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입문] 홍승용 소장님 강의 및 논의 내용 중에서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내용들 정리해서 올립니다.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라고 여겨서 올립니다. 강의 일자에 상관없이 강의 내용 정리되는 대로 조금씩 올립니다.
역할 개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는 파슨스가 생각하는 역할이 있고, 또 하나는 사르트르가 얘기하는 역할이 있다. 아도르노는 사르트르 쪽 역할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파슨스가 얘기하는 역할 개념은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도 자기 인격의 일부로 녹아들어 가서 사회의 기능을 하면서 기여도 하는 그런 부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역할은 그 사람의 실제 존재, 자기 자신과 다르게 ‘연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별개인 존재다.
나는 교사다 그러면 교사 역할을 할 때, 나 본연의 자세하고는 다른 것이다. 교사로서 나는 그냥 가서 교사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게 사르트르의 입장이다.
‘성격 가면’이라는 개념이 있다. 성격 가면(가면 캐릭터, 마스크 캐릭터). 마스크는 자본가들의 경우 자기가 인간적으로 무엇인가는 아무 관계 없고 ‘자본의 인격화’란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사 같아도 실제로 자본가로서 무엇을 할 때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가는 것이다.
이윤에 다 맞춰서 무엇을 한다는 말이다. 누가 들어가도 비슷하게 그 짓을 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기본은 다 똑같이 자본 논리를 따라간다. 이게 ‘성격 가면’ 개념인데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것도 그쪽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 내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연기하듯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 본연의 그건 아닌 것이다. 이런 측면이 강하다고 본 것이고. 파슨스는 그렇더라도 그게 나의 인격의 일부로 녹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연기라도 뭔가 들어 간다 일부가 된다. 파슨스 얘기도 아주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근데 그렇게 얘기할 때는 성격 가면이든, 아니면 연기든 그 개념에 담겨있는 비판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르트르 식으로 얘기할 때는 우리가 사람을 기능으로만 자꾸 보는 것 좀 하지 말자 그런 취지가 있다. 그러니까 뭔가 그 본연의 인간으로서 존중하라 이런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파슨스는 그렇게 역할 하는 게 사회에 적응하면서 사회가 잘 굴러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하다고 보는 관점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현재의 지배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그런 논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아이히만은 가면적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했다고 주장하면서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들어가 보면 사실이 그렇다고 볼 거다. 그 자리에 누가 앉아도 비슷한 짓을 할 수 있는 구조라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이고 그렇게 만드는 권력 구조고 이렇게 볼 것이다. 인간을 그렇게 갖다가 써먹을 수 있는 권력 구조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들뢰즈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나 본연의 것은 없고 어디에 접속되느냐에 따라 나가 규정된다. 본연의 실체라는 건 따로 없다. 이렇게 보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래도 들뢰즈는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은 자기 자신이다. 그게 너다 이렇게 말한다.
접속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하고 그렇더라도 예를 들어 내가 어느 순간 뭐가 되고, 또 어떤 순간 뭐가 되든 말든 여전히 ‘나는 나다’ 하는 소리 들어도 되니까, ‘모든 게 나다’ 하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책임, 노동력으로 계산이 되고, 투표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되는 하나의 단위로서, 내가 조금 전의 나가 아니고 지금의 나가 아니고 내일의 나가 아니고 계속 변해가더라도 어쨌든 하나의 통일체로서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측면이 있다.
들뢰즈도 그렇고 사르트르도 그렇고 그 두 측면 모두 얘기하는 게 맞다. 시스템이든 그게 무슨 조건이다. 거기에 많이 지배를 받는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걸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우리도 바뀐다.
근데 그걸 바꾸는 건 결국은 또 우리가 바꾸는 것인데 그걸 얘기를 안 하고 그냥 무조건 구조에 대해서 구조주의적으로 그렇다 하고 끝나버리면 그것도 문제다. 환경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것처럼 ‘나 하기 나름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문제다.
시스템을 조금 넓혀서 그것을 사회라고 보고 아이히만을 개인이라고 봤을 때 파슨스가 이야기하는 역할 개념, 사르트르가 역할 개념 이야기하는 게 둘 다 똑같이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거기에서 사르트르는 뭔가 괴리를 보는 것 같다. 역할과 그 본연의 인간 사이에 그러니까 즉자와 대자 등등으로 금을 그리려고 하는 것 같다. 파슨스는 그걸 한 부분으로 넣으려고 인격을 융합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럴 때는 그 역할이 남의 것은 아니고 이 사람 자신의 것이고 동시에 이 사람의 인격의 일부고 그럼으로써 그건 나쁜 것으로 따로 볼 수가 없다. 나쁜 게 아니고 그거는 그 사람이 그 사회에서 기능하고 역할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중요한 하나의 힘이다. 가변적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게 그 요소로 인정을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그 본연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얘기할 수 없다.
그러면 파슨스의 의미에서는 아이히만을 단죄하기 어렵다. 그 사람을 둘러싼 그 시대의 환경에 영향을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가 만들어놓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볼 때는 아이히만도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캐릭터 마스크로서, 역할로서 한 부분이 있고 동시에 그 본연의 자기도 있다. 본인이 자기에 근거해서 얼마든지 비판하고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어쨌든 아이히만이 이상한 짓 할 때 학살 명령을 내리거나 할 때 그거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런 측면도 있어서 그거는 체제 전체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그런 문제의식이 있을 것 같다.
파슨스 식으로 얘기해도 아이히만이 한 짓들이 있다. 그게 그 사람의 인격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들어갔다는 말이고 자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큰일 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문제는 파슨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게 작동을 하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한은 그 시절에는 그걸 기능으로 썼다. 사회가 움직이는 그 기능이 좋으냐 나쁘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를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면 그냥 다 통용되는 것이다. 그걸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전쟁 때 그렇다. 전쟁 때 사람 죽여도 되는 것이다. 일상은 안 되지만. 사회 기능주의다. 가치판단 하는 게 아니다. 구조가 잘 작동하도록 그 안에서 작동을 하고 있으면 괜찮은 것이다. 그래서 그게 루만이나 파슨스 변론적이라는 것이다. 현실 변론적이다. 그럴 수 있는 기능으로 작동하느냐 못하느냐를 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걸 못하면 나쁜 기능이 되는 것이다. 근데 기능이 잘 돌아가면 그게 인간을 죽이든 말든 상관이 없다. 그렇게 된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파슨스를 ‘기능주의’라고 비판한다.
2024. 2. 28.