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 주일설교
바울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사도행전 17:16~21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없고 전도를 반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면 불신자들은 우리보다 말을 더 많이 하며 도리어 우리를 전도하려고 합니다. 이것저것 따지며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말을 잘해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죠.
전도하다가 간혹 복음에 관심을 보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또 만나고 싶고 더 열심히 복음을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에 또 복음을 설명해 달라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전도에 미친 사람인데 도대체 왜 그들을 떠났을까요? 바울에게는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겠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 주십니다. 복음을 더 설명해달라는 사람들을 떠나버린 바울을 보면서 신자의 올바른 행동 원리를 배우기를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날 밤에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피신했는데 거기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얼마나 고상한 사람들인지 바울의 설교를 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11절에서 ‘너그럽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εὐγενής인데 ‘혈통이 좋다’, ‘마음이 고상하다’라는 뜻입니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처럼 베뢰아의 헬라인 가운데 믿는 남자와 귀부인이 늘어나자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거리는 약 80km인데 걸어서 3일 걸립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대인들 정말 징글징글한 사람들입니다.
소동이 일어나자 베뢰아의 신자들은 바울을 데리고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저 멀리 아테네로 가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테네까지는 320km입니다.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까지가 200km인데 그보다 1.6배 멀어요.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실라와 디모데는 함께 가지 못하고 바울만 먼저 아테네에 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아테네를 돌아보았더니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 제단을 만들고 만들다가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신의 은총을 입기를 누구보다 많이 원하지만 참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모르는 이 사람들을 보고서 바울은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고 평일에는 광장에서 헬라인들과 변론하면서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역설(力說)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도 있고 재미있으니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32절). 그 가운데 믿는 사람이 겨우 몇 명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아테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기보다 새로운 지식과 논쟁거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철학의 본산지 아테네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익 학파입니다(18절). 흔히 에피쿠로스학파를 쾌락주의, 스토익 학파를 금욕주의로 설명하는데 모두 인간의 노력으로 지고선에 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끝없이 논쟁하며 새로운 철학과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21절).
그들은 누구보다 신을 추구하면서도 참 신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자기들이 아는 여러 철학과 종교 외의 또 하나의 종교로 취급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반응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복음을 논쟁거리로 삼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책장에 꽂힌 여러 책 가운데 한 권에 불과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전에 갈라디아 지역과 마케도니아 지역에서는 헬라인들은 복음을 받고 기뻐하는데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켜서 다음 도시로 옮겨 또 전도하는 것이 바울의 패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헬라인들이 믿는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유대인들이 소동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조롱하고 일부 사람들은 계속 더 듣고 싶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도시는 바울에게 유리한 곳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말로 제압하는 데는 자신이 있습니다. 22절부터 31절 사이에 있는 바울의 설교를 읽어보세요. 바울이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며 철학의 본산지 아테네 사람들을 제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바울을 죽이겠다고 막무가내 덤비는 유대인들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곳에서 1년이고 2년이고 머물면서 아레오바고 광장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극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서양 철학사의 내용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32절에서 그들이 “네 말을 다시 듣겠다”라고 했을 때 바울의 반응이 3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좀 뜻밖이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바울이 어떤 도시를 떠난 이유는 자기를 죽이려는 위협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처음으로 아무런 위협이 없습니다. 바울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군중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이유로 복음을 더 듣겠다는 군중을 두고 떠나기로 했을까요?
본문만 보면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지만 다른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서 간 곳은 고린도입니다(행 18:1). 고린도에서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후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고린도에서 어떤 마음 자세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런 설명은 고린도전서 1:17~2:5에 있는데, 1:22~23에서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라고 합니다. 이어서 2:2에서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사람의 지혜의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2:5). 이 말에 의하면 바울의 아테네 전도는 한 마디로 실패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아테네 전도가 실패한 첫 번째 이유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6에 의하면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물론 그 격분은 거룩한 분노이지만 전도의 동기가 분노이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굴복시키려고 시작하는 것은 전도의 올바른 동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가면 관광지가 온통 절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죠. 우리 동네에는 “갓 신 내린 아기 동자” 어쩌고 하는 현수막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당장 철거해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절이나 무당집을 철거한다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어둠을 제거하는 방법은 어둠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비추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린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전함으로만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 전도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할 때만 가능합니다.
아테네 전도가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바울이 말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7에서 바울은 회당과 광장에서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논리로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변증은 신자에게는 유익하지만 전도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복음은 그냥 전하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씨를 뿌리면 씨가 알아서 싹이 납니다. 농부는 싹이 나게 할 방법도 없고 의무도 없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 속에서 영혼을 살립니다. [사영리]를 읽어주려고 할 때 이런 말을 누가 믿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 것이 바로 그런 단순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말을 잘하면 전도를 잘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드는 사람들을 모두 유창한 말로 굴복시키면 꼼짝없이 믿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실패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4대 성인입니다. 4대 성인이면 그가 거짓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는 4대 성인은커녕 거짓말쟁이입니다. 자, 당신은 예수님을 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겠습니까?” 이렇게 논증하면 듣는 사람이 안 믿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에 지면 화를 내든지 조롱할 뿐 믿지는 않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조롱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테네의 실패를 기억하고 고린도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5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은 바울처럼 유창한 말쟁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말로 사람을 굴복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거억할 것은 말을 못해서 전도를 못한다는 생각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말을 잘 하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멋지다거나 성가대 찬양이 아름답다거나 목사님이 설교가 재미있다거나 우리 교회는 밥이 맛있다거나 뭐든지 복음이 아닌 것을 선전하는 것은 결코 전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멋진 예배당, 화려한 성가대, 재미있는 설교 등 아무것도 없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밖에 말할 것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믿는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주일마다 교회에 오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에 유창하지는 않아도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자신이 믿는 십자가와 부활, 천국의 소망을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영혼도 살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도 살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철학과 유창한 변론을 좋아하는 아테네 사람들, 바울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와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자신의 언변으로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떠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말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