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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는 독립운동가가 있습니까? 어떤 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되고 있다면 기억될 수 있는 조건을 그가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제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
여기는 저에게 낯익은 곳입니다. 대만, 젊은이들에게도 그럴 겁니다. 맛집으로 유명한 여행지 대만이니까요. 어떤 가게의 음식은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맛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 가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만약 알았다면 들렸을 장소가 지척에 있습니다. 북쪽과 남쪽에 외벽만 남아있는 타이페이 형무소터입니다. 대만의 서대문 형무소와 같은 곳이죠. 우리가 몰랐던 이곳에서 91년전 한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순재/연예인: 지금은 이렇게 벽 하나만 서 있습니다만 바로 이 자리가 1928년 10월 우리 조명하 의사가 순국한 타이페이 형무소 옛자리입니다. 조명하, 그러나 이곳에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제 눈에 띄운건 당시 사망한 다른 이들의 이름, 14명의 미군 공군병사들이 사형을 당한 곳입니다.그걸 기념하기 위해서 이 패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We Will Remember Them 이들을 기억하자는 이야기예요. J.C. Buchanan, Herbert H.Carter, Donald K. Hathaway,~~~~ 우리 조명하 의사도 여기서 처형당한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무 기록이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무심히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벽이 됐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사실 이 근처가 대만의 유명한 맛집들이 많은 데거든요. 아까도 보니까 가게 앞에 줄을 쭉 서 있더라고요 그런데 여기 그런 조먕하 의사순국 근거가 한쪽이라도 있었으면 그 분(한국 방문객)들이 한번이라도 여기 들르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이름, 하지만 어떤 이름은 그렇지 못합니다. 기억되지 못한 이름, 조명하, 그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30여년째 일제가 식민통치 중이던 대만 (1928년 5월), 이날 타이중 시내에는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대만 일치시기(日治時期, 1895~1945)] 대만이 일본에 식민통치를 당하던 시기, 대만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첫 식민지였다. 바로 환송식었죠. 그 대상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일본 육군대장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그리고 같은 시각, 한 조선 청년이 찻집문을 나섭니다. 단도 한 자루를 가슴에 품은채 말입니다. 환송식은 절정에 달했고 청년이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옵니다. 구니노미야를 태운 차가 모퉁이를 돌기 위해 속도를 늦춘 그 순간입니다. 홀로 계획한 거사를 위해 망설임없이 몸을 던진 청년, 그는 바로 조명하(1905~1928) 의사입니다. 조선 청년의 의거로 대만총독부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일본신문엔 대만 모중대사건으로 다나카 수상 사임), 구니노미야 육군대장은 당시엔 목숨을 건졌지만 의거 8개월 후 사망하죠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8개월뒤 복막염으로 사망), 업적이 기준이라면 대단한 의거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었을 조명하 의사 (기억되지 않은), 하지만 업적 그 너머에는 기억되기 위한 더 많은 조건이 놓여 있죠. 우리는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경기도 화성시, 자택겸 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이곳은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입니다.
조영환/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조명하!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조명하 의사와 관련된 기록은 여기에 있죠. 趙明河義士之像. 보기에도 많지 않은 기록입니다.
이 사진은 아마 오사카에서 찍은 사진으로, 고향으로 전달된 사진인데 이 사진이 거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6.25 전쟁 끝나고 백방으로 찾았으나 누군지도 알 수가 없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이 있으면 자료가 더 나왔을텐데~,
기자: 조명하 의사 사진은 몇장 정도 있으세요?
조영환: 지금 이거 한 장이랑 대만에서 받은 거 한장하고 그 두장 밖에 없죠. 저희가 가진 건 유학시절 조명하 의사 사진,
기념사업회가 소장중인 사진은 단 두장, 최근 대만에서 발견된 사진을 더 해도 그의 사진은 모두 석장뿐입니다. (체포직후 조명하 의사사진).
조영환: 조명하 의사가 일본과 대만에서 편지를 보내오는데 그 유필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요. 가족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편지를 받으면 태워라, 불태워라 그렇게 편지 끝마다 꼭 썼기 때문에 선친들이 다 태웠습니다.
역사는 기록으로 기억됩니다. 독립운동도 그렇습니다. 만약 기록이 없었다면 무력으로 항거한 의사로만 이분을 기억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독립운동가 윤봉길).
윤주/윤봉길 의사 조카: ‘그(윤남의)가 없었다면 윤봉길 의사도 없었다’ ‘이대로 살아서는 돌아가지 않겠다’ 그런 편지를 받아보고 윤의사의 동생, 제 선친(항일애국지사 尹南儀)께서 안방 천장에다 그 중요한 유품을 넣고 밀봉했습니다. 한국전쟁때도 유품을 넣고 다니면서 보관을 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기념관/서울 서초구: 윤봉길 의사를 그는 농촌계몽운동가로, 문학가로, 그리고 교육자로도 기억합니다.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편지 1931.9.9.), 생전에 손 편지와 일기, 저서와 같이 기록이 보존되어 있어서 가능한 기억 (상하이에서 보낸 어머님 전상서 1932.1.31), 그 후손에게는 다행스럽고 또 자랑스러운 일이죠 (거사 당일 김구와 맞바꾼 회중시계 1932.4.29),
윤주: 제가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에 아버지께서 장롱에서 흰 보자기에 싼 물건을 풀어 보시고 그것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잘 보관하셔서 ‘저게 도대채 뭘까?’ 어느날 친구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둘이 놀다가 참 궁금해서 풀어 보았습니다. 풀어보았더니 윤의사가 혁명할 때 가지고 있던 피 묻은 손수건, 또 회중시계 등 윤의사 유품이 나와서 어린 나이였지만 친구한테도 참 크게 자랑을 했고~
국립 대만 도서관/대만 타이페이, 그런데 만약 이 같은 기록이 없는 독립운동가 라면 그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국립 대만 도서관의 도움으로 우리는 방송사상 최초로 당시 대만 일일신보에 실린 조명하 의사의 기록을 학인했습니다. (차이후이핀 국립대만도서관 사서),
차이후이핀/대만국립도서관 사서: 지금 보시는 것은 1928년 6월 15일자 대만 일일신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한달 뒤에야 자세히 보도한 첫 기사가 나왔습니다.
함께 지켜보던 대만 국립대 교수(황메이어/대만대학교)가 의미심장한 의견을 건넵니다.
황메이어: 보도통제가 이루어진 한달 동안 총독부와 일본제국에서 내부적으로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신문기사를 어떻게 풀어내고 대중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지에 대해서요.
일제 강점기에 기밀문서 밀대일기(일본 육군성에서 1868년부터 1942년 까지 작성한 기밀문서 모음)입니다. 이 문서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자살을 결심한 조선 청년의 충동적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달간 보도를 통제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모르핀 중독자,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의하였다 우발적으로 위해를 입혔다 조선인 이라고 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장래에 희망도 없기 때문에 자살을 결의, 실망한 나머지 자살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감히 대역죄를 저질렀다, 범인 명하와 교제한 것으로 알려진 (요정) 조신루의 (기생) 순란),
독립운동의 축소와 왜곡은 일제의 관행 중 하나, 이봉창 의사의 의거 또한 취업이 어려워 벌린 일로 폄하 했죠 (취업난에 대한 초조함 때문에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뉘우치다). 일제의 악의적인 보도에도 대만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항일문학가 린시엔탕(林獻堂, 1881~1956, 일제 강점하 대만에서 활동하던 항일문학가)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린시엔탕은 이 글을 보고 ‘의미가 있는 희생이 되었으면’ 이라고 답했습니다. 조명하의 희생이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식민 통치하에서 대만인들의 기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만 타이중, 독립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 일제의 기록에 반박자료가 없는 조명하 의사의 처지는 대만의 한국인 교수에게 큰 숙제를 안겼습니다.
김상호/대만 슈핑과기대 교양학부 교수: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독립운동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조명하 의사를 계기로 해서 저도 이제 현대판 독립운동가가 된 거죠.
조명하 의사와의 인연이 시작된 건 지난 2004년 대만인 교수의 질문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질문: 조명하 의사를 아느냐고 그래서 제가 조명하가 누굽니까? 그랬더니, 아니 한국 사람이 조명하를 모르느냐 그래서 누구냐고 했더니 일제 강점기 때 구니노미야를 척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그분이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순간적으로 한 대 얻어맞는 것 같고 창피했어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김상호 교수의 부끄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만 역사사전은 일제의 기록 그대로 조명하 의사를 서술하고 있었죠.---1927년 1월 타이중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차포(茶鋪)에 취직을 했지만 대우가 안좋고 앞날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 1928년 5월 14일 자살하기로 하였다. (출처: 대만역사사전).
김상호: 이게 완전히 역사가 왜곡된 거예요. 그런 역사 왜곡을 보고 머리가 쭈뼛서고 그때부터 이걸 다 뒤집어 놔야겠다고 강하게 결심을 했죠.
의도를 가진 기록이 미치는 파장은 컸습니다. 일제의 기록은 백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조명하 의사를 바로 기억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죠. 조명하 의사를 다시 마주하며 생각해 봅니다. 의거의 축소와 왜곡으로 일제가 지키려한 건 뭘까요?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불안정한 조선인의 충동으로 규정하며 끝내 지키려 한 건, 그것은 일제가 자부하던 대만식민통치의 안정성, 그리고 동화정책의 뿌리인 천왕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결국 일제의 의도대로 이 사건은 서서히 기억에서 사라졌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 후대들은 거의 다 조명하 의사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도 기록에 울고 웃습니다. 조명이 된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재조명에 성공한 독립운동가-이회영,
이종찬/이회영 선생의 손자/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위원장: 사실은 우당이란 분이 정말 은밀하게 활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사진은 딱 한장이 있고, 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한장까지 합쳐서 두장이 있습니다. 사진도 안남겼고 기록도 잘 안남겼고 그러니까 저희로서는 그 기록을 찾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죠. 우당 이회영(1867~1932), 당시는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이종찬: 독립운동가는 사진을 안찍습니다. 왜? 수배를 당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진을 가급적 안찍으니까 사진도 적고 임시정부 자료만 해도 6.25 전쟁을 통해서 많이 상실돼버렸다고요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졌느냐 하면 일본의 범죄기록에서 우리는 애국기록을 찾아내야 하는 그런 역현상이 지금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겁니다. 왜냐? 독립운동가의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록의 부족과 왜곡을 넘어서는 방법은 흩어져 있는 기억을 모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당 이회영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는 이회영 선생을 기억하는 동료와 가족이 대부분입니다 (난이증교-이회영이 동지 윤복영의 집에서 숨어 지낼 때 선물한 부채 이회영의 글씨가 담긴 유일한 그림), 다행히 할아버지를 받들었던 후배들이 살아계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제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할아비지 기록을 하나 써주십시오 부탁했습니다. 또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할머니가 당신이 직접 기록을 쓰셨어요. 그런 것을 통해서 할아버지의 역할들이 자꾸 밝혀지니까 ‘아, 이렇게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이제는 대부분이 알게 됐죠. 후손으로서는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손이 없는 홍범도(1863~1943) 장군의 기념사업을 자청한 것도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일에 후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간직하고 있는 한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조명하 의사로 추정되는 사진입니다 (조명하 의사의 대만의거-1920년 일본을 경유, 대만으로 건너간 조명하 의사(1905~1928)는 1928.5.24. 일황의 장인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를 저격, 피체되어 약관 24세로 순국하였다). 그는 이 사진이 조명하 의사의 후손에게 전해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종찬: 후손이 있으면 자기 아버지의 역사를 찾기 위해서 계속 노력을 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후손이 없으면 누가 그런 노력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학자들이 해줘야 할 텐데 학자들이 개개인의 것을 연구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겁니다.
호주 시드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느끼는 삶의 무게는 나고 자란 땅을 떠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에 조명하 의사의 장손이 살고 있습니다. (조명하 의사 손자 조경환씨 자택-호주 시드니), 1992년 37세의 나이에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단행한 이민, 이 결정엔 마주하기 버거운 사연이 있습니다.
조경환/조명하 의사의 손자: 조명하 의사의 장손 조경환입니다. 이민 온 지는 한 27년 정도됐습니다.
질문: 이민 오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조경환: 처음부터 되게 쎈 질문을 하시는데~ 나라와 나라를 옮기는게 쉬운 일은 아니죠. 특히 이제 식솔들까지 데리고 망말로 속된말로 정이 떨어졌어요. 아니, 이런 나라를 위해서 24살의 젊은 나이에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을 바치셨단 말인가? 나라는 몰라준다는 말인가?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은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는 스스로 옳은 결단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민을 단행하게 된 거죠.
경환씨의 아버지이자 조명하 의사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조혁래 옹, (부친 故조혁래 옹이 수집한 자료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기억하게 하는 일을 살았습니다.
조경환: 저희 할아버님은 원래 불운한 독립투사셨고요. 왜냐하면 의거가 해외에서 이루어졌잖아요. 그것도 중국이 아니라 대만이잖아요. 중국에서 의거가 벌어진 분들이라거나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분들에게는 더 관심이 많으시고 우리 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너무 잊힌 거예요. 아버님은 그렇게 얼굴도 못본 할아버지를 위해서 현창사업을 개인의 노력과 자금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명하 의사를 모르세요. 저희 유족이 아무것도 안한게 아닙니다.
1968년 추도식을 시작으로 조명하 의사 선양사업에 뛰어든 경환씨, 그 긴 이야기를 호주의 지인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조경환: 정말 가깝지 않은 분이면 제가 말씀을 안드립니다. 제가 가까이 모시는 분들은 관심을 가지시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별로 관심이 없으세요.
조경환: (손녀에게) Am I your 할아버지? Or I am your brother?
손녀: 할아버지
조경환: 오케이
할아버지에게도 할아버지가 계셔~ 아주 유명한 분이야 유명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니?
경환씨의 생각처럼 모두가 조명하 의사를 잊은 건 아닙니다.
조영은/조경환씨 둘째딸: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서 가족들이 만나서 그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나요. 사진도 되게 많고,
조경환씨 아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내를 만나서 그때부터 쭉 이야기 들어온 것 같아요.
조영은: 나라를 위해서 24살에 목숨을 바치고 했던게 너무 신기하고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말씀 하셔서 남편에게 되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어요. 아빠 앞에서는 이런 말은 안했지만~
조예은/조경환씨 첫째딸: 엊그제도 인터넷에 검색해 봤어요. 조명하 라는 이름을 그런데 관련내용이 되게 많이 나오더라고요. 아빠 사진도 많이 나오고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을 위해 대만에서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자, 나온다, 이순재 할아버지------How to remember CHO MYUNG HA 조명하를 기억하는 법
조경환: 애들아, 여기봐, 여기 들어봐, 여기가 어디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사형당하신 형무소 자리야 그때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을 척살하려 한거야.
조예은: 히로히토의 장인 어른이었다고?
답변: 히로히토의 장인 어른, 그렇지.
가족의 기억에 지나지 않던 증조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독립운동사의 한장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잠깐만 잠깐만,
이순재/연예인: 참, 그런데, 조명하 의사가 후손이 있어요?
피디: 아드님은 돌아가셨고 손자분이 호주에 있습니다.
이순재: 그러면 조명하 의사가 결혼을 일찍 하셨네. 후손들은 어디 있어요 지금?
피디: 지금 호주에 있습니다.
이순재: 호주? 한국도 아니고 여기(대만)도 아니고 호주에 가 계시다.
지금 저기서 말씀하시는 호주에 있다는 그 후손이 나야.
경환씨가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제가 1988년 10월 10일 서울 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을 때 다 세워지고 나서 얼마나 감회가 대단했겠어요. 서로 부둥켜 않고 울 정도였는데~그때 생각하니까 좀 눈물이 나네요. 그 동상을 건립하기까지 그때 당시에 허가권자, 허가관청이나 이런 쪽에서 젊은 제가 봤을 때는 시달림이 심각했습니다.
피디: 기억 나는 일이 있으세요?
답변: 감사계통에 있는 사람이에요. 감사계통에 있는 사람은 뭔가 부정부패가 있으면 감사해야죠. 관리감독해야죠. 저는 그 사람(감사관) 한테도 뇌물을 준 적 있습니다. 그것도 목욕탕에서,
그때 결정을 했어요. ‘이건 아니다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이 많았어요. 그때,
이제 경환씨의 몫이 된 조명하 의사의 선양사업,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그는 걷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서울 대공원/경기도 과천시, 서울 대공원에는 조명하 의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후손의 돈과 눈물, 상처로 세운 바로 그 동상입니다 趙明河義士之像.
여기에 우리 조명하 의사님 동상을 제대로 세워 놨네. 이곳에서 한국을 찾은 경환씨를 만났습니다.
이순재: 조 선생님?
조경환: 조경환 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순재: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경환: TV에서 많이 뵈었는데 이렇게 만나뵈니까~
이순재: 먼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정말 아까운 나이에, 창창한 나이에~
조경환: 그렇습니다.
이순재: 큰 일 하셨습니다.
조경환: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24살이었거든요.
이순재: 글쎄 말이에요.
조경환: 저희도 24살을 지나왔고 자식들도 24살을 지나왔지만, 그런 생각은 항상해요. 어떻게 24살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생각을 했었는지~ 저는 그 나이에 맨날 들로 산으로 기타 메고 놀로 다녔거든요.
장하다! 趙明河 의거 日皇 裕仁의 장인이며
일본 육군대장인 久邇宮을 刺擊處斷하고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日帝의 刑場에서 殉國한 大韓男兒다.
그의 거룩한 뜻과 이름 영원할 것이다.
1988년 10월 10일 趙 의사 殉國 60주기 날에
한국일보가 各界 뜻을 모아 동상을 세우다.
1905년 4월 8일 黃海道 松禾郡 下里面 長泉里서 탄생
1928년 5월 14일 臺灣 臺中市 自由路 三段길에서 義擧
1928년 10월 10일 臺灣 臺北의 日帝刑場에서 殉國
1988년 후손의 노력으로 세워진 조명하 의사의 동상, 그후로 30년이 흘렀지만 조명하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이름입니다. 사실 제가 <꽃보다 할배>촬영차 대만에 갔지만 이 내용이 빠져 있었어요. 그건 뭐냐 그만큼 조명하 의사에 대해 몰랐다는 거예요. 알고 있었으면 아마 촬영지에 넣었을 거예요. 우리가 주장해서 갔을 겁니다. 그래서 대만 타이중에서 있었던 의거를 몰랐던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이게 참 아쉽다고,
제 유추입니다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관리했던 지역이 바로 대만입니다. 그런데서 거사를 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묻혀버린 게 아닌가?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나라가 대만하고 국교가 또 단절됐고 이런 것들이 겹치다 보니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똑 같은 의거인데 기억이 안됐던 거죠.
시대의 변화와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중수교에 즈음해서 노태우 대통령은---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비정상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한국은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양국은 이번 수교가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을 확신하며 선언했습니다.(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체결), 그러나 반대로 우리와 국교가 끊어진 서울 명동에 있는 대만 대사관은 오늘로 공식 업무를 마감하고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렸습니다. 44년간 서울 하늘 아래에 휘날리던 이 청천백일기가 단교를 맞은 오늘 기를 내리는 하기식과 함께 중화인민 공화국기인 오성기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대사관 현관에 기가 내려지자 김수기 주한대만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과 화교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간간히 눈시울을 붉혔고 이제 눈 앞에 현실로 드러난 단교사실에 슬픔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대만학생: 너무 슬프구요 우리가 나라가 없는 것이 너무 안됐어요.
이어 김대사의 짧지만 이임사가 이어졌습니다.
김수기 주한대만대사: 오늘 우리가 대만 국기를 다시 내리지만 이 국기는 우리 마음 속에 건다.
조경환: 1992년도에 대만과 단교가 이뤄지면서 대만을 우리나라가 버린 꼴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대만 입장에서는 한국을 배신자 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 배신자 나라의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 대만에 계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들은 관심이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잊히게 되고~
중국 루쉰공원(옛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기념관/중국 상하이, 한편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로 활기를 띄게된 선양사업도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사업이 바로 그랬죠. 1984년 상하이 루쉰공원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도 한중수교 라는 시대의 변화가 있었기 가능했습니다.
윤주/윤봉길 의사조카: 저희가 1989년도에 중국에 가서 “윤 의사 의거 현장에다가 기념사업을 하겠다” 그랬을 때 초창기에는 한중수교 전이기 때문에 “어떠한 기념물도 안된다” 그런데 마침내 1992년도에 국교정상화가 되면서 기념사업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조금 넓혀졌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는 묻혀있던 독립운동가를 다시 조명하게 합니다.
혁명열사증명서
중국정부가 발행하는 국가유공자 인증서로서
한중수교 이후 이회영-양세봉에게 수여됨
이종찬: 우리도 여순 감옥에서 이회영 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그냥 대련 경찰서에서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 웬걸, 여순 감옥에서 “여기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여순 감옥에서) 기념관을 딱 만들어 줬어요. 우리도 모르는 역사가 있었네. 중국에 남아 있었네~, 국교정상화가 되면서 중국에 있는 모든 자료가 확 튀어나오니까 우당 이회영을 재조명하게 됐단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 이회영 선생을 넘어, 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넘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종찬: 예를 들면 독립운동가를 포상하는 것도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이승만 대통령 주변의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좌익진영 인사들을 많이 포상하거든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분들의 훈격을 보시면 전부 하나씩 등급이 낮아요.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가를 재평가하는 움직임 마저 조명하 의사를 비껴갔습니다. 경환씨가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우당 기념관/서울 종로구, 그가 한국에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회영 선생의 후손이 보관주인 조명하 의사의 흔적, 사진속 인물이 정말 체포당시의 할아버지일까요.
조경환: 정말 의외입니다. 저는 이 사진이 있다는 내용을 전혀 몰랐어요. 아버님을 통해서도 듣지도 못했고, 그랬는데 발굴해 낼 수 있는 그런 단계까지 저희가 가지 못했고, 그래서 연구회를 비롯해서 학자분들이 이런 내용을 학문적인 접근을 더해서 많이 발굴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역사학자들에게 그 역할을 맡길 때입니다. 지난해 (2018년) 8월, 의거 90주년을 맞이하여 조명하 의사 연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초대회장은 호사카 유지(조명하 의사 연구회장) 교수, 어떤 인연이 그를 조명하 의사를 기억하게 하는데 동참하게 했을까요.
호사카 유지: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이 분들에 대해서는 제가 상당히 애착을 갖는 거죠.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드는 분들이에요. 제가 지금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제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철저한 사료에 대한 조사는 역사학자의 몫, 이제 사진의 진위를 논의할 차례입니다.
조경환: 이게 지금 이종찬 선생님이 보여주신 사진인데 이건 또 저희가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흐릿합니다. 학자분들이 보셨을 때 어떻신지? 이게 과연 진짜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발굴이 된 거고~
호사카 유지: 오늘 이 사진도 하나의 자료예요. 먼저 중요한게 복장이죠. 그때 복장하고 맞는 지가 대단히 중요하고,
의거 당시 조명하 의사는 감시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무하던 찻집의 복장을 한채 거사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교수: 거사계획이 치밀했던 게 부귀원 복장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 여부는 더 봐야겠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탈영병을 찾아서 잡아 오는 그런 장면 같고요.
호사카 유지: 그게 약간 좀 그렇죠? 그때 군인들한테 체포된게 아니잖아요. 이 사진이 진짜 조명하 의사의 사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것은 연구해서 밝히면 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또 있다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망하기는 이릅니다. 기록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 중인 호사카 교수, 조명하 의사의 위치라든가 가치를 보기 위해서는 일본의 대만에 대한 식민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조명하 의사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자료는 일본에 많습니다. 왜곡된 기록에 대항할 다른 관점의 기록을 찾는 일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역사의 기록이 승자만의 것이라는 말은 한나라 안에서만 보면 그럴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승자라고 해도 현재는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북한도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승자의 입장에서만 쓴 기록은 일본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기록의 기억’은 한국이나 중국에 남아있는 거에요. 그런 부분에서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단히 많다고 전 생각하고 있는 거죠.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억해야 할까요? 그리고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이종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 휼륭한 분들이죠. 과연 그런 시대에 나는 그런 행동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애요. 그런데 그분들만 있었던 거냐?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임시정부를 몇 사람의 임시정부로 착각하기가 쉽다고요. 그렇지 않다 이거예요. 임시정부에는 제가 주먹 구구로 계산을 해보니까 약 2000명이 임시정부에 참여를 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중경임시정부청사 1945년 11월 3일), 그분들 모두가 영웅이 되는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그렇게 느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대만 타이페이에는 조명하 의사를 기억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타이페이 한국학교). 이곳은 바로 타이페이 한국학교 대만 한인들의 노력으로 세운 조명하 의사의 흉상이 있는 곳입니다. 매년 추도식을 갖는다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이순재: 조명하 의사님 흉상이 여기에 있어요. 매일 등교하며 조명하 의사를 만나는 아이들-조명하 의사의상(趙明河義士之像) 동상-아이들은 조명하 의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러면 여기 학생들은 조명하 의사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네요. 직원: 굉장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매년 그림, 글짓기 대회를 실시하고 하고 있고요. 그리고 조명하 의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순재: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학교에서 조명하 의사를 만난 아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친구와 놀 수 있는 오늘을 있게 한 고마운 역사입니다. “타이완 항일 의열 투쟁의 선봉 조명하”를 읽고---글짓기 대회 그리고 더 많이 기억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경기도 파주, 한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친 경환씨, 할아버지가 기억되게 할 방법을 그는 찾았을까요. 오랜 세월 원망했던 아버지와 그 이야기를 나눌 참입니다.
조경환: 아버지, 저 여기 왔습니다. 조명하 의사의 아들 경환씨의 아버지는 힘들고 외로운 선양사업의 여정을 모두 일기에 담았습니다. 그 일기를 경환씨는 오늘에서야 처음 펼져 봅니다. 빼곡하게 내려쓴 아버지의 글, 아버지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이 됩니다.
내 나이 5, 6세 때다
윗집 마당에 유골 놓고서
할머니가 아버지 해골을 들고서
“혁래야, 이게 너의 아버지다” 라고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생각난다.
후손이 잘못돼서
우리 아버지 큰 사람 못됐네-
하는 그런 내용이 있네요.
이순재: 자책 속에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의 후손, 이 또한 기억의 조건이 남긴 자화상입니다.
조경환: 제가 진짜 아버지한테 서운한게 많았어요. 아버지 저 못믿으셨죠. 제가 그랬죠, 아버지 평생 남한테 굽실 거리면서 현창 사업하는 것, 저 다시는 볼 수가 없다고요. 왜 죄를 지었냐고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제가 그랬죠 저는 그렇게 못한다고 말씀 드렸죠.
이순재: 할아버지를 기억되게 하는 일은 온전히 경환씨의 몫이 됐습니다.
조경환: 제가 약속 드릴게요. 제가 하는데 까지는 해서 나중에 하늘나라 올라갔을 때 적어도 얼굴도 못뵌 할아버지 한테 제가 손주입니다, 인사 드리면서 말씀 드릴 거고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그래 내가 오해했구나” ‘너 참 장한 일 하고 왔구나’ 하고 등 한번 두들겨 주고 한번 안아주세요.
이순재: 경환씨는 이제 아버지와는 다른 새로운 기억의 조건을 써 나갈 겁니다. 우리 곁에는 아직 수많은 조명하 의사가 있습니다. 기억에 담는 일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윤주: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기본사상은 같습니다. 자유로운 세상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려고 하는 것, 그래서 모든 독립운동가의 사상과 업적은 똑 같다고 봐야하는 겁니다. 업적이 크고 작고 비교한다는 자체가 좀 우숩다고 생각합니다.
이종찬: 독립운동사 가운데에 있는 역사만 자꾸 반복됐단 말이죠. 우리 우당 할아버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차츰 차츰 알려지게 됐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알려지지 않는 역사를 알려지게끔 만든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귀중하고 소중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명하(1905~1928) 우리의 기억 속 영원히. 끝. (EBS 다큐프라임 141화, “독립운동가 조명하”에서 정리).
① 독립운동가 조명하(1928년 대만) 생소한 이름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지난번에 독립운동가 박상진(1915년 광복회)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조명하도 윤봉길 이봉창과 같이 똑같이 독립운동 하다 순국한 애국자이다. 조명하는 24살 젊은 나이에 대만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② 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는 대만 다이중에서 일황의 장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를 단도로 척살하였다. 사건보도가 한달이 지난 6월 15일자 대만일일신보에 첫 기사가 나왔는데 흉악범인 조명하, 다이중의 불경사건 오늘 오후 3시를 기해 내지(일본)과 식민지에 동시발표,
③ 대만 역사사전은 일제의 기록 그대로 조명하 의사를 서술하고 있다.---1927년 1월 타이중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차포(茶鋪)에 취직을 했지만 대우가 안좋고 앞날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 1928년 5월 14일 자살하기로 하였다(출처: 대만역사사전).
④ 조명하 의사는 가족에게 해가 돌아가니까 편지를 불태워버리라고 말했다, 해방이 되고 당사자의 기록이 없으니 일제의 날조한 왜곡된 기록을 마주하게 되는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조명하 의사의 독립운동 사실들을 찾아서 바로 잡아야 한다. 후손이나 어느 학자가 할 일이 아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