지막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라는 돌발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는 쏟아지는 피아노소리와 일체에 이르는 순간을 기상에 의해 표현한 것이다.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선율과 화자가 미적(美的) 물아일체에 든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의 차이와 모순이 일반의 ‘앎’에 대한 부정과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면, 「피아노」의 비현실적 자유연상은 현실적 판단과 논리의 부정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차이와 모순의 극은 부정의 극과 함께 길항하면서 차이성이 강한 비유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겠다.
2). 부정과 시의 윤리
현대시의 세 가지 근본 성향, 그중에서도 부정은 전제적(前提的)인 축이라 할 수 있다. 보편과 객관에 대한 부정, 차이와 모순과 부정에 대한 재부정 등에서 개방적 주체와 표현적 긴장이 발발하고, 인지작용의 활성도가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부정은 기존의 양식을 전복하고, 제 3의 새로운 현존을 드러내기도 한다. 파격적이거나 퇴폐적이거나 난해하며, 환상적이고 유희적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는 ‘추(醜)의 미’와도 같은 무형식, 부정확, 기형(畸形) 등과 관련된다. 퇴폐주의,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해체주의 등등 현대 과격 모더니즘 시들의 핵심 언어전략과도 관련된다.
이름성르은와다 그러마입소울다 돌아아녀와그다 구두에자이덕서 식물집하죄이자
도도는소잤 지세술녀었 앉서냄서린 끝밤갈는에 채을자나짓
모눈녀 요좀는 소샐쪼 이처언 랑하많
이 줘 구 럼 아
맑 요 역 차 얀
질
하
니
까
까
만
죽
음
이
- 조향, 「물구나무선 세모꼴의 抒情」
1연에 해당하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눈이 맑은 소녀와 잤다 그러지 마세요 입술 좀 줘요’부터 다섯 개의 역삼각형을 상하로 왕복하며 읽어야 한다. 전체 형식은 복판의 긴 역삼각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꼴이다. 양식적 틀을 깨는 ‘파격(破格)’은 그 이전 우리 문학사에서 김병연(삿갓), 이상(李箱) 등에서도 볼 수 있었거니와, 위의 시는 인쇄 형태로 남근의 모양을 나타낸 구체시(concrete poetry) 양식이면서, 초현실주의 회화의 데칼코마니 기법을 차용한 전통 시양식의 부정이다. 내용상으로도 프로이트의 성애(性愛)를 추구하는, 1950년대 대학교수의 고상한 풍속을 전면 부정하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이다. 주제적인 면에서도 형식적인 면에서도 이후의 적잖은 후배 시인들에 의해 모방되는 바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이상(理想)을 좇지만 그것을 실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상은 늘 재설정되고 자아는 그를 맴돈다.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거울단계의 동일화도, 또는 상상계(현실적 법식과 윤리)와의 동일화도 결코 완전에 이르지는 못하고, 따라서 만족하지도 못한다. 특히 시인은 현재적 법식의 권위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며 순간적이나마 환상, 현실 너머의 시공을 만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사랑도 현실적 논리로는 닿지 못하는, 부정의 심연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일까?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사물도 자아도 모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인식의 부정에서 시작되는 시이다. 물이 물만이 아니고 하늘이 하늘만이 아니고 내 안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 내 사랑과 전 우주와 나와의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그대는 내 안에 있을 때도 안정하지 못하고 물처럼 흐르거나 은밀하게 숨는 모순의 존재이기에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역설에 전율하게 된다. 부정과 차이와 모순의 축이 연동하여, 유사성 중심으로 설득하는 수사방법으로는 미칠 수 없는 서정의 역동을 불러오는 것이다.
‘부정’의 언어가 두드러졌던 예술 사조는 기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초토화(焦土化)를 공표했던 다다이즘과 그를 무의식의 이론으로 합리화 했던 초현실주의로 이어진 바 있다.
소 한 마리 달려 나온다
그 목소리 길게 눕는다
성냥을 그으면
손뼉 치는 소리 들린다
소 한 마리 달려 나온다
무너지는 복숭아밭 그 아득히
갈매기
자전거 탄다
- 신진, 「바다ㆍB-목저(木笛)있는 풍경」
현실적 논리 밖의 이미지들이 무의식적인 추상화를 이루는, 1970년대 당시 초현실주의시라는 평을 받기도 한 연작시 ‘목저(木笛) 있는 풍경’ 중 한 편이다. 목저는 원시의 동굴 상징이자 무의식적 태내공상(胎內空想)― 뭇 생명이 자유와 화해를 누리는 내면의 요람 상징으로 설정되었다. 표현상으로는 초현실주의의 절연(絶緣)의 이미지를 좇으면서, 내심 초현실주의를 넘어, 집단 무의식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절대의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화해의 시공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달리는 소의 목소리(양, 남성), 복숭아밭(음, 여성), 성냥, 손뼉(어울림, 화해), 자전거 타는 갈매기(평화) 등의 이미지를 시공(時空) 동시성(simultaneity)에 의해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런 추상논리의 언어는 과연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주적 인권을 짓밟던 당대의 위정자들과 그에 억눌린 채 살던 시민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인가? 암암리에 그들의 폭력에 야합하는 지적 놀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 봉착했다. 결국 추상의 무릉도원이란 현실도피이거나 자기변명의 야합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이후 추상적인 관념에 의한 시 쓰기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깨달음처럼, 시란 모른다는 사실을 진실로 아는 자의 고백이며, 고백적 시간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야합이나 도피가 아닌, 임시적 시간에서나마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으로의 거듭남이요 연대적 삶의 실현이다. 이는 시 양식은 물론 사회에 던져지는 모든 인간문화의 책임윤리이기도 하리라. 시란 차이와 모순과 부정의 자유로운 선의지(善意志)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언어적으로 사회화 할 때, 자아와 타자 간 긴장과 통합의 감동으로 동일화를 이루어가는, 사회적 책임윤리 또한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에도 심리학이나 언어학의 논리는 자크 데리다 식(式) 차연(差延, Différance)의 끝없는 의미의 지연― 이상적 의미에 대한 기표(signifiant)의 계속되는 맴돌기와 미끄러짐이 명분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의미이다. 그러나 시는 실재하는 구체적인 삶에서의 발견, 미와 진실의 체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언어적 생명체임을 어찌 한때의 논리가 부정할 수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시 쓰기라는 언어행위가, 무의식적 환상(프로이트)에 빠지고 말거나 의미 지연의 미끄럼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아집에 종속된 미혹이거나, 한낱 명분에 자유를 속박 당한 맹목이거나, 시인이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방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추상적인 독선과 수단적 가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의 시인들은 맹랑(孟浪)한 편법들에 쉬이 부화뇌동할 수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란 말이 있듯, 세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을 사람은 거짓도 믿게 된다. 하지만, 시인의 ‘시적 허용’이 유아론적(唯我論的) 맹목을 창조로 가장하거나 손쉬운 모방을 전위로 둔갑시키는 위선을 허용해야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시의 부정의 정신이란 것도 외곬의 타자성이나 유아론(唯我論) 같은 폐쇄적 독선을부정하고 타자성과 자아의 연대, 보다 개방적이고 새로운 정체성을 지향함에 있는 것이지, 기회주의적 변명을 위한 수단적 명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창의적 새로움과 진정 어린 지향성이란 현대시에서도 유효한, 언어예술로서의 책임 윤리가 아닌가 한다.
시인은 모든 정형화된 기준, 자동화된 명분 아래 감추어진 위선과 불확실성을 깨닫고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성찰과 표현에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 C. 브룩스가 역설은 시에 있어 적합하고도 불가피한 언어라 하고, 역설의 기미가 제거된 언어를 요구하는 사람은 과학자이고,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확실히 역설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한 것도[『The Well Wrought Urn』,1947]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가령, “다리 중에는 돌다리가 가장 튼튼하다.”는 말은 근대이전의 과학적 사실이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은 나름의 고뇌와 발견이 낳은 역설의 언어였다. 하지만 지나친 노파심과 불안감 속에 살아야 하는 세태에 대해서는 예의 속담에 대해서도 “철다리도 구부러뜨리고 건넌다.” “돌다리는 두드려보고 나무다리는 불질러보고 건너라” 등등 풍자적 해학의 역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차이와모순과 부정의 근성은 유사성 중심의 단순한 비유가 드러낼 수 없는 미학과 진실을 향한 열망에서 생성되고, 그 열망은 다시 유사성(인접성)의 축과 연동하여 동일화를 지향함으로써, 차유의 체계, 현대시 양식을 완성한다. 이 과정은 모방과 답습의 맹목이 아닌, 구체적 창의의 언어요, 현재의 맹목(盲目)을 걷어내고 멀고 먼 공동주체의 이상을 향한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세 극성과 시적 윤리에 대한 재고(再考)는 창작과 비평에서는 물론, 현대시 교육 현장에 있어서도 보다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시란 곧 언어 표현기술로 제작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새로운 인식을 돌보지 않는 문법적 비유론이나 추상적 논리를 추종하는 표현론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시 창작이 새로운 정신, 열린 윤리, 진정 어린 체험을 사회화 하고, 인간정신의 본질과 삶의 의의를 탐색하는 행위임을 깨닫게 할 것이다. 이는 시 양식의 발생론적 전통을 계승하는 길인 동시에 잘 쓴 글보다 감동력 있는 창작을 이끄는 방안이 되고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와 문학과 예술을 상업적 명리의 수단에서 건져, 시가 본질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개방적인 소통 매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의 파편화 현상과 위선과 소외를 성찰하고 극복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차유의 언어는 주체적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그것이 공동체적인 삶과 연동하는 이상(理想)을 향한 기원이요 미적 도전인 것이다.
차유적 표현에 쉽게 숙달되는 방법이 있을까?
왕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상(관련상황)의 표현에 있어, 일반 선입견을 전제로 하는 타성부터 버리고, 새로운 안목과 대칭적이고 개방적인 표현으로 새로움을 일으키는 과정을 연마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한다. 가령, 바다에서 불을, 불을 표현할 땐 물결을, 고독에 대해서는 꽃향기를, 행복에 대해서는 가시철망을. 이렇게 대조적이고 탄력 있는 연상 놀이를 통해 보다 깊고 너른 품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적 언어로 인생을 반영해온 속담의 패러디놀이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령,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 대신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거칠다.”라든지 “가는 떡이 많으면 남는 떡이 없다”라든지 하는 나름의 진실을 동원한 속담 뒤집기놀이이다. 정직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시대의 파격적인 발상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라는 속담은 요즘 같아서는 ‘사기꾼 기르기’ 표어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적 아이러니이거니와, 시의에 맞추어 “삼년 말잔치를 해도 한 끼 빚 못 갚는다.”라든지, “밉다, 밉다 하니까 숨쉴 때마다 미운 말 한다.”는 식의 풍유(諷諭)로 뒤집어봄직도 하다. 속담집을 펴놓고 할 수 있는 속담패러디 놀이는 자신의 시적 체험을 새롭고도 소통력 있는 언어 능력을 도모할 수도 있고, 시적 명상을 이끄는 화두를 제공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에도, 수면(水面) 아래에서의 자기갱신의 발헤엄이 차이, 모순, 부정, 윤리 등 네 극점 사이를 길항하며 치열하게 행해져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